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고강도 경영쇄신안을 내놓은 지 만10년이 되면서 안팎에서 기대와 자성의 목소리가 동시에 쏟아지고 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위기론이 힘을 얻는 가운데, 지난 10년의 성과가 한국경제 성장에 상당한 동력이 되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삼성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CNB=도기천 기자)
반도체 세계1위, 4차 산업혁명 주도
‘기술혁신’ 이뤘지만 ‘가치혁신’ 못해
전문가들 “사회적 경영으로 거듭나야”
“전략기획실을 해체하겠다. 차명계좌는 실명 전환 후 사회사업에 쓰겠다.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 하겠다.”
2008년 4월 22일.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특검 수사를 받고 난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퇴진, 부인 홍라희 씨의 리움미술관장직 사퇴, 아들 이재용 당시 전무의 고객총괄책임자(CCO) 직책 사임 등 10개 항의 쇄신안을 내놨다. 총수 일가의 거취 표명을 비롯해 그룹 컨트롤타워인 전략기획실(이후 미래전략실로 변경) 해체, 이 회장의 차명계좌 실명 전환 후 사회사업 활용, 지주회사 전환의 장기 과제 추진 등 혁신적인 내용들이 담겼다.
당시 쇄신안은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삼성 내에서는 조직 대수술, 무(無)노조 시대의 끝, 사업 전면 개편 같은 말들이 회자됐다.
이 중 상당 부분은 지켜졌지만 일부는 공약(空約)이 됐다.
그룹 컨트롤타워인 전략기획실은 미래전략실로 부활했지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을 계기로 다시 폐지됐다.
지주회사 전환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하겠다는 당초 취지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대대적인 경영혁신을 통해 70개가 넘는 순환출자 고리를 대부분 해소했다.
2013년에는 제일모직의 패션사업부문을 삼성에버랜드에 넘기면서 사업재편의 신호탄을 올렸다. 이듬해엔 삼성SDS, 삼성에버랜드, 제일모직, 삼성SDI 등 핵심계열사들이 줄줄이 합병·이전 등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투병 중인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삼성호(號)를 이끌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최근 모습. (사진=연합뉴스)
이건희 회장이 갑작스런 심근경색으로 입원한 2014년 5월 이후에도 변화는 계속됐다. 장남 이재용 부회장은 병상에 있는 이 회장을 대신해 사업재편과 매머드급 M&A 등 쇄신을 주도해왔다.
그는 2015년에 삼성토탈·삼성종합화학 등 4곳을 한화에 매각한 데 이어 삼성SDI의 케미컬 부문 등 3곳을 롯데에 넘기는 등 방위·화학 사업을 정리했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도 성사시켰다.
공격적인 투자도 이어졌다. 이 부회장은 2014년 비디오앱 서비스 개발업체 ‘셀비’ 인수를 시작으로 미국 공조전문 유통회사 ‘콰이어트사이드’, 캐나다 모바일 클라우드 솔루션업체 ‘프린터온’, 미국 사물인터넷 플랫폼 개발회사 ‘스마트싱스’, 서버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소프트웨어 업체 ‘프록시멀 데이터’ 등을 사들였다.
이듬해에는 브라질 최대 프린트 서비스 업체 ‘심프레스’, 미국 모바일 결제 솔루션업체 ‘루프페이’, 미국 상업용 발광다이오드 디스플레이 업체 ‘예스코일렉트로닉스’ 등을 인수했다.
2016년에는 세계최대 전장 기업인 하만을 인수한 것을 비롯, 미국 클라우드 서비스업체 ‘조이언트’와 캐나다 디지털광고 스타트업 ‘애드기어’를 사들였다. 중국 전기차 업체 ‘비야디(BYD)’에 5100억원 상당의 지분 투자를 했으며, 삼성전자 프린트사업부는 미국 HP(휴렛팩커드)에 매각했다.
세대교체도 속도를 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삼성전자 사장 승진자 7명 전원을 50대로 교체했다. 평균 나이가 57세로 전임자 평균 나이 63.3세보다 6.3세 젊어졌다.
회사가 거둔 열매를 주주들과 나누겠다는 약속도 점차 현실화 되고 있다. 삼성전자 이사회는 지난해 10월 향후 3년 동안 주주들에게 돌아가는 현금배당 규모를 기존보다 2배 수준으로 확대하는 내용의 주주환원정책을 의결했다. 이에 따라 현금배당 규모가 기존 연 4조원 수준에서 4조8천억원으로 늘었으며, 2021년에는 연 9조원 대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부회장은 특유의 ‘선택과 집중’ 전략을 내세워 삼성의 혁신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삼성그룹은 삼성전자를 지주회사로 전환하려 했지만 미래전략실이 해체되자 계획을 접었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사진=연합뉴스)
‘절반의 성공’ 거뒀지만…
하지만 시련과 좌절도 있었다. 10여년 전 삼성이 그린 큰 그림은 삼성전자 중심의 전자 계열사와 삼성생명 중심의 금융 계열사, 그룹 차원 신수종 사업인 바이오 분야 등 3대 축을 중심으로 수직계열화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은 필수적인 전제였다. 지주회사는 그룹 전체의 모(母)회사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곳만 들여다보면 계열회사 간 출자 및 지배구조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 때부터 경제민주화의 핵심과제로 이를 권장해왔다.
이런 흐름을 타고 LG와 SK, 현대중공업, 한진그룹 등은 최근 몇 년 새 지주사로 전환했다. 작년 10월에는 롯데그룹이 유통·식품 부문 42개 계열사를 편입한 롯데지주를 창립해 ‘뉴롯데’를 선언했다.
현대차그룹과 효성 등도 순환출자와 일감몰아주기 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삼성 입장에서 지주사 전환은 경영투명화와 사업재편을 함께 이룰 수 있는 ‘빅 카드’였다.
삼성은 크게 두 축에서 이 작업을 진행했다. 우선 2016년에 삼성생명을 금융지주회사로 전환하려 했다. 삼성증권, 삼성카드, 삼성화재, 삼성자산운용 등 여러 금융계열사들을 삼성생명을 중심으로 한데 묶겠다는 것.
하지만 금산분리 규제로 삼성생명의 비금융계열사 지분율을 5% 아래로 줄여야 하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했다. 당시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을 7.5% 가지고 있었는데 법과 금융위 유권해석에 따라 최대 7조원어치의 삼성전자 주식을 매각해야 했다.
삼성은 금융위에 법이 정한 기간을 모두 활용해 7년 내 처분하겠다는 계획을 냈고, 금융위는 2년 내 매각을 제시했다. 양측의 입장이 엇갈리면서 결국 지주사 계획은 보류됐다.
또 다른 한 축은 삼성전자를 분할해 ICT계열사들의 지주사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삼성디스플레이, 삼성SDI, 삼성전기, 삼성SDS 등 전자계열사들이 부문별로 뻗어나가도록 하겠다는 것.
삼성은 지분구조가 투명해지고 사업부문 간의 시너지를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를 야심차게 추진했지만, 이 부회장이 지난해 2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돼 구속되고 그룹의 컨트롤타워인 미전실이 해체되면서 계획을 철회했다.
▲고강도 경영쇄신안을 내놓은 2008년 4월 22일 이후 10년간 삼성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2013년 9월 9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힐튼호텔에서 열린 제 125차 IOC 총회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 (사진=연합뉴스)
기술 혁신에서 가치 창출로
전문가들은 앞으로 삼성 앞에 놓인 과제는 ‘기술혁신 만큼 가치창출을 이루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삼성은 ICT 분야에서 엄청난 성장을 이루며 4차산업혁명을 주도하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시장에서 인텔을 추월해 세계1위 기업으로 올라섰으며, 10년전 50만원 대였던 삼성전자 주가는 지금 250만원선까지 올랐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연말 임원 인사에서 전체 승진자 221명 중 99명을 반도체(DS) 부문에서 승진시킬 정도로 첨단산업 분야에 온 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노사문제 등 가치경영에 있어서는 과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이런 점에서 삼성전자 자회사인 삼성전자서비스가 지난 17일 협력업체 직원 8000명을 직접 고용하고, 이들의 노조 활동을 보장하겠다고 발표한 점은 획기적인 조치로 평가된다. 특히 80년간 지속된 ‘무노조 경영’ 역사에 마침표가 찍혔다는 점에서 노동계가 주목하고 있다.
삼성 내부에서는 ‘2008년 쇄신안 이후 10년’에 대한 자성의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새로운 방식의 중장기 신뢰회복 방안이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움직임은 시장의 위기와도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사업이 슈퍼 사이클(장기 호황)을 맞아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고 있지만, 후발주자들의 추격세가 예사롭지 않다.
삼성전자와 인텔이 1, 2위를 다투고 있는 가운데 퀄컴과 브로드컴, SK하이닉스 등이 선두그룹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2025년까지 1조 위안(약 170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산업을 일으킬 계획이다. 반도체 시장의 수요·공급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 말도 나온다.
이런 안팎의 위기에 대응할 유일한 돌파구로 ‘가치(공유) 경영’이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한국재벌사>의 저자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는 CNB에 “기술혁신과 공유경제는 결코 동떨어진 얘기가 아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핵심역량이 바로 사람이라는 점에서 인본적 가치가 바탕이 될 때 경쟁력이 높아진다. 삼성의 새로운 시작은 여기서부터 비롯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 계열사 임원은 “지난 10년간 엄청난 기술혁신을 이뤄냈지만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그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며 “앞으로의 삼성은 사회적 가치를 중심에 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은 80년대 이후 3차례의 혁신이 있었다. 창업주 이병철 선대회장이 1983년 ‘2·8 선언’을 통해 본격적인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한 것이 첫 번째다. 1993년에는 이건희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신경영 방침을 발표했으며, 2008년의 쇄신안 발표가 세 번째다.
이제 삼성은 네 번째 혁신을 향해 가고 있다. 네 번째는 주주와 경영진, 노동자와 지역사회가 함께 움직이는 ‘공유 경영’에 방점이 찍히기를 국민 모두가 바라고 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