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이 추석 전 협력사들에게 대금을 미리 지급하고 나섰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 기조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지난 17일 서울 농협하나로마트 양재점에 차려진 추석 차례상 앞에서 어린이들이 절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추석을 앞두고 대기업 상당수가 협력사에 납품대금을 조기 지급키로 해 주목된다. 기업들은 예전부터 지속해온 ‘상생’ 정책의 일환이라며 몸을 낮추고 있지만, 최근 명절 조기대금 지급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은 ‘사람중심 경제’를 강조하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 기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CNB가 내막을 들여다봤다. (CNB=손강훈 기자)
대기업들, 추석 전 대금지급 ‘봇물’
5조원 시중에…협력사 모처럼 온기
“정부 ‘눈치보기’ 아니냐” 시선도
재계가 추석 전까지 5조원에 달하는 자금을 풀었다.
삼성그룹은 삼성전자를 포함한 삼성디스플레이, 삼성전기, 삼성SDI, 삼성물산, 삼성SDS, 삼성바이오로직스, 삼성엔지니어링, 제일기획, 삼성웰스토리 등 10개 계열사가 약 1조원 규모의 물품대금을 미리 지급한다. 대상 협력업체는 2000여곳에 달한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선 지급 규모가 가장 크다. 현대·기아차와 현대모비스, 현대제철, 현대건설 등 주요 계열사 5곳이 참가하며 협력사 4000여곳을 대상으로 1조2350억원을 조기지급한다.
LG그룹 역시 1조원이 넘는 1조1500억원 규모의 금액이 선 지급된다. LG전자, LG화학 등 9개 계열사들을 통해 이뤄진다. LG는 1차 협력사가 2, 3차 협력사에도 대금을 미리 주도록 안내문 등을 통해 권고했다.
롯데그룹과 CJ그룹은 각각 7000억원, 5000억원 규모를 자금을, HDC현대산업개발과 현대백화점그룹, 신세계, 포스코, 한화, 아모레퍼시픽, GS 등도 연휴 전 납품대금을 미리 치른다.
반면 SK그룹은 별도의 조기지급 계획이 없다. 이미 협력사에 비용을 즉시 지급하는 시스템을 구축했기 때문에 굳이 연휴에 맞춰 미리 줄 필요가 없다는 설명이다.
재계는 이 같은 행보를 “명절 전 중소협력사들의 자금 부담 완화를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
유류비와 농·축·수산물 등 물가가 오르고, 추석 상여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중소기업이 작년보다 늘어나는 등 체감경기가 악화된 상황에서 내수 경기 활성화에 도움이 되고자 자금을 풀었다는 얘기다.
이런 점을 고려해 삼성과 LG는 협력사 조기지급 뿐 아니라 계열사 사업장에서 지역농산물 직거래 장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현대차는 온누리상품권(전통시장에사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 369억원 어치를 구입해 전 그룹사 임직원에게 나눠주는 등 중소지역상인 지원에도 나서고 있다.
▲최근 협력사를 대상으로 한 자금지원 펀드 조성, 맞춤형컨설팅 프로그램 시행 등 다양한 지원방안이 실시되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청주지역 협력사 직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도전 안전 골든벨' 행사 모습. (사진=SK하이닉스)
‘소득주도 성장’ 발맞춘 행보?
이를 현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에 부응하기 행동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과거 ‘수출 대기업 지원 중심’에서 ‘사람 중심의 소득주도 성장’으로 경제 전략을 전환한 상태다. ‘정부→대기업→중소·벤처’ 순으로 내려가는 수직적 구조의 산업 생태계를 ‘사람(노동자)’을 중심에 두는 쪽으로 재편하고 있다. 일자리 안정 등 삶을 질을 높여 경제를 선순환 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양질의 일자리 창출, 고용안정, 최저임금제 보장, 본사의 횡포로부터 가맹점 보호, 대기업과 골목상권 상생 등을 국정운영의 우선 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이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10년간 유지된 노동시장 유연화 기조를 전면 수정하겠다는 의미기도 하다.
한마디로 지난 정부에서 대기업들에게 법인세 인하 등 많은 혜택이 돌아간 만큼, 지금부터는 성장의 열매를 중소기업, 자영업자들이 나눠 갖도록 하겠다는 얘기다.
실제 작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삼성, 현대차, SK, LG, 한화, 신세계 등 대기업은 333조원, 19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고용투자 계획을 발표하며 정부 정책 기조에 발맞추는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기업들은 앞 다퉈 협력사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지난 8월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방안을 발표하며 협력사에 4조원을 투입하겠다고 한 삼성은 최근 1~2차 협력사 중심으로 운영해온 협력사 지원 프로그램을 3차 협력사까지 확대하기 위해 총 7000억원 규모의 3차 협력사 전용펀드를 추가로 조성할 계획을 발표했다.
현대차와 SK, LG, 롯데 등도 마찬가지다. 협력사 자금 지원을 위한 상생펀드 조성과 맞춤형컨설팅 프로그램 시행 등 다양한 방안을 진행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번 추석에 협력사 대금 조기지급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재계는 이런 해석이 부담스럽다는 입장이다. 상생 노력이 정부 눈치를 본다는 식으로 희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CNB에 “명절 협력사 대금 선 지급은 정부 정책기조의 상관없이 예전부터 해왔던 것”이라며 “물론 문재인 정부 들어 협력사 지원 등에 더욱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CNB=손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