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만 있으니 무기력하고 우울해지는 느낌이다. 불안감마저 든다”
코로나19에 일상이 정지됐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한국헬스커뮤니케이션 학회장) 연구팀이 한국 리서치에 의뢰해 설문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의 60% 가량이 ‘코로나19로 인해 일상생활이 정지된 것 같다’고 밝혔다. 주로 느끼는 감정은 불안(48.8%), 분노(21.6%), 충격(12.6%), 공포(11.6%), 슬픔(3.7%), 혐오(1.7%) 순이었다.
이는 직장문화에도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다. 재택근무가 확산되면서 불안감, 무기력감, 우울증 등을 호소하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CNB=도기천 기자)
풍경1 탄력근무, 코로나 보다 빠르게 확산
코로나 사태 초기 대기업·공기업을 중심으로 번졌던 재택근무는 이제 중견·중소기업들까지 참여하고 있다. 특히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2일 서울시와 함께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에 앞장서기로 약속하면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은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잠복기인 14일 동안 모든 모임과 행사를 최대한 자제하고 유연근무·재택근무를 최대한 활용하자는 것이다.
LG그룹은 임산부 직원과 초등학교 이하 자녀를 둔 직원에게, 삼성의 모든 계열사는 임산부 직원에게 재택근무를 허용했다.
SK그룹은 SK㈜, SK텔레콤, SK이노베이션, SK E&S, SK네트웍스, SK실트론 등 6개 계열사가 각사 사정에 맞춰 1~2주 동안 집에서 근무하도록 했다.
KT, LS그룹, 아모레퍼시픽, 포스코, 한화 등도 사업장별로 재택근무를 진행하고 있으며, 신한·KB국민·하나·우리은행 등 4대 금융사는 필수인력만 출근하고 있다.
특히 재택근무는 업종 특성상 위계질서가 약하고 창의력을 요하는 IT·게임업종에서 인기다. 넥슨, 넷마블, 엔씨소프트, 게임빌, 컴투스, 펄어비스 등 대표적 게임기업들은 길게는 2~3주간 재택근무를 실시하고 있다. 네이버·카카오 등 정보기술(IT) 기업도 전체 혹은 일부 직원을 대상으로 재택근무를 도입했다.
언론사 중에서는 주로 인터넷신문들이 재택을 실시하고 있다. 일간지·방송은 업무특성상 현장 속보를 전해야 하므로 탄력근무가 힘든 측면이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인터넷신문은 속보 보다 분석기사에 주력하므로 업무공간에 있어 자유로운 편이다. 본지(CNB뉴스)를 비롯해 한국인터넷신문협회 회원사 중 절반 이상이 부분 또는 전면적인 재택근무를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풍경2 ‘재택근무’ 아닌 그냥 ‘재택’도
확진자가 발생해 본의 아니게 잠시 회사 문을 닫은 곳들도 있다.
LS그룹은 확진자가 나온 서울 용산사옥을 폐쇄한 뒤 전직원이 1~2주간 재택근무에 돌입했다. SK텔레콤은 직원이 양성판정을 받자, 을지로 SK텔레콤 본사 T타워를 3일간 전면 폐쇄했다.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은 지난달 코로나19 확진 직원이 나와 사업장을 사흘간 일시 폐쇄한데 이어, 추가로 확진 직원이 발생하면서 다시 일부 폐쇄에 들어갔다. LG전자는 지난달 직원 자녀가 확진판정을 받은 인천사업장 연구동을 폐쇄했다가 방역작업을 마친 뒤 재개했다. 현대차 울산 2공장에서도 지난달 확진 직원이 발생해 한때 생산이 중단됐었다.
코로나19 탓에 사무실이 아닌 집에서 일하는 직장인의 숫자만 어림잡아 수십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에다 신천지 교회의 집단발병 사태로 수십명이 사망하고 5천명 넘는 확진자가 발생해 재택근무가 아닌 그냥 ‘재택’ 상태가 된 대구·경북의 수많은 직장인들까지 포함한다면 어림잡아 백만명 이상이 집안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 신종플루와 메르스 감염병 때도 없던 현상이다.
대구 최대 수제맥주전문 복합문화공간인 ‘몬스터즈크래프트비어’의 김시연 대표는 CNB에 “집에서 근무라도 할 수 있는 회사는 부러움의 대상”이라며 “생산·유통라인이 멈춰 선 상태라 직원들의 일거리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풍경3 과장·부장에겐 가택연금?
재택근무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는 직종과 성별, 생활환경에 따라 제각각이다.
평사원들은 일할 맛이 난다. 상사들의 시선이 사라졌고, 잔심부름도 없기 때문이다.
반면 중간간부들은 더 바빠졌다. 임원들로부터 내려오는 지시 때문에 한시도 모니터(메신저)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또 아래 직원들로부터 수시로 업무보고를 받고 지시해야 한다. 담배 피거나 커피 한잔할 틈도 여의치 않다.
상무·전무 등 임원들은 회의가 사라져 일은 줄었지만 불안감은 커졌다. 생산량이 줄고 영업활동이 중단 되다시피 한 상황이라 앞날에 대한 불안감에 마음이 편치 않다. 차라리 회사에 있으면 위기극복을 함께 다짐할 동료들이라도 있지만 지금은 고스란히 혼자서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한마디로 재택은 평사원에게 ‘안식’을, 과장·부장에게는 ‘가택연금’, 상무·전무에게는 ‘불안한 시간’이다.
하지만 평사원이라고해서 마냥 재택근무가 편한 것은 아니다. 일부 기업은 직원들에게 스마트폰으로 업무용 앱을 내려받게 한 뒤 위치를 추적하고 있다. 집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얘기다. 물론 사전에 위치정보 수집 동의를 받지만 직원 입장에선 마음이 좋을 리 없다. 또 일부 대기업은 직원들에게 강제로 연차를 전부 당겨쓰도록 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풍경4 사무실서 기침 소리만 들려도 긴장
정상적으로 출근하는 기업들도 분위기가 예전과 다르다. 회식은 물론 대면회의가 사라졌다. 사무실에서 기침 소리라도 들리면 모두 긴장한다.
출퇴근 풍경도 달라졌다. 대중교통 이용자가 줄고 자가용 출퇴근이 크게 늘었다. 사람이 붐비는 시간대를 피하기 위해 출퇴근 시간을 조정한 기업도 부지기수다.
코로나19는 점심 문화도 바꿔 놨다. 구내식당이나 회사 주변 식당가 등 사람이 붐비는 곳을 피하기 위해 도시락을 사오는 이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자신의 책상이나 휴게실 또는 회의실에서 식사를 한다. 이런 모습이 예전에는 옹색해 보였지만 지금은 ‘위생관리에 철저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코로나 사태 초기 때 매출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골목상권을 돕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 구내식당을 닫자’고 제안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옛날 얘기가 됐다.
이처럼 코로나19는 대한민국 직장인의 업무문화를 송두리째 바꿔놨다.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정부도 하지 못한 ‘저녁이 있는 삶’을 전염병이 안겨줬다”는 웃지못할 농담이 나온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