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간다. 때가 됐다. 먹는 시간이 다가온다. 자못 똑같이. 고관대작도, 장삼이사도, 옆집 아저씨도, 동네 꼬마도 피해갈 수 없다. 너나 할 것 없이 나이를 먹을 것이다. 불공평하고 예측 불가능한 인생에서 이처럼 자명한 순리는 없다. 그해 겨울, 처음 맞닥뜨리는 눈송이처럼 차별 없이 마주할 것이다.
매년 한해를 지나보내는 이맘때가 되면 다시금 들추는 책이 있다. 길지 않은 삶이나 아무래도 쌓이는 숫자가 버거워 그 무게를 덜어줄 경구 하나쯤 찾게 되는 연말. 이어령 전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디지로그>를 책장서 꺼내 ‘먹는다’는 한국적이고 복잡한 단어를 찾아 꼭꼭 씹는 심정으로 읽는다. 작년에도 인용했었지만 지금쯤에, 그리고 여전히 함께 읽으면 좋을 만한 문장들을 추려 옮겨 적는다.
“새해가 되면 떡국을 먹는다. 그리고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다. (중략) 음식이나 시간만이 아니다. 한국인은 마음도 먹는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무엇이든 먹을 수가 있다. 돈도 먹고 욕도 먹고 때로는 챔피언도 먹는다. (중략) 어디에서든 먹는다는 말은 다 통한다.”
재탕임을 뻔뻔히 고백하면서도, 힐난을 감수하면서도, 또 다시 언급한 이유는 배고픔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굶주림에 관해서. 달라진 게 없다. 보건복지부 조사를 보니 지난해 결식 위험지대에 놓인 아동과 청소년이 32만명에 이른다. 직전 해와 별반 다르지 않은 수치다. 뒤에 몇 자리 빼고 그대로다.
하나 더. 굶기진 않는데 조악하게 먹이는 방법이 진화하고 있어 혀를 내두르게 한다. 최근 충북 청주의 한 어린이집이 부실 급식 의혹 논란에 휩싸였는데, 그 배분 방식이 가히 놀랍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고구마 한 개로 원생 20명을, 두부 100g으로 123명을 먹였다. 얼마나 쪼개야 저걸 나눠 먹을 수 있을까, 기적의 미라클이다. 짐작도 어렵지만 하고 싶지도 않다.
허기(虛氣)를 소리 내어 읽으면 허탈한 입김이 입술을 스친다. 닿을 듯 말 듯 한데 한겨울 삭풍처럼 어느새 와락 와서 감긴다. 그 촉감은 차갑지 않다. 명치 아래서 솟구친 숨은 깊고도 뜨겁다.
나는 이 대목에서 문득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꼰대어’를 쓰고 싶어졌다. 얼마 전 갑자기 들이찬 갑갑증으로 오장육부가 뒤꼬인 적이 있었다. 신산한 생각이 몸을 장악해 물만 간신히 넘기기를 며칠. 이 무렵 위장에선 위잉하는 바람 소리가 파리하게 났다. 그것은 추레한 방을 활보하는 웃풍과도 같았다. 스산하도록 시렸다.
“내가 굶어봐서 아는데” 이거 생각보다 괴롭다. 겪어봤다면, 속이 비어 몸서리 쳐봤다면, 어른이라면, 적어도 아이들만큼은 마음먹고 먹여야한다. 중간은 없다. ‘먹다’라는 단어가 전복되면 ‘굶다’가 되어 치명적이다.
소설가 김훈은 시위현장에서 전경과 시위군중이 뒤엉켜 점심식사 하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라면을 끓이며 中>
이틀 전 눈다운 눈이, 그리하여 첫눈이라 할 만한 눈송이가 서울 하늘에 맺혔다. 경우에 따라 개별적이었겠으나 같은 땅에 내렸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새하얀 눈꽃처럼 뽀얗게 푸진 밥도 고르게 흩어져야 한다. 보편적으로.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