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포착한 사진전부터 거대한 설치작품 전시까지. 이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는 미술관이 아니다. 요즘 다양한 예술작품이 있는 곳은 백화점 등 쇼핑공간이다. 무심코 지나치는 매대 옆에도, 사람 몰리는 입구에도 이름난 작가들의 미술품들이 즐비하다. 유통기업들이 고객들의 체류시간을 늘린다는 복안으로 ‘예술’을 내세우면서 일어난 변화다. 갤러리로 변신한 쇼핑공간들을 CNB가 찾았다. (CNB=선명규 기자)
평범해서 특별한 사진전
책으로 둘러싸인 쇼핑몰
건물이 갤러리로 변하기도
‘스케이트보드 타는 청년들, 손잡고 산책하는 부부, 강변에서 한가로이 산책하는 사람들….’
이 사진들에서 특별함을 찾지 못했다면 제대로 본 것이다. 롯데백화점이 4개 점포(본점·잠실점·인천터미널점·부산본점)에서 열고 있는 사진전의 제목은 ‘보통의 여름’. 이름 그대로 익숙한 여느 여름날들의 장면이 포착돼 내걸렸다. 사진작가 정경자, 허유, 김뮤트와 지난해 백화점 측이 진행한 고객 사진 공모전 수상자인 윤현 씨가 ‘일상’을 주제로 한 작품을 선보인다.
따라서 별날 것 없이 평범하다. 그럼에도 각별함을 느꼈다면 그 또한 맞다.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공공장소에서 삼삼오오 바깥 공기를 만끽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보기 힘든 장면들이라, 아련하고 그립다. 이상할 것 없는 일상임에도, 그래서 계속 바라보게 된다.
다량의 작은 사진이 퍼즐처럼 모여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플립 아트’가 특히 재미있다. 몇 분 간격으로 톱니바퀴에 의해 여러 장의 사진이 도미노 쓰러지듯 넘어간다. 촤라락 소리가 나면 뭉게구름 핀 하늘이었다가 푸릇한 나무로 피사체가 전환되는 식. 건물 외벽에 콘텐츠 영상을 투사하는 방식의 ‘미디어 파사드’처럼 역동적이다.
전시 장소도 흔한 곳에 있다. 본점의 경우 지하 1층 입구 앞 코스모너지 광장이고 잠실점은 에비뉴엘과 쇼핑몰을 잇는 구름다리 가까이서 개최 중이다. 쇼핑과 작품 감상의 동선이 하나라 접근성이 용이하다. 그저 걷는 와중에 다양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자극적이지 않아서 보는 눈이 편하다. 양수연 롯데백화점 디자인실 VM전략팀장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지친 고객의 심신을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다음달 12일까지.
별마당 도서관에 솟아난 ‘빛의 도시’
높이 13미터 대형 서가와 책 7만여 권으로 둘러싸인 신세계 스타필드 코엑스몰 별마당 도서관 중앙에 영롱한 기둥들이 솟았다. 투명한 판으로 제작되어 천장의 창에서 내려오는 햇볕이 그대로 투사된다. 각각의 기둥 바닥엔 초록, 빨강 등의 조명이 설치되어 현란한 빛깔과 자연광이 그 안에서 뒤엉킨다. 작품 제목처럼 ‘빛의 도시’가 건설되는 찰나이다.
지난 2월 별마당 도서관 개관 3주년으로 진행한 ‘제2회 열린 아트 공모전’의 대상작이다. 지난달 말 설치된 이은숙, 성병권 작가의 이 작품은 높이가 9미터에 달해 아득하고 웅대하다.
기둥 사이에 난 길을 걸으면 이채로운 시각적, 청각적 경험을 할 수 있다. 발아래 설치된 다수의 스피커들에서 나오는 선율로 인해 시끌벅적한 광장의 소음이 차단되어 고립감마저 든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창을 통해 내려오는 빛이 투명판에 비춰 눈이 산란한다. ‘관람’이 ‘체험’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제한선이 없다. 다가가도 된다. 작품을 둘러싼 여러 개의 스툴에 ‘편히 앉으실 수 있습니다’란 문구가 붙었다. 거기에 앉아 근접거리에서 작품을 보면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다.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어차피 생각할 바에는 대범하게 생각하라” 등의 경구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보다’에서 ‘읽다’로 전시가 확장되는 순간이다.
임영록 신세계프라퍼티 대표이사는 “별마당 도서관은 앞으로도 고객들의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책임지는 열린 문화예술 공간으로서 발전을 거듭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구매도 좋지만 일단 머물러 주세요
쇼핑공간을 통째 미술관으로 바꾼 사례도 있다. 현대백화점이 지난해 말에 ‘아트 바이 더 현대(Art x The Hyundai)’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무역센터점 곳곳에 미술 작품을 내건 것이다. 복도 한복판, 엘리베이터 옆처럼 평범한 백화점 공간에 설치작품, 미디어 아트 등이 설치돼 갤러리를 방불케 했다.
당시 현대백화점 측은 이런 시도에 대해 “브랜드와 상품 경쟁만으로는 기존 백화점이나 다른 유통채널과 차별화하기 어렵다. 백화점을 콘텐츠 체험공간으로 변화시켜 방문객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자 전시회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유통기업들이 판매일선인 매장에 예술작품을 전면 배치하는 이유는 색다른 볼거리를 통해 방문객의 발길을 묶어두기 위해서다.
업계 한 관계자는 CNB에 “요즘 오프라인 매장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고객들이 오래 머물까이다. 재밌는걸 보면서 쇼핑도 할 수 있게 하려면 우선 재밌는 콘텐츠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예술 전시만큼 용이한 게 없다”고 말했다. 유통 플랫폼에 아트 플랫폼이 덧입혀지는 현상이 두드러진 이유다.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