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한 터에 모여 공동체를 이루면, 공통된 삶의 방식이 싹을 틔운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이 2013년부터 매년 장소를 바꿔 여는 공공미술 활성화 프로젝트 apmap(에이피맵, amorepacific museum of art project)이 올해는 제주도에서 지난달 막을 올렸다. ‘제주 사람’을 주제로 작가와 건축가 15팀이 살아 숨 쉬는 섬의 면면을 재해석한 작품 15점을 내놨다. 수수께끼 같지만 제주 고유의 정서를 알고 다시 보면, 은유의 의문이 싹 풀리는 쾌감이 있다. 전시가 진행 중인 서귀포시 오설록 티뮤지엄을 지난 20일 찾았다. (CNB=선명규 기자)
참여 작가들, 직접 삶의 현장 취재
일상·자연·신화 등이 작품으로 탄생
오설록 티뮤지엄 안팎이 갤러리로
올여름, 염천을 견디느라 푸르게 질려버린 녹차밭을 배경으로 대형 모빌(mobile)이 설치됐다. 승용차 바퀴만한 철제 원 여섯 개가 층층이 쌓였고, 꼭대기엔 세 개의 작대가 매달려 나부낀다. 풍향에 따라 이리저리, 몸 둘 바를 모르는 듯이. 노해율 작가의 ‘제너럴 모빌-생활의 즐거움’은 말이 방아를 돌려 곡식을 도정하는 제주 마을에서 영감 받아 제작했다. 말방아의 운동원리를 바람에 회전하는 모빌로 구현한 것. 짐짓 의미 없어 보이는 움직임의 첫인상엔 의문부호가 붙지만, 작품 앞에 붙은 설명을 읽고 나면 순식간에 느낌표로 바뀐다.
이렇듯 올해 ‘apmap 2019 jeju’는 제주의 속사정을 숙지하고 관람해야 감상이 배가된다. 하지만 윤성호 작가의 ‘H-604’ 앞에선 괜한 오기가 돋아났다. 외지인의 눈으로 의미와 정답을 찾아보려 했다. 고르게 깎인 풀밭에 누운 네모지고 넓적한 물체 세 개 앞에서 골똘히 궁리했다. 파랑, 하양, 빨강으로 각기 다른 색깔이 힌트일 것이라며 ‘땅, 불, 바람, 아니 물, 마음….’ 짧은 추리를 끝내고 소개를 들여다봤다. 무덤 주위에 사각형의 돌담을 쌓아 말과 소의 침입과 화재를 막는 제주의 양식인 ‘산담’을 조형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란다. 작품 가운데에 있는 다각형의 조각은 별이 된 사람의 영혼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니, 역시 알고 봐야 감상이 깊어진다.
안내도 들고 ‘작품 찾기’ 나서볼까?
완상(玩賞)하기 전, 꼭 챙겨야할 것이 있다. 건물 내에 비치된 작품 위치 안내도다. 내부에 세 점, 야외 정원에 열두 점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자칫 놓치고 지나칠 수 있다. 주요 길목에 작가들의 이름을 새긴 이정표도 있으니 보물찾기 하듯, 작품을 찾아다니는 재미가 있다. 안팎이 모두 갤러리란 점을 염두에 두고 관람을 시작해야 한다.
출품작은 작가들의 면밀한 취재가 초석이 됐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총 15팀은 제주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결이 담긴 현장을 찾아 답사한 뒤 거기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도민들의 평범한 노동 흔적과 설화 같은 장대한 역사가 설치작에 적절히 녹아든 것에는 이들의 발품도 한 몫 했으리라.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구역은 야외 오른편이다. 체험형 작품들이 들어서 놀이공원을 방불케 한다. 특히 하얀 망으로 둘러싸인 트램펄린 앞에선 길게 줄선 어린이 관람객을 쉽게 볼 수 있었다. 6살부터 12살까지 들어가 뛸 수 있는 비유에스 건축의 ‘자리돔 방방’이다. 눈치 빠른 이라면 제목에서 짐작했을 것. 원형 틀에 그물을 엮어 돛에 고정하는 제주 특유의 자리돔 어획법을 표현한 작품이다. 안전 문제로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만 운영하는 이 ‘어망’ 안에서 물 만난 아이들은 활어처럼 팔딱였다.
최정우 작가의 ‘편견없이 이야기 듣는 장치’ 앞에선 고성이 오갔다. 얼기설기 늘어진 기다란 관의 양끝에 서서 서로를 찾는 목소리가 높았다. 한쪽 구멍에 대고 말을 하면 파이프를 탄 음성이 반대편으로 전해지는 단순한 원리. 한쪽에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자 “아빠, 잘 들려요!”라며 대답하는 아이의 목청이 한라산처럼 우람했다. 달뜬 어투에는 ‘5G’가 줄 수 없는 아날로그적 감동마저 묻어있었다.
주민들 “우리 이야기”
제주의 사람을 그리는 전시에 대한 도민 반응은 어떨까. 가족 부양의 책임을 떠안고 바다에 뛰어드는 해녀를 다룬 한광우의 ‘무거운 하늘의 색 기둥들’ 앞에서 이선경씨(한림읍)는 “생전에 물질을 하셨던 어머니가 얼마나 고되고 외로웠을지 짐작도 어렵다”며 눈가를 훔쳤다. 망사리(제주 해녀가 쓰는 그물)처럼 가깝게 얽힌 주변인의 이야기에 더 크게 감응한 것이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관계자는 CNB에 “관람객들은 작가의 독특한 조형 언어로 표현된 제주 사람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예술을 통한 쉼과 사색의 순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다음달 22일까지.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