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본 대로 믿고, 그리고 해석한다. 아직 클라이맥스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결말을 속단하기까지 한다. 문제는 스스로 내린 조바심 같은 결론을 동네방네 소문내는 데서 발생한다. 이 속성을 그대로 따르며 물색없이 떠들다가 개망신을 면치 못한 적이 있다.
미국 현대화가 앤드루 와이어스가 그린 <크리스티나의 세계>의 첫 인상은 지극히 따듯했다. 하늘거리는 쉬폰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풀밭에 포개듯 가볍게 앉아 있다. 등 돌린 그녀는 얇은 옷감처럼 가녀린 팔로 땅을 더듬고 있다. 질끈 묶은 머리 사이에서 삐져나온 머리칼 몇 가닥이 흩날린다. 우러렀던 풀들은 기분 좋게 살랑이는 바람을 맞아 비뚜름해졌다. 그녀가 바라보는 곳은 언덕 위에 지어진 고졸한 집. 그 안에선 소녀를 위한 성찬이 무르익고 있을 것이다.
평안, 가족애 따위의 단어들로 뭉뚱그린 감상을 후배에게 그대로 들려줬다. “저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잔뜩 받았을 거야. 늦은 오후면 어김없이 들판으로 나와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겠지. 탐스럽게 그을린 피부가 증명하듯이 꽤 오래 그래왔을 거야. 딸이 평온에 머물러 있는 동안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식사를 차릴 거란 걸 알고 있을 거야. 이제 막 돌아가려던 참이겠지. 봐, 석양에 풀색도 붉게 변해가고 있잖아.” 그림이 주는 따사로운 정취에 젖어 멋대로 한참을 떠들어댔다.
개코같은 망상이 터지고 수치심이 밀려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 그림의 진짜 해석을 알고 나자 오싹한 자괴감이 등줄기에 흘렀다.
저 아이, 아니 그림 속 크리스티나는 실제 나이 든 여인이며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가 불편하다고 한다. 들판에 사뿐히 기댄 게 아니라 온전히 걸을 수 없어 땅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집까지 남은 거리는 아직도 한참. 그 막막함에 무너질 듯 앉아 있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이웃인 그녀가 밭일을 마치고 힘겹게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포착하고 이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아뿔싸, 큰일이다. 하나도 맞은 게 없다. ‘감상의 차이가 예술의 본질이지’라며 너스레떨자니 마뜩잖고, ‘내 해석도 그럴싸하지?’라며 눙치자니 어쩐지 애처롭다. 도무지 빠져나갈 구석이 없다. 실상을 알게 된 후 후배에게 어떻게 해명해야 하나 고민하다, 우쭐대며 감상을 늘어놓던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아 몇 번이고 이불을 걷어차야 하는 밤을 보냈다.
눈과 귀를 속이는 ‘악마의 편집’도 사악하지만, 섣불리 내린 판단을 진리인양 퍼트리는 게 더 큰 문제다. 본인이 시리도록 부끄러워지거나 거짓 정보의 피해자가 일파만파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후배가 내말을 똑같이 옮기다 망신을 당했다면 나를 평생의 원수로 여길 터다.
일부 장면만을 보고 판결을 내리고, 우르르 몰려가 욕하거나 치켜세우는 현상은 한국 사회에서 하루이틀일이 아니다. 무엇을 믿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취사선택한 감흥을 어느 시점에 유포할 수 있는가. 적어도 퍼트리려면, 지독한 사실검증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게 개망신을 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 글을 두들기다 애써 잊었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고야 말았다. 수치의 유효기간이 생각보다 긴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말을 끝까지 들은 후배가 조용히 엷은 미소를 흘렸던 것 같다. 녀석은 알고 있었던 걸까? 오늘밤에도 이불이 성하긴 글렀다.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