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비리 의혹과 관련해 검찰로부터 기소된 은행들. (사진=CNB포토뱅크)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과 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이 검찰의 채용비리 수사 결과 무혐의 판정을 받으면서, 이들을 검찰에 고발한 금융당국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윤 회장과 김 회장이 지난 8개월 간 검찰 수사로 곤욕을 치르는 사이 두 은행은 쇄신에 차질을 빚는 등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금융당국이 무리수를 둔 속내는 뭘까. (CNB=도기천 기자)
먼지털이식 수사 불구 ‘무혐의’ 판정
개인비리로 몰았던 금감원, 비판 직면
의혹 털어낸 두 회장, 금융혁신 ‘탄력’
“채용비리에 대해 책임질 사람은 책임지면 될 일이다. 정부가 이번 사안을 은행권 통제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A은행의 한 간부)
6개 시중은행(KB국민·KEB하나·우리·부산·대구·광주은행)에 대한 채용비리 수사를 벌여온 대검찰청은 지난 17일 이 사건과 관련해 12명을 구속기소하고 26명은 불구속 기소했다.
은행들은 이번 검찰 수사결과에 대해 불만과 안도의 모습을 동시에 보였다.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 함영주 하나은행장, 성세환 전 BNK금융 회장 겸 부산은행장, 박인규 전 DGB금융 회장 겸 대구은행장 등 거물급이 줄줄이 기소되기는 했지만, 앞서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한 바 있어 예견된 일이라는 반응이다. 조만간 재판이 시작될 예정인 만큼 별다른 반응 없이 숨죽이고 있다.
다만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과 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이 불기소(무혐의) 된 것과 관련해서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조심스레 불만이 나오고 있다. 문재인 정부 초기 때 ‘적폐 청산’ 분위기를 타고 금감원이 무리한 조사(검사)와 검찰 고발을 진행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특히 윤 회장과 김 회장 모두 연임 과정에서 이 사안이 불거져 노조로부터 갖은 의혹을 받았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CNB에 “당시 연임에 실패했다면 개인적으로도 억울한 일이 되었을 것이고 회사로서도 큰 손실을 입는 결과를 가져올 뻔 했다”며 “금감원이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앞서 금감원은 자체 검사결과를 토대로 두 회장에 대해 채용비리 연루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윤 회장은 종손녀가 국민은행에 채용될 당시 서류전형 합격자 수가 늘었고 일부 임직원이 면접서 최상위 점수를 준 점이 의심 받았다. 김 회장은 특정 지원자가 우대점수를 받았다는 점에서 의혹을 샀다. 두 사람은 지난해 11월과 올해 3월에 각각 연임에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노조의 반발과 검찰 수사로 혹독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검찰은 금감원의 정황 자료와 수차례의 압수수색에도 불구하고 두 회장의 혐의점을 밝히지 못했다.
이번에 두 은행이 기소된 내용은 금감원이 애초 제기했던 ‘개인적’ 의혹과는 거리가 멀다. 모두 회사 차원에서 남녀고용평등법을 위반한 혐의였다. 두 은행은 남성합격자 비율을 높일 목적으로 서류전형 평가점수 등에 차등을 두는 방식으로 남녀 합격비율을 조정한 혐의를 받고 있다.
▲윤종규 KB금융그룹 회장(왼쪽)과 김정태 하나금융그룹 회장. (사진=CNB포토뱅크, 연합뉴스)
윤종규·김정태 ‘희생양’ 삼았나?
그렇다면 애초 금감원은 왜 무리수를 뒀을까? 금융권에서는 두 가지 측면이 동시에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정치적 논리가 작용했을 가능성이다. 은행 채용비리는 작년 10월 국회 국정감사 때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우리은행 관련 의혹을 폭로하면서 불거졌다. 당시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직후로, 청년실업과 양성평등, 적폐청산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때다.
이런 상황에서 은행권 채용비리의 폭발력은 상당히 컸다. 이광구 우리은행장은 곧장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했으며, 뒤이어 금융당국이 5개 시중은행을 검사해 의심 사례를 검찰에 넘겼다.
이 시기에 금감원은 수석부원장과 전 총무국장 등이 지인의 부탁을 받고 국책은행 임원 아들을 부정합격 시켰다는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었다. 또 감사원 감사결과, 임직원 40여명이 차명계좌로 주식거래를 해온 사실이 드러났으며, 12명은 음주운전으로 기소됐음에도 금감원에 알리지 않은 것으로 확인돼 징계 절차가 진행 중이었다.
따라서 금감원 입장에서는 내부 쇄신이 절실했으며, 이런 가운데 박근혜 정권과 이명박 정권 때 각각 취임한 윤 회장과 김 회장을 ‘반전 카드’로 여겼을 수 있다는 게 금융권 일각의 시각이다.
또다른 측면은 해당 은행들이 ‘꽤씸죄’에 걸렸을 가능성이다.
불씨는 작년 11월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지배구조 문제를 들고 나오면서부터다. 당시 최 위원장은 금융사의 회장추천위원회(회추위)가 경영진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제도개선에 착수했고, 비슷한 시기에 윤종규 회장이 연임에 성공했다. 윤 회장이 간발의 차이로 소나기를 피하자 최 위원장은 ‘셀프 연임’이라며 비판했다.
이후 금감원은 차기 회장 선출과정에 현 회장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회추위 구성을 공정하게 하라는 내용의 경영유의 조치를 내렸다.
김정태 회장도 금융당국과 마찰을 빚었다. 금감원은 올해 초 차기 회장 선임절차를 진행 중인 회추위에 ‘하나금융 검사 결과가 나온 이후로 일정을 미뤄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회추위는 일정을 강행해 김 회장을 회장 최종후보로 선정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금융당국의 심기가 불편해졌고, 이로 인해 채용비리 의혹이 지나치게 확대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검찰 수사관들이 지난 11일 채용비리 의혹과 관련해 한 은행을 압수수색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증거주의 원칙 지켜야”
한편 의혹을 털어낸 두 회장은 금융혁신에 속도를 낼 전망이다.
윤 회장은 낙하산 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이전 회장·은행장들과 달리 KB금융에서 CFO, CRO, 부사장을 지낸 내부 출신이다. 지난해 가장 큰 성장세를 보이며 신한은행을 제치고 1위 자리에 오른데 이어 올 1분기에도 선두를 지켰다.
김 회장 또한 외환은행과의 합병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호실적을 이끈 점이 구성원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얻고 있다. 김 회장은 임기 중 대기업 대출 비중을 줄이고 중소기업 대출을 늘리는 식으로 여신포트폴리오를 개선했으며, 이는 주가상승과 실적 향상을 가져왔다.
두 회장은 이런 성과를 기반으로 쇄신에 나섰지만 검찰 수사에 발목이 잡혀 차질을 빚어왔다. 하지만 이번에 의혹을 벗은 만큼 개혁 플랜이 다시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글로벌 통합 디지털 자산 플랫폼인 GLN(Global Loyalty Network) 컨소시엄을 활용한 하나멤버스의 강화를, 윤 회장은 ‘포용적 금융’과 ‘사람 중심 경제’를 내세운 맞춤형 상품과 서비스 제공을 강조한 바 있다.
또 하반기 채용도 활성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검찰 수사로 올해 채용이 위축된 측면이 있었지만, 과거 잘못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채용기준과 절차를 손질해 인재 등용에 나설 계획이다. 해외사업과 인수합병(M&A) 등 최고경영자의 투자 결정이 필요한 사안들도 다시 탄력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CNB에 “비리 근절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어떤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최고경영자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누가 그 자리에서 버틸 수 있겠나”며 “사업의 연속성, 경영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 사정당국이 증거주의에 입각한 신중한 태도를 보여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