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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보도를 차-오토바이가 점령한 한국과, 차도를 사람-자전거가 점령한 영국-네덜란드 중 어디서 살래?

신간 '보도블록은 죄가 없다'를 읽으니 새삼 돋는 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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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최영태 발행인기자 |  2018.08.28 16:37:33

최영태 발행인

‘보도블록은 죄가 없다’라는 책을 읽다가 쌓인 울분이 확 올라온다. 그동안 한국의 보도에서, 또 횡단보도에서 차들에게 당한 쌓인 감정의 분출이다. 

 

보도나 횡단보도는 분명 걸으라고 만들어 놓은 공간이다. 그런데 해외 선진국의 보도나 횡단보도에서는 거의 하지도 않아도 되는 조심을, 한국에서는 상시적으로 해야 한다. 차도와 보도를 수륙양용차처럼 넘나드는 오토바이의 횡포, 그리고 분명 횡단보도라고 흰 줄이 그어져 있어서 걸어 들어가려고 하면, 차 운전자들이 마치 침범이라도 당한 듯 화난 표정으로 더 속도를 올리면서 휭하고 먼저 지나가거나, 또는 심할 경우 “왜 차가 지나가는데 감히 인간 주제에 끼어드느냐”고 소리를 지르는 듯 빵빵거리기까지 하니, 수모에서 더 나아가 병원 신세까지 지지 않으려면 항상 사방경계를 확실하게 해야 하는 게 한국 도로에서의 제1 원칙이다.

 

그러려니 하고 살아왔다. 아무리 불평해봐야 오토바이는 한국에서 도로-인도 양용으로 허가를 받는 듯하고(인도를 마구 달려도 단속하는 경찰을 본 적이 없으니), 버스나 배달 오토바이는 빨간 신호등은 남의 일이라는 듯 무시하고 달리니, 내가 조심해야 한다면 살아왔다.

 
그런데, 최근 발간된 ‘보도블록은 죄가 없다’(저자는 서울기술연구원의 박대근 박사)를 읽다가 일본의 경우를 들으니 또 불현듯 화가 치민다.

 
책의 다음 내용을 한 번 들어보시라. 박 박사가 보도블록 관련 선진 행정을 배우기 위해 2012년 일본 도쿄도청(都廳), 요코하마 시청 등을 방문했을 때 벌어진 ‘우문현답’의 현장이 너무나 웃프서다(책 56쪽).

 
박 박사 일행은 ‘보도블록을 제대로 시공하지 않은 업체들에 어떤 불이익을 주는가?’라고 우선 물었단다. 제대로 시공 않는 업체가 많은 서울의 공무원들이기에 ‘당연히’ 물어야 하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일본 측 공무원들은 잠시 말귀를 못 알아먹었단다. ‘보도블록을 제대로 시공하지 않는다’는 게 도대체 뭔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해서란다.

 

비유하자면, 존댓말이라는 개념이 없는 서구인들에게 “언제 존댓말을 쓰나요?”라고 물으면, 상대방이 알아먹지 못해 “What?”이라는 반문이 나오거나, 아니면 ‘이건 뭐지?'하면서 잠시 명상에 잠기게 된다.   

 

2008년에 출간된 '또 파? 눈 먼 돈, 대한민국 예산'은 연말만 되면 전국의 보도블록을 갈아치우는 한심한 작태를 비꼬아 화제가 됐다.


그들에게는 ‘별난’ 질문이었을 이 물음에 대해 일본 공무원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보도블록을 제대로 시공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예상치 못한 파손(침하 등)이 발생하면 시공업체에서 즉시 원상복구 한다”고 답변했단다. 표정이 ‘결연’했단다. 없는 상황(보도블록 공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에 대해 질문을 받았기에 정리에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고, 그런 작태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결연한 표정이 되는 모양이다. 

 

그 다음 질문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단다. 서울 공무원의 다음 질문은 “보도에 차가 올라타거나 불법 주차를 했을 때 범칙금은 얼마나 되는가?”였단다. 이번에는 일본 공무원들이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고 박 박사는 전했다. 신기하다는 표정과 함께 그들이 내놓은 대답은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도에 차가 올라가지는 않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올라선다면 벌금이 50만 원 이상은 될 것이다. 하지만 한 번도 부과해 본 적은 없다”였단다. 

 

첫 번째 질문과 마찬가지로, ‘보도에 차가 올라가는' 경험을 거의 해본 적이 없는 그들이기에 벌금 부과액이든 적발 경험이든 도대체 대답이 난감하니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나보다.  


같은 질문을 미국 공무원에게 했어도 반응은 비슷했을 것 같다. 프랑스에는 차량의 바퀴 한쪽만을 보도 위에 올려 놓는 ‘개구리 주차’가 허용된다지만, 그런 게 없는 미국에서는 ‘보도 위를 타이어가 올라탄다’는 상황 자체를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국인을 돌연 미개인으로 만들어버린 일본 공무원들의 ‘결연하고 신기해하는 표정’에 이어 이 책 129쪽에 실린 ‘Before & After’ 사진은 또 한 번 한국인 독자의 가슴을 휘저어 놓는다.

 

런던 박물관 거리의 보도블록 공사 전(위)과 후(아래). 공사 전은 차가 주인이었지만, 공사 후에도 차도와 인도의 구분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걷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사진=위키피디아)
책 129쪽에 실린 런던 박물관 거리의 레노베이션 전과 후의 비교 사진. 

위쪽 사진은 영국의 이른바 박물관 거리(Exhibition Road)의 보도블록 공사 이전 모습이고, 아래쪽 사진은 이후 모습이다. 완전히 다르다. 위 사진에서는 주인공이 차들이지만, 아래 사진에서는 보행자가 주인이다. 단지 보도블록만 갈았을 뿐인데 이런 변화가 벌어졌단다.


영국 공무원이 박 박사에게 해준 이야기다. “교통시설을 많이 설치할수록 안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운전자들은 도로가 자기 것인 양 안심하고 더 과속하게 된다” “(보도블록 공사 뒤) 이곳을 지나가는 운전자들은 이 도로를 마치 큰 슈퍼마켓 주차장처럼 여기며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카트를 끌고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운전한다.”


차도와 인도의 경계를 나눴더니 차들이 “차도는 나의 것”이란 생각에 과속을 하는 반면, 차도와 인도를 분리하지 않고 같은 블록을 깔아버렸더니 기본적으로 차도가 아닌 인도가 되면서 사람이 아니라 차들이 조심하게 됐다는 스토리다.

 

인파로 붐비는 도쿄 시부야 거리. 하지만 보도 위에 올라타 주차를 하거나, 또는 인파 사이를 뚫고 다니는 오토바이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찾아볼 수 없다. (사진=위키피디아) 

‘차보다는 사람이 먼저지’라는 생각에 차도-인도 구분을 없애고 전체를 블록으로 깔아버림으로써 차들의 약코를 죽여버린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런던의 지혜가 동쪽 끝 한국에까지 올 날이 있긴 할까?

 

차와 인간의 싸움에서 한국은 백전백패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항상 차 쪽이 승리해 왔다. 그러나 유럽에는 영국의 박물관 거리만큼이나 인간과 자전거가 차에 패배를 안겨준 승전담이 네덜란드에 있다. 박홍규 교수가 네덜란드를 다룬 책 ‘작은 나라에서 잘 사는 길’에 나오는 내용이다.

 

인구 비례로 따져 세계에서 자전거를 제일 많이 타는 나라는 네덜란드 (중략) 1960년대 (중략) ‘하얀 자전거’ 계획은 자전거를 무료로 빌려줌으로써 암스테르담 중심부에서 자동차의 통행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는 것이었다 (중략) 자전거와 자동차가 충돌하는 경우, 자전거 쪽에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자동차 쪽에 손해배상 책임이 부과된다. 따라서 자전거보다 자동차가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네덜란드의 보행자 사망률은 세계에서 가장 낮다.(199~207쪽) 

 

자전거와 차가 충돌하면, 물리적으로는 당연히 자전거 쪽이 손해다. 그러나 암스테르담 시청과 시민들은 하얀 자전거를 몰고 시내 중심부를 점령하면서 차들을 몰아내고 승전보를 울렸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이런 희망사항을 써 놓았다. 외국처럼 차도만큼의 넓이로 자전거 도로를 설치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인도라도 제대로 설치되면 좋으리라(197쪽)고. 한국에는 '희망사항'이란 노래도 있듯, 안 된 걸 바라는 게 희망사항이라는 의미에서 박 교수의 글을 읽는다.  

암스테르담 시내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이 도시에선 1960년대부터 자전거가 도심을 점령하기 시작해 세계에서 자전거를 가장 많이 타는 도시가 됐다.(사진=위키미디아) 

한국에서 교통환경이 제일 좋다는 서울에도 '100% 사람 우선'인 인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도의 절반쯤은 거의 항상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무단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걷는 사람에게 보장된 공간을 차-오토바이가 마구 침범하기에 개념적으로는 ‘무단점거’이지만, 점거자들의 표정과 행동거지가 너무나 당당하고, 경찰관의 단속도 없으니 현실적으로는 ‘당연점거’에 가깝다. 


서울을 비롯해 지방도시에도 공공 자전거 대여 서비스가 늘어나고 있지만, 차 타는 사람이 차도는 물론 인도까지 마음대로 점령하는 바람에 차 모는 자가 주인이라는 ‘운전자주의(主義)’가 횡행하는 이 나라에, 과연 일본-영국-네덜란드 같은 ‘걷는 자 또는 자전거 타는 자가 주인 되는 날’이 올 수 있을지 없을지 그저 우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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