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초로 예정된 신동빈 회장의 2심 선고를 앞두고 롯데그룹의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앞서 법원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항소심 선고에서 롯데와 관련된 제3자 뇌물수수 혐의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신 회장 재판에 먹구름이 드리웠기 때문. 총수 부재 상황이 7개월째 계속된 탓에 해외 진출과 신규사업 등 각종 투자는 이미 올스톱 된 상태다. 롯데의 운명은 어찌될까. (CNB=도기천 기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지난달 29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결심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총수 부재 7개월, 위기감 ‘최고조’
인수합병·신규투자 전면 ‘올스톱’
박근혜 재판마저 신 회장에 불리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7개월 가까이 구속 수감돼 있으면서 재계 서열 5위인 롯데의 투자와 지배구조 개편 작업이 사실상 중단됐다.
롯데는 작년 10월 유통·식품 부문 42개 계열사를 편입한 롯데지주를 창립해 ‘뉴롯데’를 출범시켰다. 이후 롯데지주에 주요 계열사들을 합병하는 형태로 한때 수만 개에 달했던 순환출자 고리를 모두 해소했다.
올해 초 단행된 정기임원인사를 통해 차세대 최고경영자(CEO) 후보군이라 할 수 있는 신규 임원을 100명 넘게 발탁하고, 50대 CEO를 주요 계열사에 전진 배치하는 등 인적쇄신도 이뤄냈다.
하지만 신 회장이 국정농단 재판에 연루돼 지난 2월 1심에서 뇌물공여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 되면서 ‘뉴롯데 플랜’에 제동이 걸린 상태다.
완전한 지주사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는 편입 계열사를 확대하고 롯데손해보험, 롯데카드 등 금융 계열사들의 지분을 2년 내 정리해야 하는 제도적 문제가 남아있지만, 아직 첫발조차 떼지 못하고 있다.
한국 롯데의 중간지주회사 격이자 일본 롯데와의 연결고리인 호텔롯데의 기업공개(IPO)도 요원한 상태다. 애초 롯데그룹은 일본롯데홀딩스가 99%의 지분을 가진 호텔롯데를 상장해 국내 일반주주의 지분율을 높여 ‘일본 기업’이라는 오해를 불식시키고 경영 투명성을 강화할 계획이었지만, 지금은 이 사안이 쑥 들어갔다.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건물에 게양된 롯데 사기. (사진=연합뉴스)
4조원 해외건설 첫삽도 못 떠
투자와 고용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롯데는 지난해까지만해도 해외사업과 국내외 인수합병(M&A) 등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며 덩치를 키워왔다. 최근 10년간 롯데그룹의 투자액을 보면 2009년 5조1천억원에서 2016년 10조4천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지난해에는 7조원 안팎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올해는 국내외에서 10여 건, 총 11조원 규모의 M&A를 검토했지만 모두 결정을 못 내려 포기하거나 연기하면서 한 건도 진행하지 못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투자액이 약4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인도네시아 유화단지 건설 사업이다. 롯데케미칼은 지난해 인도네시아 국영 철강회사의 소유 부지 50만㎡를 매입하는 등 사업에 속도를 냈었다.
하지만 신 회장 부재로 최종 투자 의사 결정이 늦어지면서 착공이 지연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다음달 5일로 예정된 항소심 선고에서 신 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나지 못할 경우, 사업 자체가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앞서 롯데는 지난 2016년 비자금 조성 의혹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미국 화학업체 액시올 사(社) 인수를 포기하면서 투자 기회를 놓친 뼈아픈 경험이 있다. 이후 액시올은 미국 웨스트레이크 사에 인수 합병됐고, 웨스트레이크는 액시올과의 합병 후 2년 만에 액시올 주가가 두 배로 뛰는 등 기업가치가 급등했다.
롯데 관계자는 CNB에 “그동안 롯데의 성장 동력이던 인수·합병(M&A)과 대규모 투자 등이 최종 의사결정권자의 부재로 지연되고 있다”며 “특히 전략적 판단이 요구되는 해외 진출이나 신규사업에 어려움이 크다”고 말했다.
신 회장은 구속 직전까지 1년의 절반 이상은 해외에서 보낼 정도로 해외 사업에 그룹의 미래를 걸었다. 현지 정·재계 인사들과의 네트워크 형성이나 정보 교류에도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점에서 신 회장의 부재는 글로벌 사업에 대해 신속하고 전략적인 접근이 힘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신동빈 회장과 함께 경영비리 사건으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는 롯데가(家) 오너들. (왼쪽부터)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사진=CNB포토뱅크, 연합뉴스)
‘경영권 분쟁’ 재발 가능성
최근 10년간 한 해 평균 1만5천명에 이르던 고용규모도 크게 위축됐다. 롯데가 그동안 다른 기업에 비해 채용인원이 많았던 것은 유통업계 1위인 롯데쇼핑의 영향이 컸다. 롯데쇼핑에는 백화점, 아울렛, 대형마트, 복합몰, 슈퍼마켓 등 인력을 창출하기 용이한 다양한 유통 사업군이 형성돼 있다.
하지만 롯데쇼핑의 올해 상반기 매출은 8조7963억원으로 2016년 같은 기간 14조9650억원에 비해 절반 가까이 줄었으며, 영업이익도 3790억원에서 2000억대로 추락했다.
롯데쇼핑은 당분간 백화점과 마트를 신규 출점할 계획이 없다. 백화점은 지난해부터 이미 새 점포를 내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는 사드보복으로 롯데마트를 철수한 가운데 백화점 일부 점포를 철수하는 방안을 검토 중 있다. 이렇다보니 그룹 차원의 신입공채 외에 개별 사업장의 신규인력 충원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도쿄(東京) 신주쿠(新宿)에 있는 일본 롯데그룹 본사 건물. (사진=연합뉴스)
롯데의 이런 상황은 다른 대기업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더 위축돼 보인다. 주요 대기업들은 문재인 정부의 경기부양 정책에 부응해 최근 잇따라 대규모 투자·고용 계획을 내놓고 있다.
포스코가 지난 3일 2023년까지 45조원을 투자하고 2만명을 고용한다고 밝힌 것을 비롯해, 지난달에는 삼성(180조·4만명/3년), 한화(22조·3만5000명/5년), GS(20조·2만1000명/5년)가 매머드급 플랜을 내놨다. 앞서 현대차(23조·4만5000명/5년), SK(80조·2만8000명/3년), LG(19조·1만명/1년), 신세계(9조·3만명/3년)도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이를 다 합치면 398조원에 달한다. 올해 정부 예산 428조원과 맞먹는 천문학적 금액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 회장이 재판 중인 틈을 타 그의 형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이 호시탐탐 경영권을 노리고 있는 점도 롯데를 긴장시키고 있다.
롯데는 ‘오너일가-광윤사-일본롯데홀딩스-호텔롯데-한국롯데지주’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 광윤사의 대주주인 신 전 부회장은 일본롯데홀딩스 정기주주총회에 무려 다섯 번이나 신 회장 해임안을 상정한 바 있다. 신 회장은 주총 표 대결에서 모두 승리하며 경영권을 지켜냈다.
하지만 안심할 순 없는 상황이다. 일본 주주들이 신 회장을 신뢰하고 있지만, 부재 중 상황이 계속된다면 앞날을 장담하기 힘들다. 최악의 경우 해임안이 다시 상정돼 가결된다면 한국롯데와 일본롯데가 50여년 간 이어온 협업과 공조 관계에 금이 갈 수도 있다.
“일할 기회 달라” 재판부에 읍소
따라서 신 회장의 2심 선고는 롯데의 운명을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신 회장은 박 전 대통령과 ‘경제공동체’인 최순실씨가 소유한 K스포츠재단에 체육시설 건립비 명목으로 70억원을 추가 지원했다가 제3자 뇌물공여 혐의로 기소됐다.
법조계에서는 박 전 대통령이 항소심에서 롯데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으로 판결 받은 만큼, 쌍벌제인 뇌물죄의 특성상 신 회장 또한 유죄가 인정될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1월 평창동계올림픽 성화주자로 나선 신동빈 회장이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일원에서 성화봉송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다만 롯데 측은 실형(구속수감) 만은 면하게 해달라는 입장이다. 롯데가 처한 위기상황을 재판부가 고려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신 회장 또한 공판 때마다 “국가경제와 우리 그룹을 위해 다시 한번 일할 기회를 달라”고 선처를 호소해 왔다. 지난달 29일 항소심 결심공판 최후진술에서는 “가족 중심의 기업이 아닌 진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룹의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 왔다”고 밝혔다.
한편 신 회장은 구치소 생활에서도 평소처럼 소탈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어떤 특별대우도 없이 일반 수감자와 똑같이 생활하고 있으며, 변호사단 등 면회객이 접견을 오면 항상 직접 일어나 맞아준다고 한다. 7~8월 폭염 탓에 체중이 구속 전보다 10㎏ 가량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신 회장은 회사에서도 재벌 2세 답지 않은 행보로 유명하다. ‘남 밑에서 월급을 받아봐야 사회를 배운다’는 부친 신격호 명예회장의 지론에 따라 대학 졸업 후 롯데그룹에 입사하지 않고 노무라증권에서 7년간 평사원으로 근무했다.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식사하고, 해외 출장도 보좌하는 직원 없이 혼자 다니며 항상 가방과 소지품을 직접 들고 다닌다고 한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