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과 정부, 주류기업들 간의 셈법이 첨예하게 엇갈리면서 6개월간 미뤄져온 주세법 개정안이 발표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다시 표류하고 있다. 기재부는 세금 기준을 기존 ‘종가세’ 대신 ‘종량세’로 바꾸자는 큰 틀을 정한 가운데 소비자 물가에 미칠 영향을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주류업계 간의 이해관계가 제각각이라 최종안이 마련되더라도 국회를 통과하기까지는 험로가 예상된다. (CNB=도기천 기자)
맥주·소주 주종별 셈법 달라
1년여 논쟁에도 결론 못내려
국회 통과까지는 ‘산 넘어 산’
지난해 주세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권성동(자유한국당) 의원실 관계자는 7일 CNB에 “기획재정부가 지난달까지 (세법 개정에 관한) 용역결과를 내놓기로 했으나 사안이 복잡해 시일이 지체되고 있다“며 ”정치적 쟁점과 상관없는 민생법안이라 국회가 문을 열면 곧바로 논의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기재부 관계자는 “주종 간, 또는 동일 주종 내에서 종량세 전환에 업계별로 일부 이견이 있어, 개편안 발표 시기가 다소 지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주세 개혁이 늦춰지고 있는 데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선 논란의 시작은 수입맥주 시장이 확대되면서부터다.
한국기업평가의 작년 11월 주류산업 보고서에 따르면, 국산맥주의 시장점유율은 2010년 97.2%에서 2017년 85%로 줄어든 반면, 같은 기간 수입맥주는 꾸준히 늘어 2.8%에서 15%로 증가했다. 향후 5년 내 40%까지 자리를 내어줄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맥주 수입액은 매년 사상 최대 기록을 갱신중인 반면 하이트진로와 롯데주류 등 국내 맥주업체의 공장 가동률은 30%대를 겨우 유지하고 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국내 기업들이 수입맥주와의 세금형평성 문제를 지적하면서 논란이 확산됐다.
현재 우리나라의 맥주 과세체계는 가격을 기준으로 세금을 매기는 종가세 방식이다. 국산맥주는 국내 제조원가에 국내의 이윤·판매관리비를 더한 출고가를 기준으로, 수입맥주는 관세를 포함한 수입신고가격을 기준으로 과세하고 있다.
문제는 수입맥주의 경우 국산맥주에 포함된 이윤이나 판매관리비 등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세금이 적게 매겨진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부상한 것이 ‘종량세’다. 종량세는 알코올 함량이나 술의 부피·용량을 기준으로 과세하는 것으로 선진국 대부분이 채택하고 있는 과세체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우리처럼 종가세 방식으로 과세하는 국가는 칠레·멕시코 뿐이다.
2라운드 접어든 ‘종량세’
종량세의 도입 취지 자체에는 주류업계와 정부, 정치권이 대체로 공감하고 있다.
권성동 의원은 작년 11월 수입맥주에 유리한 과세체계를 바로잡기 위해 맥주의 과세표준을 주류 제조장 출고·수입신고 수량으로 전환하는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경대수, 박명재, 여상규, 이종명, 정갑윤 등 10명의 의원이 공동발의에 참여했다.
당시 권 의원은 “현행 종가세에서 우리 맥주기업들이 맥주 다양화·고급화를 위해 투자할 경우, 그 비용만큼 세금이 늘어나게 돼 경쟁력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오비맥주, 하이트진로, 롯데주류 등 3개 회사 대표가 맥주를 종량세로 바꾸면 놀고 있는 생산라인을 재가동 하겠다고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권성동표 개정안’은 종량세를 일괄 도입할 경우, 맥주와 다른 주종과의 과세형평성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반발에 부딪혔다. 박영선(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맥주만 특혜를 받게 된다는 이유로, 경북 안동이 지역구인 김광림(자유한국당) 의원은 전통주(안동소주 등)의 세금이 오를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실제 종량세로 개편시 소주 등 도수가 높은 술은 세금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업계에 따르면 소주의 출고가는 지금보다 약500원 가량 상승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소비자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소주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소주만 따로 다른 세율을 적용하는 건 증류주에 일괄과세를 원칙으로 하는 WTO 협정에 위배된다
논란이 커지자 작년말 기획재정부는 2019년 3월까지 연구용역 및 업계 협의를 거친 개편안을 내놓기로 했고, 국회는 개정안 상정을 용역결과가 나온 뒤로 미루기로 했다.
이처럼 상황이 복잡해지자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일 “주종별로 의견 수렴되는 것에 따라 단계별로 갈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는 가격인하 요인이 큰 맥주부터 종량세를 시행하고 단계적으로 다른 주종에 도입하는 안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일률과세를 원칙으로 하되, 소주 과세는 순서를 뒤로 미뤄 반발을 최소화하겠다는 고육지책으로 읽힌다.
맥주사들 묘한 ‘온도차’
국내 맥주업계는 종량세 도입을 바라면서도 기업별로는 미세한 온도차가 있다.
수입맥주를 취급하지 않는 수제맥주 업계는 가장 강하게 종량제 도입을 촉구하고 있다. 대구 최대 수제맥주전문 복합문화공간인 ‘몬스터즈크래프트비어’의 김시연 대표는 CNB에 “현재의 과세 체계에서는 맥주 개발·생산에 들어가는 비용의 비율만큼 세금이 부과되는 구조라서 수입맥주와의 가격경쟁에서 뒤질 수밖에 없다”며 “이대로라면 국내 수제맥주는 다양한 맛과 향으로 밀려들고 있는 수입맥주에게 시장을 내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이트진로와 롯데주류는 일단 ‘맥주’에 있어선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하이트진로는 맥스(2006년), S(2007년), 드라이d(2010년), 퀸즈에일(2013년), 이슬톡톡(2016년), 망고링고(2016년), 필라이트(2017년) 등 매년 새로운 국산브랜드를 내놓고 있다. 올해는 신제품 ‘테라’로 승부수를 띄웠다.
롯데주류는 일부 외국맥주를 수입하고 있지만 주력은 국산맥주 ‘클라우드’다.
다만 두 회사는 각각 ‘처음처럼’(롯데주류)과 ‘참이슬’(하이트진로) 등 소주를 생산하고 있어, 알코올 도수 등에 의해 세금이 부과되는 종량세가 ‘양날의 검’처럼 작용하는 측면도 있다.
세계 1위 맥주기업인 안호이저-부시 인베브(AB인베브)가 100% 지분을 갖고 있는 오비(OB)맥주는 셈법이 더 복잡하다. 시장점유율 50% 이상으로 독보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오비의 대표브랜드 ‘카스(CASS)’만 보면 종량세가 유리하지만, AB인베브를 통해 수입하고 있는 외국맥주도 많아 고민이다.
오비맥주는 영국 에일맥주 ‘바스’, 독일 밀맥주 ‘프란치스카너’, 미국 라거맥주 ‘버드와이저’, 룩셈부르크 ‘모젤’, 벨기에 ‘호가든’과 ‘스텔라’, 맥시코 ‘코로나’. 일본 ‘산토리 프리미엄’, 중국 ‘하얼빈’ 등 20여 종의 수입맥주를 국내에 보급하고 있다.
오비 측은 종량세에 대비해 일부 인기 수입맥주들을 전량 국내에서 생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맥주업계 한 관계자는 CNB에 “종량세가 대체로 유리한건 맞지만 기업마다 온도 차이는 있어 한목소리를 내기 힘든 상황”이라며 “어떤 식으로든 (세금 문제가) 결론이 나야 장기 전략을 수립할 수 있는데, 현재는 어정쩡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