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 재판에 넘겨진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왼쪽)과 박근혜 전 대통령이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CJ그룹에 대해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혐의 등으로 지난 22일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으면서, CJ의 불행했던 과거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당시 정권 차원에서 행해진 이 회사에 대한 탄압은 광범위하고 집요했다. VIP는 왜 그토록 CJ를 미워했을까. (CNB=도기천 기자)
‘박정희 콤플렉스’가 만든 CJ흑역사
문화·역사 새판 짜려고 ‘길들이기’
4년여 걸친 집요하고 끈질긴 압박
“그 시절은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죠” (CJ 계열사의 한 임원)
우병우 전 수석의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CJ에 대한 권력남용은 충격적이다.
검찰의 공소장과 1심 판결문 등에 따르면, 우 전 수석은 2014년 10월, 자신의 직권을 이용해 공정거래위원회 측에 CJ E&M(옛 CJ엔터테인먼트)을 검찰에 고발해 줄 것을 요구했다.
물론 여기에는 VIP의 의중이 반영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4년 3월 청와대 영빈관 열린 규제개혁장관회의에서 노대래 당시 공정위원장에게 국내 영화산업의 독과점 문제에 대해 바로 잡으라고 특별 지시했다. 이는 국내상영관 수 1위인 CJ CGV와 영화 제작·배급사인 CJ E&M을 겨냥한 조치였다.
이에 공정위는 즉각 실태조사에 착수했고 CJ 외에도 롯데엔터테인먼트와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을 조사 대상에 올렸다. 이 결과 CJ E&M이 제작사에 부당한 이자비용을 청구한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공정위 지침 상 검찰 고발 기준 점수에는 미치지 않아 시정명령을 내리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그러자 우 전 수석은 신영선 공정위 사무처장을 청와대로 불러 CJ E&M을 CJ CGV와 공동정범으로 묶어 고발의견을 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우 전 수석은 CJ E&M이 이자비용을 제작사에 부담하도록 한 부분은 경미하지만, CJ CGV 영화관의 스크린 독점에 따른 수익이 CJ E&M에 귀속됐다는 점에서 두 회사가 불공정 행위를 공모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두 회사를 한데 엮어 고발조치하라는 얘기였다.
신 처장은 이를 노대래 당시 공정위원장에게 전했다. 같은 시기에 김영한 전 민정수석도 노 위원장에게 직접 전화해 압력을 넣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공정위는 변호사를 통해 CJ CGV와 CJ E&M이 공동정범이 성립 가능한지 여부를 검토했지만,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김재중 공정위 국장이 전원회의에서 구두로 CJ E&M에 대한 검찰고발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지만 대세를 뒤집을 순 없었다. 공정위는 CJ E&M을 고발하지 않기로 최종 의결했다.
1심 법원은 CJ E&M이 고발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데도 우 전 수석이 공정위 관계자들에게 검찰 고발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발언토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점을 인정해 우 전 수석에게 직권남용 및 권리행사방해죄를 적용했다. 부당한 의도로 공정위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다만, 의사결정의 자유를 제약할 정도의 협박은 아니었다는 이유로 강요 혐의는 인정하지 않았다.
▲CJ그룹의 손경식 회장이 지난달 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손 회장은 이날 작심한듯 CJ가 박근혜 정권으로부터 핍박받은 사실들을 폭로했다. (사진=연합뉴스)
우병우는 ‘빙산 조각’
이번 우병우 재판에서 드러난 부분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CJ 죽이기’는 박근혜 정부 집권 기간 내내 계속돼 왔다.
지난 1월 8일 국정농단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손경식(78) CJ그룹 회장은 “2013년 7월 4일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으로부터 이미경 부회장(이재현 CJ그룹 회장의 누나)의 경영일선 후퇴를 요구받았다”고 폭로했다. 이 부회장은 공정거래위원회 조사, 국세청 세무조사 등 CJ에 대한 압박이 계속되자 2014년 9월 미국으로 출국했다. 손 회장에 따르면 당시 이 부회장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보행조차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고 한다.
조 전 수석은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이 ‘CJ가 걱정된다. 손 회장이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서 사퇴하고 이 부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법정 진술했다. 이와 관련 손 회장은 “스스로 사퇴하지 않으면 CJ에 더 큰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돼 (대한상의 회장에서) 물러났다”고 증언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로 이미경 CJ 부회장의 사퇴를 종용한 것으로 알려진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지난달 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수준 낮은 ‘왕따 작전’도
청와대가 대놓고 CJ를 ‘왕따’시킨 사례도 여럿 있다.
2013년 5월 박 전 대통령의 취임 첫 방미를 앞두고 경제사절단을 구성할 때 대기업 총수들이 여럿 포함됐지만 CJ는 제외됐다. 2014년 1월 대한상의 주최 경제계 신년인사회에서는 재계 서열 10위권인 CJ그룹의 손 회장이 헤드테이블에 앉지도 못했다. 2016년 6월 프랑스를 국빈 방문 중이던 박 전 대통령이 파리에서 열린 CJ그룹 주최 한류 콘서트에 참석하면서 청와대가 이 부회장은 참석하지 말라고 CJ 측에 요청했다는 얘기도 재계에서 돌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핵심과제로 추진했던 ‘창조경제’에서도 CJ는 찬밥 신세였다. 삼성은 대구를, 현대차는 광주를, LG는 충북을 맡는 식으로 전국 17개 시·도에 창조경제혁신센터가 개설됐고 창립식 때마다 대통령이 참석해 분위기를 띄웠다. 하지만 2015년 4월에 있은 ‘CJ창조경제추진단’ 출범 때는 박 전 대통령을 볼 수 없었다.
박 전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CJ를 타깃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취임 직후인 2013년 8월 21일 열린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는 ‘종북세력이 문화계를 15년 간 장악했다. CJ와 현대백화점 등 재벌들이 줄을 서고 있으니 정권 초기에 사정을 서둘러야 한다’ 등의 얘기가 나왔다. 또 2013년 9월 30일에 있은 박 전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는 ‘국정지표가 문화융성인데 좌편향 문화예술계에 문제가 많다. 특히 CJ가 문제’라는 발언이 나왔다. 이는 수석비서관들의 당시 업무수첩을 통해 확인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박정희 시대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영화들을 유독 싫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CJ가 제작했거나 투자한 영화 ‘광해’와 ‘변호인’.
예민했던 이유 ‘아버지 콤플렉스’
이처럼 박근혜 정부가 CJ를 끝없이 미워했던 이유는 뭘까.
표면적으로는 2012년 대선 때 CJ계열의 방송·영화들이 당시 후보였던 박 전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상대후보(문재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점이 화근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CJ E&M의 개그프로 ‘SNL 코리아’는 수차례 박 전 대통령을 희화화했으며, CJ E&M이 제작·보급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생각나게 하는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2013년 12월 개봉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재로 한 영화 ‘변호인’ 또한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 영화는 CJ계열사인 CJ창업투자가 제작비 일부를 투자했고 전국의 CJ CGV에서 상영됐다.
하지만 단순히 영화 몇 편 때문에 굴지의 대기업을 탄압했다고 보기에는 뭔가 설명이 부족해 보인다.
사회평론가 구병두 교수(서경대)는 ‘정권의 정통성 부재’에 근본적 이유가 있다고 봤다. 그는 CNB기자와 만나 “유신 대 반(反)유신 구도였던 박정희 시대가 80년대에 와서는 ‘신(新)군부 대 민주화’라는 갈등구조로 이어졌다”며 “박 전 대통령 입장에서는 민주화 역사를 용인하면 아버지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셈이 되므로 (CJ의 영화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5.16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인물이다. 직접선거제도를 철폐하고 유신헌법을 제정해 18년 간 장기집권 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3년, 당시의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에 대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했다며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런 측면에서 박 전 대통령을 헌정질서를 파괴한 독재자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후 박정희의 법통을 이어받은 게 전두환 정권이다. 따라서 박 전 대통령 입장에서는 80년대 고문조작 사건을 배경으로 한 ‘변호인’ 같은 영화는 쳐다보기조차 싫었고, 그 영화를 보급한 CJ가 미웠을 수 있다. 반면 그녀는 박정희 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영화 ‘국제시장’을 직접 관람하며 감격했다. 이런 행동들은 국정교과서 개정, 문화계 블랙리스트(지원배제) 작성 등과도 연관이 깊어 보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권 시절 치적들이 나열돼 있는 박정희기념·도서관 내부. (사진=도기천 기자)
최종목표는 CJ 장악?
‘CJ 죽이기’를 국내 최대 문화기업을 손에 넣기 위한 ‘포석’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는 CJ가 문화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점에 기인한다.
CJ는 이재현 회장이 1995년 미국의 영화제작·배급사 드림웍스에 3500억원을 투자하면서 ‘문화 CJ’를 세계에 선포한 이후, 명실공히 문화 1위 기업으로 성장해 왔다. 한류 열풍을 주도했고, 후발 기업들의 길을 터줬다. CJ는 2020년까지 그룹 매출 100조 시대를 열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CJ E&M이 제작한 애국코드의 영화가 보수진영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는 점은 박 전 대통령을 충분히 고무시켰을 수 있다. 명량(2014년), 국제시장(2014년), 인천상륙작전(2016년) 등이 대표적인 예다.
결국 ‘아버지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역사·문화 분야 새판짜기가 진행됐고, 이 과정 속에 ‘CJ 길들이기’가 있었다는 분석이다.
구병두 교수는 “박근혜 정부는 단순히 싫은 쪽을 배격하는 차원을 넘어 박정희 시대의 역사평가 자체를 바꾸려 시도했다”며 “이런 점에서 CJ는 눌러야할 적이면서 동시에 길들여야할 대상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오종선 선임이사는 CNB에 “CJ는 진보진영과는 아무 상관없는 기업이며, 사기업으로서 그저 이익을 좇아 움직였을 뿐인데, 그 조차도 색깔을 덧씌운걸 보면 (박근혜 정권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