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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날다람쥐의 고행과 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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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선명규기자 |  2019.02.18 15:10:32

사진=픽사베이

 

밖에 들고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만 몰래 읽는 책이 있다. 적발되면 고초를 겪어야하는 불온서적이나 금서(禁書)는 아니다. 꼭꼭 숨겨두고 은밀히 탐독해야 하는 책을 쓴 이는 일본의 마스마 미리. 수식어가 많다.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에세이스트. 특이점은 30대 독신 여성의 일상을 솔직하고 촉촉한 언어로 쓴 ‘수짱 시리즈’로 또래 독자들의 맹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 결혼관의 차이, 직장 내 갈등 등 누구나 할법한 고민을 무구하게 풀어내 한국에도 두터운 여성 팬층이 있다.

그렇다. 봄날 같은 그녀의 시리즈에는 죄가 없다. 잘못은 2030과 3040 어디에 묶여도 이상하지 않을 시커먼 남성 독자가 개방된 장소에서 읽는 가운데 생긴다. 투박한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며 바다 건너 여자들의 사생활을 키득거리며 들여다보는 그 모습, 과연 봐줄만한 광경은 아닌 것이다. (심지어 표지 일러스트도 알록달록 탐스러워 매우 눈에 띈다.) 침엽수 눈부시던 날이었던가. 무심코 카페에서 펼쳐들었다가 나무 밑에 떨어진 송충이 보는듯한 눈빛을 사방에서 받은 적 있다. “취향입니다. 존중해시죠!”라는 말이 분연히 탱천했다가 목구멍 근처도 못 와 부스스 사그라졌고, 이내 꿈틀거리는 손놀림으로 책을 가방에 넣었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절대다수의 여성독자 틈바구니에서 작은 점에 불과한 남성독자가 수모를 무릅쓰고 그녀의 책을 꺼내 드는 이유는 성별을 불문하고 자문자답에서 발견되는 메시지와 공감의 힘이 있어서다. 나의 고충이 너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위안 같은 것. 예컨대 2030 세대는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에서 ‘이대로’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사회란 망망대해에 뛰어들었지만, 아직 순풍을 타지 못한 애매한 나이인 서른 중반의 수짱은 흔들린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도 싫지만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고민 끝에 나를 알아가는 여정의 수단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하루에 대한 기록의 행위는, 남을 관찰하다가 시선을 반대로 돌려 나를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 그런 나날이 쌓여 마침내 명치 아래로부터 나오는 음성을 듣는다. ‘나라서 좋다고.’

최근 비슷한 시기에 일본과 한국에서 실시된 조사에서 일치하는 결과가 나와 흥미롭다. 양국 미혼자 10명 중 7명은 ‘결혼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2012년에 출간된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는 미혼이나 비혼을 무작정 비호하는 책은 아니다. 수짱이 또래 3040 싱글들에게 결혼하지 않은 나의 삶도 이어진다고 전하는 일종의 격려담이다.

책장에 그녀의 책 여러 권이 꽂혀 있지만 가장 자주 꺼내드는 것은 <주말엔 숲으로>.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 시골로 떠나 슬로라이프를 만끽하고 있는 하야카와에게 도시 친구 세스코가 찾아와 별안간 세속적인 욕심을 드러낸다. “매일 놀면”서도, 백화점을 쏘다니며 “날다람쥐처럼 깡충깡충 날아다니면서 쇼핑을 하는” 소비지향적 라이프를 이야기한다. 그 말을 들은 하야카와는 답한다. “날다람쥐라고 날기만 하는 것은 아니야. 날다람쥐는 위에서 아래를 향해 날지만 아래에서 위로는 날지 못해. 아래로 내려오면 다시 나무를 오르지 않으면 안 돼.” 비상하는 화려한 장면 연출을 위해 뚜벅뚜벅 걸어 온 고행(苦行)의 과정을 헤아리라는 일갈이다.

주말, 시골에서의 짧고도 달콤한 일탈을 끝낸 뒤 복잡한 도시라이프로 돌아가야 하는 세스코는 읊조린다. “내일부터는 다시 출근이군.” 맥빠진 그녀에게 하야카와는 힘줘 말한다. “날다람쥐여 오르라! 다시 하늘을 날기 위해!”

1년의 완주가 나무를 오르는 것과 같다면 이제 겨우 밑동까지 왔을 뿐이다. 날다람쥐처럼 묵묵하지만, 사뿐사뿐 올라 장쾌하게 날아오르는 한 해 되시기를.

(CNB=선명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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