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도기천 편집국장) 대기업들의 초대형 투자발표가 있던 날 주가를 살펴봤다. 의미를 둘만한 변화는 없었다.
삼성은 3년간 무려 180조원을 미래성장사업에 투자한다고 선언했는데, 삼성전자 주가는 오히려 발표일(8월8일) 보다 내려간 상태다. 지난 13일 22조원 투자계획을 밝힌 한화도 마찬가지다. 발표 당일 주가가 오히려 3%가량 빠졌다.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현장에서 기업 총수들을 만나고 나면 어김없이 대규모 투자 플랜이 발표되고 있다. 최근 1년 새 삼성을 비롯, 현대차(5년간 23조원), SK(3년간 80조원), LG(1년간 19조원), 신세계(3년간 9조원), 한화(5년간 22조원) 등이 투자계획을 내놨다. 6대 그룹이 밝힌 총투자금은 333조원. 올해 정부 예산 428조원의 78%에 해당하는 천문학적 금액이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차세대 ICT, 에너지 등 주로 4차산업혁명과 연관된 미래먹거리가 투자의 주를 이룬다.
그런데도 주식시장에서는 개인, 기관, 외국인 할 것 없이 누구도 관심이 없다. 김동연 부총리만 신이 났다.
일론 머스크(테슬라 최고경영자)의 말 한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테슬라 주가와는 대조적이다. 미국·유럽 증시는 기업의 투자플랜에 따라 주가가 요동치는 게 일반적이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왼쪽)이 지난 16일 대한상공회의소 서울기술교육센터를 방문해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의 안내를 받고 있다.
333조원? 개미들 시큰둥한 이유
왜 이럴까. 과거 사례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박근혜 정부 때 창조경제가 유행처럼 번졌다. 한 개의 대기업이 한 지역을 전담하는 식으로 전국 17곳에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세워졌다. 대구·경북은 삼성이, 광주는 현대차그룹이, LG는 충북, KT는 경기, 두산은 경남, 롯데는 부산, 효성은 전북, SK는 대전, 한화는 충남, GS는 전남, CJ는 서울, 한진은 인천, 현대중공업은 울산, 네이버는 강원, 다음카카오는 제주에 각각 거점을 마련했다.
이 시기에 기업들이 앞다퉈 창조경제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이때도 지금처럼 수십, 수백조가 들어가는 원대한 플랜이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자 용두사미가 됐다. 대표적인 예가 CJ그룹의 문화창조융합센터다. CJ와 문화체육관광부가 힘을 합쳤는데, 문화콘텐츠 생산 역할만 한 게 아니다. 최순실 주변을 맴돌다 박근혜 정부와 같이 문을 닫았다.
전국의 혁신센터들 또한 대부분 개점휴업 상태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성과가 없다며 민·관 협의체였던 창조경제 민관협의회와 운영위원회를 폐지했다. 사실상 문재인 정부의 계륵 신세로 전락했다.
눈치 빠른 주식 투자자들은 이런 사례들을 반면교사로 삼은 것이다. 더구나 최근 발표된 기업들의 투자계획이 대부분 김 부총리의 대기업 현장 순회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박 전 대통령의 창조경제센터 전국 순회 때와 묘하게 오버랩 된다.
투자의 내용도 문제다. 주로 제품생산, 시설설비, 연구개발 등 자사이익에 국한돼 있어 설령 계획대로 자금이 집행되더라도 바닥경기를 순환시키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SK의 미래 주유소 개념도. (SK이노베이션 제공)
따라서 지금 같은 투자발표 이벤트는 무위로 끝날 공산이 크다. 얼마를 투자해라, 몇명을 고용했냐 등 숫자를 따지는 정책은 실효를 거두기 힘들다.
정부는 규제개혁을 통해 대기업이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렇게 거둔 성장의 과실이 중소·벤처에게 돌아가도록 제도적 루트를 마련해야 한다.
최태원 SK 회장의 ‘기업자산 공유 플랜’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 회장은 SK에너지의 전국 주유소 3600여곳을 물류기지로 활용해 청년들의 창업 지원, 실버 택배 등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정부는 이런 일에 힘을 보태고 실행을 가로막는 규제를 과감히 풀어줘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몇 안되는 성과(?) 중에 하나인 ‘청년푸드트럭’에 대기업들이 동참했다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현대자동차가 수만 대의 푸드트럭을 제작하고, 은행들이 펀딩에 나섰다면? 이런 걸 연구하는게 억지춘향이식 투자·고용 보다 열배 나아 보인다.
(CNB=도기천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