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은 재벌의 수난시대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사태에서 비롯된 재벌개혁 요구는 ‘재계 저승사자’로 불리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취임하면서 현실로 나타났다. 골목상권 침해, 갑질 논란, 일감몰아주기 등 재벌의 대명사처럼 돼버린 해묵은 논쟁이 다시 주목받았고,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여러 기업의 총수들이 검찰을 들락거렸다. 이중 일부는 기소돼 재판이 진행 중이다. 반면 불기소 되거나 형집행이 유예된 회장님들은 가슴을 쓸어 내려야했다. CNB가 그날의 사건들을 되짚어봤다. (CNB=도기천 기자)
▲국회청문회에 출석한 기업총수들이 증인선서를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정몽구 현대차 회장, 조양호 한진 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구본무 LG 회장, 손경식 CJ 회장. (사진=연합뉴스)
최순실 게이트…냉·온탕 오간 총수들
재계의 수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작년 연말부터다. 특검은 재계 총수들과 박근혜 대통령의 만남 직후에 최순실씨가 미르·K스포츠재단을 통해 거액의 기금을 거뒀다는 점에 주목했다.
최씨의 재단에 출연한 기업은 총 53곳으로 금액은 774억원에 달한다. 삼성 204억, 현대차 128억, SK 111억, LG 78억, 포스코 49억, 롯데 45억, GS 42억, 한화 25억, KT 18억, LS 16억, CJ 13억, 두산 11억, 한진 10억, 금호아시아나 7억, 대림 6억, 신세계 5억, 아모레퍼시픽 3억, 부영 3억 등이다.
작년 12월 국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해 구본무 LG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SK 회장, 손경식 CJ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허창수 GS그룹 회장(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등 9명의 재벌총수를 국회로 불러 청문회를 열었다. 총수들이 한꺼번에 국회에 불려나간 건 1988년 ‘5공 비리 청문회’ 이후 30여년 만이었다.
이후 이들은 지난 3~4월까지 검찰과 특검 수사를 번갈아가며 받았다. 그 결과 대부분 총수들은 불기소 처분을 받았지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뇌물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오른쪽)이 지난 6월 13일 청와대에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함께 걷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장미 대선…‘재계 저격수’ 김상조 전면에
지난해 12월 9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올해 5월 ‘장미 대선’으로 불리는 조기 대선이 치러졌다. 이를 통해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재벌개혁을 국정의 주요 화두로 내걸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본질이 정경유착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다.
본격적으로 메스를 들이 댄 시점은 지난 6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취임하면서부터다. 김 위원장은 지난 20여년 간 재벌의 편법·불법상속, 지배구조, 내부거래 등을 지적해온 경제학자 출신이다. 대선 당시 문재인 캠프에서 ‘J노믹스’ 경제민주화 부문을 설계해 ‘文의 복심’으로 통한다.
그는 공정위에 기업집단국을 신설해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추진하는 한편 대기업 계열사 간의 일감몰아주기 근절, 문어발식 확장 방지, 골목상권 보호 등에 주력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성주디앤디, 하림, 미스터피자, 비비큐, 부영, 대림산업, 효성 등 여러 기업이 공정위 조사를 받았거나 받고 있다.
▲서울 중구 두타면세점 앞. (사진=연합뉴스)
면세점기업 ‘수난시대’
올해는 면세점 기업들이 큰 시련을 겪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수사하던 특검이 면세점 특혜 의혹을 제기하면서 면세점 사업에 진출한 SK그룹(SK네트웍스 워커힐면세점)과 롯데(롯데면세점), 두산(두타면세점), 한화갤러리아 등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3월에는 중국 정부가 사드 보복 조치로 한국 단체관광을 불허하는 한한령(限韓令·한류 및 단체관광 제한령)을 선포하면서 국내 면세점의 최대 소비주체였던 중국인 관광객 수가 예전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매출이 급감하자 일부 면세점은 매장 면적을 줄이고 영업시간을 단축하기에 이르렀다.
또 7월에는 감사원 감사결과, 호텔롯데(롯데면세점)가 면세점 입찰 때 한화갤러리아와 두타면세점에 비해 불리한 기준을 적용받은 사실이 드러나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처럼 면세점업계에 바람 잘 날이 없자, 올해 말 특허가 만료되는 롯데면세점 코엑스점 입찰에는 기존 사업자인 롯데만 단독 입찰해 사업권을 갱신했다. 또 인천국제공항 내 면세점들은 공항공사에 임대료를 낮춰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한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렸던 면세점이 ‘계륵’ 신세가 된 해였다.
사드 후폭풍…새해 전망 안갯속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간의 이달 초 한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양국 간 해빙 무드가 조성되고 있지만, 중국 정부가 한국 단체관광 허용을 중국 일부 지역에 한정하고 있어 우리 기업들의 시련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3월 15일부터 계속되고 있는 중국 정부의 한한령으로 인해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롯데·신라면세점, 한국콜마, 아모레, LG생활건강, 롯데쇼핑 등 항공·유통사들이 큰 피해를 보고 있다. 대규모 영업손실을 기록한 롯데마트는 지난 9월 중국 사업 철수를 결정했다.
새해에도 한중 관계는 안갯속을 벗어나지 못할 전망이다. 중국 정부가 우리 정부가 언급한 ‘3불’(사드 추가배치 불허-미국 미사일방어체계 불참-한미일 군사동맹 부정)의 ‘이행’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있는데다, 중국단체여행객의 롯데호텔 숙박과 롯데면세점 쇼핑을 여전히 금지하고 있어 양국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경기도 이천의 SK하이닉스 생산공장. (사진=CNB포토뱅크)
반도체 슈퍼호황…삼성전자·SK하이닉스 ‘꿈의 실적’
반도체로 시작했다 반도체로 끝난 한해였다. 올해 증시 첫 거래일(1월2일) 2026포인트였던 코스피지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에 힘입어 2500선을 들락거렸다. 양사는 사상최고 실적을 내며 주가를 견인했다.
최근 연말인사에서는 승진잔치가 벌어졌다. 정기임원인사에서 SK하이닉스는 부사장 3명, 전무 11명, 상무 27명 등 모두 41명이 승진했으며, 삼성전자는 반도체(DS)부문에서 99명이 승진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지난 10월 낸드플래시 부문 세계 2위의 기술력을 갖고 있는 일본 도시바 메모리 사업부 인수를 성사시키는 쾌거를 올렸다.
내년 전망도 밝다. 전문가들은 스마트폰의 대중화와 고성능화로 인해 핵심부품인 반도체의 수요가 여전하며 인공지능(AI), 자율주행자동차, 사물인터넷(IOT) 등 반도체를 필요로 하는 산업군이 한동안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2월 검찰 조사 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이재용 구속…재계에 충격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수감은 재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이 부회장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돼 지난 2월부터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1심 법원은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에게 승마 지원과 영재센터를 후원한 점을 뇌물공여로 판단, 그에게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삼성그룹에서 구속된 총수는 이 부회장이 처음이다. 그는 병상에 있는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계열사 사업재편과 매머드급 M&A 등 쇄신을 주도해왔으며 특유의 ‘선택과 집중’ 전략을 내세워 삼성의 혁신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특검의 칼날을 피하지는 못했다.
그의 구속 이후 삼성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온 미래전략실이 해체됐고, 이후 계열사 별로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가 ‘성과주의’와 ‘세대교체’를 키워드로 하는 대규모 임원 인사를 단행한 것과 관련해 이 부회장이 ‘옥중 경영’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재현 CJ회장이 지난 10월 22일 PGA투어 더 CJ 컵 나인브릿지 경기에서 1위를 차지한 저스틴 토머스(미국)에게 트로피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재현 CJ 회장 경영복귀
지난해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지난 5월 4년 만에 경영복귀를 선언했다. 재계에서는 이 회장의 복귀가 기적 같은 일로 여겨진다.
이 회장은 2013년 7월 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수감 된 이후 대부분 시간을 구치소가 아닌 병원에서 보냈다. 손과 발의 근육이 위축되는 희귀유전병 ‘샤르코-마리-투스’(CMT)의 증세가 악화된 데다, 요독증이 심해져 부인 김희재씨의 신장을 이식받는 수술을 받았다. 3년 넘게 서울대병원을 오가며 재판을 받아왔다. 또 옥중에서 부친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의 타계를 지켜봐야 했다.
다시 경영 전선에 선 이 회장은 ‘그레이트 CJ’와 ‘월드베스트 CJ’를 선언했다. 그레이트 CJ는 2020년 매출 100조원, 해외 매출 비중 70%를 달성한다는 계획이며, 월드베스트 CJ는 2030년 3개 이상의 분야에서 세계 1등이 되겠다는 목표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가운데)이 지난 22일 1심 선고공판이 끝난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롯데家의 수난과 ‘뉴롯데’ 선언
올 한해 동안 롯데만큼 천당과 지옥을 오간 기업은 없을 것이다.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 총괄회장의 장남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간의 경영권 다툼에서 비롯된 롯데 사태는 결국 배임·횡령 혐의 재판으로 이어졌다.
지난 22일 1심재판에서 신 총괄회장은 징역 4년을, 신 회장은 징역 1년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신 총괄회장과 사실혼 관계인 서미경씨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신 총괄회장의 장녀인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은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다만 재판부는 신 총괄회장이 95세 노령임을 감안해 법정구속 하지는 않았다.
신 회장은 집행유예로 구속을 피하게 돼 경영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지난 10월 롯데의 유통·식품 부문 42개 계열사를 편입한 롯데지주를 창립해 ‘뉴롯데’를 출범시켰다. 올해 초에는 세계에서 6번째, 국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123층짜리 롯데월드드타워를 개장하며 오랜 숙원을 이뤘다.
신 회장은 지난해 검찰 수사 때문에 무산됐던 호텔롯데 상장을 가까운 시일 내에 재추진할 계획이다. 한국 롯데의 중간지주회사 격이자 한일 롯데의 연결고리인 호텔롯데의 상장은 롯데그룹 지배구조 개선의 완성으로 받아들여진다.
▲민주노총 관계자들이 지난달 22일 ‘최저임금 위반 신고센터 설치’를 알리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임금 패러다임 바뀌다…재계 ‘당혹’
최저임금위원회가 7월 15일 2018년 최저임금을 7530원으로 확정하면서 재계의 부담이 커지게 됐다. 이는 2017년 최저임금 6470원보다 16.4% 오른 금액으로 17년 만의 최대 인상 폭이다. 이같은 결과는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을 달성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대선 공약에 따른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과 함께 통상임금 기준도 변했다. 법원은 지난 8월 기아차 노조가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청구 소송에서 정기상여금과 중식비는 정기성·일률성·고정성이 있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인정했다. 이처럼 임금 산정기준이 바뀌면서 노동자들은 임금인상분이 커지게 되는 효과를 얻게 된 반면, 경영주의 비용부담은 늘게 됐다. 재계는 비용증가에 따른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한화그룹이 직영하는 서울 소재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긴 직원들의 모습. (한화그룹 제공)
워라밸·노동시간 단축 ‘핫이슈’
문재인 정부의 ‘사람중심 경제’와 맞물리며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밸’ (Work and Life Balance의 준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재계에서는 금융·유통 대기업을 중심으로 ‘야근 없애기’, ‘유연근무제 도입’, ‘육아 휴직제 확대’ 등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하기 위한 다양한 직원복지가 도입되고 있다
전경련이 최근 조사한 ‘30대 그룹 유연근무제 현황’에 따르면 자산순위 30대 그룹 중 삼성, LG, SK, 롯데, 포스코, 한화, KT, 두산, 신세계, CJ, LS, 대우조선해양, 현대, KCC, 코오롱 등 절반 이상이 워라밸의 대표적인 형태인 ‘유연근무제’와 ‘육아휴직’ 등을 확대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재인 정부는 ‘수출 대기업 지원 중심’의 경제성장 전략을 ‘사람 중심의 소득주도 성장’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에 따라 새해에는 노동시간 단축과 함께 워라밸이 더욱 확산될 전망이다. 다만 노동시간 단축 등으로 인한 임금 조정 문제는 숙제로 남아 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