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그룹의 수장들.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허창수 GS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구광모 LG 회장, 최태원 SK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CNB포토뱅크)
여름휴가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가운데 재계 총수들은 올해도 작년처럼 휴가를 반납하고 현안 점검 및 경영 구상에 몰두하고 있다. 미국의 보호무역 강화와 원·달러환율 급등, 중국·일본 기업과의 경쟁 심화 등 글로벌 불확실성이 커져 한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상황인데다, 공정위를 앞세운 문재인 정부의 재벌개혁이 숨통을 조여 오고 있는 형국이다 보니 맘놓고 휴가를 즐길 처지가 아니다. CNB가 이들의 속사정을 들여다봤다. (CNB=도기천 기자)
무역전쟁에 사정당국까지…최악의 여름
자택에서 미래먹거리 설계하며 휴식 중
일부기업은 ‘휴가반납’, 비상경영 ‘가동’
대부분 기업들은 이달 말을 전후해 일제히 여름휴가에 들어간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2주간 휴식이 주어진다.
평생교육 대표기업 휴넷이 직장인 1106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0%가량이 극성수기인 7월말~ 8월초에 휴가를 쓸 계획이다. 휴가 계획으로는 ‘국내여행’을 하겠다는 응답이 63.5%로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이어 ‘해외여행’(25.3%), ‘집에서 휴식’(5.8%), ‘자기계발’(2.6%) 순이었다.
하지만 올해도 회장님들의 마음은 편치 못하다. ‘갑 횡포’ 논란으로 여러 기업의 오너들이 공정거래위원회나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데다, 미중 무역전쟁의 여파로 회사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서로 간에 500억 달러 규모의 수입품목에 대해 25%의 관세를 부과한데 이어, 미국은 20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대해 추가로 관세를 부과한다고 공언한 상태다.
특히 트럼프 정부는 수입승용차에 대한 관세를 현재 2.5%의 10배인 25%로 상향조정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이에 따라 현대차, 삼성전자, LG전자 등 수출 대기업들이 노심초사하고 있다. 올해 초 2500선을 넘나들던 코스피 지수는 10%가까이 추락해 2280선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30대 대기업 대부분이 최근 1년새 갑질과 경영비리 혐의 등으로 공정위 조사를 받거나 검찰·경찰의 압수수색을 받았다. 삼성, 현대차, SK, LG, CJ, 포스코, 신세계, KT, 한진, 부영, 대림산업, 현대백화점, 효성, 대우건설 등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9일 인도 국빈 방문 중에 우타르프라데시주 노이다시 삼성전자 제2공장 준공식에 도착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안내를 받고 있다. 이 부회장의 이번 여름휴가는 이날 문 대통령이 주문한 ‘투자와 고용 확대’에 대한 방안을 구상하는 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진=연합뉴스)
이재용, 文대통령 화답 카드 고민 중
상황이 이렇다보니 주요 대기업 총수들은 대부분 이번 휴가 때 자택에서 시간을 보내며 하반기 경영구상에 집중할 생각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그룹의 앞날을 고민하고 있다. 우선, 투자와 고용을 늘려달라는 정부의 주문에 화답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9일 인도 스마트폰 신공장 준공식에서 이 부회장을 만나 “한국에서도 더 많이 투자하고 더 많이 일자리를 만들어주기 바란다”고 당부한 바 있다.
이와 함께 삼성이 신성장동력으로 내세운 인공지능(AI) 분야의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
삼성은 그동안 반도체에 주력해왔다. 반도체 분야는 지난해 3분기 꿈의 영업이익률인 50%를 달성했으며, 이후에도 실적호조가 이어지고 있다. 갤럭시S9가 예상외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음에도 반도체 호조에 힘입어 2분기에 14조800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하지만 ‘반도체 굴기(屈起)’를 선언한 중국의 도전에 직면한 상태다. 중국 정부는 2025년까지 200조원을 투입해 반도체 자급률을 70% 이상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이에 삼성은 인공지능(AI)를 통해 미래를 대비하고 있다.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사장 승진자 7명 전원을 50대로 교체, 젊은 감각을 내세워 기존사업과 AI, 전장(전자장비) 간의 시너지를 모색하고 있다. 2020년까지 모든 가전제품을 AI 음성인식 플랫폼 ‘빅스비’에 연결해 편의성을 높일 계획이다.
특히 전 세계 거점 도시에 AI 센터를 설립하고 2020년까지 AI 전문가 1000명을 모집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이 부회장은 한달에 한번꼴로 해외출장을 다니는 등 ‘광폭행보’ 중이다.
따라서 그에게 이번 휴가는 정부의 고용·투자 확대 요구를 AI사업과 접목시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안을 고민하는 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주요 수출기업들은 미중 무역전쟁 등의 여파로 비상이 걸린 상태라, 여름휴가는 언감생심이다. 삼성, LG 사옥 전경. (사진=연합뉴스)
구광모, 글로벌 리더십 시험대
최근 그룹의 총수 자리에 오른 구광모 LG 회장에게도 이번 여름은 각별하다. 지난 5월 부친(고 구본무 회장)의 타계로 이제 막 경영권을 물려받은 상태다.
구 회장은 미국 로체스터 공대에서 IT(정보기술) 분야를 전공하고,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에서 실무를 익힌 IT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주특기를 바탕으로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5G(5세대 이동통신), 로봇 등 분야에서 그룹의 미래먹거리를 찾고 있다.
그룹 차원에서 밀어붙이고 있는 전장사업도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시점이다. LG전자는 지난 4월 오스트리아의 차량용 헤드램프 업체 ZKW를 1조4440억원에 인수했으며, 네덜란드의 히어, 미국의 헬라 등 글로벌 업체들과의 협업을 강화하고 있는 와중에 미국의 보호무역 장벽을 맞닥트린 상태다.
LG는 최근 미국 상무부에 자동차와 자동차부품 수입이 미국 자동차 산업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요지의 의견서를 제출했으며, 지난 19~20일 워싱턴에서 열린 관련 공청회에서도 이 점을 강조하는 등 무역전쟁에 대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구 회장은 오랜 실무경험을 살려 주요 수출국들과의 물밑협상, 우리정부와의 긴밀한 협조를 펼쳐야하는 상황이다. 그에게 이번 여름휴가는 어떻게 위기를 돌파할 지를 놓고 머리를 싸매는 장고(長考)의 시간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기아차 유럽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정 회장은 매년 휴가철마다 주로 현지공장 방문했지만 올해는 자택에서 경영구상을 하며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사진=현대차)
현대차 부자(父子), 안팎 ‘위기’…힘든 여름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은 이달 말 주요 계열사의 휴가가 시작되면 자택에서 휴가를 보내며 하반기 경영구상에 집중할 계획이다. 이들 부자가 당장 풀어야할 과제는 상당히 많다. 사실상 그룹 전체가 위기 상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 견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경쟁업체들과의 힘겨운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친환경차, 자율주행차 등 미래자동차산업을 놓고도 글로벌경쟁업체들과 치열한 신경전이 펼쳐지고 있다.
정부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 고용의 질을 높여줄 것을 주문하고 있는 점도 부담이다. 실적 악화가 계속되면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물론이고 신규 채용도 버거운 상황이다.
정 회장과 정 부회장에게 이번 여름휴가는 이런 복잡한 안팎의 상황들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될 전망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미국 금리인상, 환율 변동, 미중 무역전쟁 등 글로벌 변수에 대해 점검하고 대응책을 구상하는 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재현 유럽행, 사업확장 신호?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10대그룹 총수 중 유일하게 유럽으로 가족 휴가를 떠났다. 휴식을 겸해 현지 시장 상황을 살펴보고, 중장기 사업전략을 구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지난해 5월 경영 복귀 이후 굵직굵직한 사업재편을 성사시켰다. CJ제일제당은 지난해 11월 기존 바이오, 생물자원, 식품, 소재 등 4개 사업부문을 바이오와 식품으로 통폐합했으며, 12월에는 CJ대한통운 지분을 추가로 확보해 단독 자회사 구조로 전환했다.
CJ대한통운은 플랜트·물류건설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CJ건설과 합병하는 한편 미국 물류센터인 DSC로지스틱스를 2314억원에 인수했다. 최근에는 CJ오쇼핑과 CJ E&M의 합병도 성사됐다.
이처럼 사업혁신이 한창이다 보니 이번 유럽행 또한 단순한 휴가로 보이지 않는다. CJ제일제당은 현재 미국 대형 식품업체 쉬완스컴퍼니 인수를 추진 중이며, CJ ENM은 동유럽 최대 홈쇼핑 업체 스튜디오 모데르나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재계 일각에서는 이 회장이 중국, 미주, 동남아·호주에 이어 유럽에서의 사업을 확대하기 위해 휴가지를 유럽으로 잡은 것으로 보고 있다.
▲SK그룹은 SK건설이 시공한 라오스 수력발전 댐 일부가 무너지는 사고로 최태원 회장이 휴가를 반납한 채 사태수습에 나서고 있다. ‘대한민국해외긴급구호대’(Korea Disaster Relief Team, KDRT)' 선발대가 26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에서 라오스로 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최태원, 라오스 댐 사고로 ‘비상’
한편 각종 사고와 재판, 검찰 수사 등으로 휴가 자체가 사라진 기업들도 수두룩하다.
SK그룹은 지난 23일(현지시간) SK건설이 시공한 라오스 수력발전 댐 일부가 무너지는 사고로 수백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정확한 사고 원인은 인명구조 등 시급한 수색·복구작업이 마무리된 뒤에야 면밀한 조사를 거쳐 밝혀질 전망이지만, 조사 결과에 따라 시공사인 SK건설에 상당한 책임이 지워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사태수습에 나서고 있다. 긴급구조단을 급파하는 등 사고복구와 지원에 전사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애초 최 회장은 이번 휴가기간에 평소 지론인 ‘사회적 가치 창출’의 성과를 점검하고 새로운 비전을 구상할 계획이었다. 그는 지난해부터 기업이윤과 사회적 책무를 결합한 실험적인 프로젝트들을 내놓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SK에너지가 보유하고 있는 전국 주유소 3600여 곳을 택배 집하 등 물류기지로 활용해 청년들의 창업 지원, 실버 택배 등 안정적인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플랜이다. 이를 위해 지난 3월 CJ대한통운과 사업추진 협약을 체결했다. 지난달 ‘2018 확대경영회의’에서는 계열사 사장들에게 조직과 제도를 사회적 가치 창출에 적합하도록 ‘딥체인지(Deep Change·근본적 변화)’하라고 지시했다.
조양호·박삼구, 휴가 꿈도 못꿔
롯데그룹은 신동빈 회장이 면세점 입찰비리 의혹으로 지난 2월 구속수감 돼 재판을 받고 있다. 이에 경영진은 사실상 여름휴가를 반납한 상태다.
총수 부재에 따라 설립된 비상경영위원회의 위원들인 황각규 부회장, 민형기 롯데지주 컴플라이언스 위원장, 이원준 유통부문장, 송용덕 호텔서비스 부문장, 이재혁 식품부문장, 허수영 화학부문장 등 그룹수뇌부는 별다른 휴가계획이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주요 계열사의 CEO들도 대부분 여름휴가를 미루고 경영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 관계자는 CNB에 “통상 그룹 임원들은 7~8월에 휴가를 다녀오지만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인 만큼 휴가를 자제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최근 갑질 논란에 휩싸인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의 총수들도 휴가를 언급할 처지가 아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딸(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과 부인(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의 갑질 논란에다 횡령·배임 의혹까지 불거져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은 기내식 대란을 일으켜 시민단체로부터 고발당한 상태다.
재계 고위관계자는 CNB에 “작년에는 새정부가 모토로 내건 재벌개혁과 재계와의 첫 청와대 간담회(7월말)에 대비하느라 휴가를 미뤘는데, 올해는 글로벌 변수와 사정당국의 조사·수사 등으로 자리를 비우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라며 “설령 휴가를 가더라도 언론의 관심을 피해 소리소문없이 다녀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