‘포스트 이건희’ 시대를 맞은 삼성이 이재용 부회장을 중심으로 ‘뉴삼성’에 속도를 낼 전망이다. 이 부회장은 코로나19와 미중 무역분쟁으로 촉발된 글로벌 복합 위기에다 경쟁사의 도전, 재판으로 인한 사법 리스크까지 떠안은 상황에서 삼성호(號)를 이끌게 됐다. CNB가 그의 앞날을 내다봤다. (CNB=도기천 기자)
이건희 ‘일등주의’ 밑거름으로 과감한 혁신
반도체 기반으로 AI·6G·전장사업 ‘총력전’
“재판은 재판, 경영은 경영” 투트랩 전략
이건희 회장의 별세로 이 부회장은 여러 악재들 속에서 ‘포스트 이건희’ 시대를 이끌어야 하는 무거운 부담을 안았다. 그는 삼성의 완전한 1인자로서 ‘뉴삼성’으로의 변화에 한층 속도를 내는 한편 이른바 ‘국정농단’ 사건과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 관련 재판을 헤쳐나가는 ‘투트랩’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재판은 재판, 경영은 경영”이란 얘기다.
이는 사법 리스크가 이어진다 해서 이 부회장과 삼성이 계속 위축돼 있기에는 시장 환경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은 현재 숱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미·중 열강들의 무역 갈등,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재난, 여기에다 기업을 옥죄는 각종 규제법안까지 발의돼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실제로 삼성의 핵심인 반도체에서 메모리 부문 세계 2위였던 SK하이닉스가 인텔 낸드 사업 부문을 인수해 1위 삼성을 바짝 추격하고 있고,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 기업인 대만 TSMC는 삼성과의 점유율 격차를 더 벌려가고 있다. 엔비디아와 AMD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인수합병도 예사롭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은 메모리뿐 아니라 2030년까지 비메모리 부문에서도 1위 자리에 오르겠다는 ‘비전 2030’을 내건 상태다. ‘비전 2030’은 삼성전자가 2030년까지 연구개발(R&D)에 73조원, 생산시설 확충에 60조원 등 총 133조원을 투자해 시스템반도체 세계 1위를 차지하겠다는 목표다.
이와 함께 이 부회장은 인공지능(AI)과 5G와 6G 등 차세대 이동통신, 자동차용 전장사업 등 미래 먹거리 창출에도 힘을 쏟고 있다. 스마트폰과 반도체가 이건희 회장의 유산이었다면 첨단 고사양 반도체와 AI, 5G, 전장사업 등은 이재용식 혁신의 핵심동력으로 꼽힌다.
이 때문에 이 부회장 입장에서는 대대적인 투자를 강행할 필요성이 커졌다.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이 대규모 인수·합병(M&A) 등 과감한 결단을 내릴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이 회장이 쓰러지며 이 부회장이 경영 전면에 서게 됐을 때 처음으로 내놨던 작품이 M&A였다는 점도 이같은 예상에 힘을 싣는다.
삼성은 2014년 말과 2015년 석유·방산, 화학 사업을 각각 한화그룹과 롯데그룹에 매각했고 2016년에는 미국 하만을 인수했다. 이 부회장이 본격적인 수사·재판을 받게 되면서부터는 굵직한 M&A가 끊긴 상태다.
‘일본통’ 이재용, 韓日교류에 쏠린 눈
이 부회장은 과감한 투자를 위해 글로벌 보폭을 더 넓힐 예정이다. 앞서 지난 5월에는 코로나19를 뚫고 중국으로 올해 첫 해외 출장을 다녀왔고, 지난달에는 네덜란드와 베트남을 연이어 방문했다.
앞으로의 행선지는 오랜 협력 파트너인 일본, 중국, 미국 등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이중에서도 특히 주목받는 곳은 일본이다.
이 부회장은 일본 게이오기주쿠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은 ‘일본통’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지에는 그와 동문수학한 동창들이 주요기업에 포진해 있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이 생전에 이어온 일본 재계와 원로 인맥도 이 부회장의 우군이다. 이 부회장은 지난달 23일 베트남 출장 후 귀국길에서 “일본 고객들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일본행이 성사된다면 꽉 막힌 한일 민간교류에 물꼬가 트이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이 부회장은 국내 현장 점검에도 힘을 쏟고 있다. 연초에 경기 화성 사업장에서 반도체(DS) 부문 사장단 간담회를 연 것을 시작으로 한달에 한두번씩 임직원과 스킨십을 쌓고 있다. 지난 8월에는 경기 수원사업장에서 워킹맘 직원들과 만나 일과 가정을 함께 꾸려나가야 하는 고충을 듣고 공감했으며, 9월에는 삼성전자 세트부문 사장단과 전략회의를 가진 후 인근에 위치한 삼성디지털프라자 대치점을 깜짝 방문하기도 했다.
‘국민의 삼성’으로 거듭나기
사회공헌을 통한 기업이미지 쇄신도 속도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이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5~6년 전부터 ‘삼성맨을 위한 삼성’이 아니라 ‘국민의 삼성’으로 거듭나기 위한 플랜을 가동 중이다. 실례로 삼성전자가 10년 넘게 끌어온 반도체 피해자들의 보상과 사과요구를 전격적으로 수용했으며, 80여년간 이어온 ‘무노조 경영’ 역사도 마감했다.
또 명절 때는 삼성전자, 삼성생명, 삼성물산, 삼성증권 등 19개 전 계열사 임직원 20여만명을 대상으로 농어촌 자매마을의 특산품을 판매하는 ‘온라인 장터’를 열고 있다.
협력사에 대한 지원도 꾸준히 확대하고 있다. 반도체 우수협력회사 인센티브 지급 대상을 기존 1차 협력사에서 2차 협력사까지 확대했으며, 최저임금 인상분을 납품단가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최근 3년간 4500억원을 지원했다. 협력사 금융지원을 위해 3조4000억원 규모의 펀드도 조성해 운영하고 있다.
사법 리스크·지배구조 개편…산적한 과제
하지만 사법리스크는 이같은 이재용식 혁신 드라이브의 발목을 잡고 있다. 당장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의 공판기일이 오는 9일로 잡혀 있으며, 이어 내년 1월부터는 경영권 불법 승계와 관련한 재판도 본격화한다. 이 부회장은 재판에 대비하면서도 삼성의 도약을 위한 글로벌 경영 활동을 병행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이건희 회장 별세에 따른 상속과 지배구조 개편 문제 역시 이 부회장의 과제다.
이 부회장 중심 지배구조 체제가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높지만, 막대한 상속세 마련과 여당이 추진하는 보험업법 개정안(일명 삼성생명법) 등이 변수다. 이 법안의 핵심은 보험사가 보유한 주식을 취득원가가 아니라 시가로 평가하는 것인데, 법안이 통과되면 보험사의 타사 주식 보유 한도 규정에 따라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수십조원 어치를 팔아야 한다. 이에 따라 삼성그룹의 지배구조가 흔들릴 수도 있다.
재계 관계자는 CNB에 “사법 리스크에만 전념하기에는 글로벌 시장의 불확실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이 부회장과 삼성은 재판은 재판대로 대응하되, 경영혁신 또한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며 “조만간 (이 부회장이) 회장 지위를 달고 등기이사로 복귀해 명실상부한 총수로서의 입지와 역할을 다져 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