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3일 열린 6차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촛불로 서울 광화문 광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4월까지 전국 광장에서 ‘촛불’은 스물세 번 명멸했다. 타오르는 민심의 불꽃은 국정을 팽개친 대통령을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그 중심에는 나라를 바로잡고자 거리로 나온 수많은 시민들이 있었다. 성숙한 시민의식은 ‘평화’, ‘청결’로 대표되는 집회를 완성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첫 촛불이 점화된 지 1년을 맞아, 광장을 수놓은 그날의 장면들을 CNB가 되돌아 봤다. (CNB=선명규 기자)
3만이 1700만으로…전세계 감동
‘통신장애 해소’ 이통사 숨은 공신
‘평화·인권’ 민주주의 새역사 창출
2016년 10월 29일, 첫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집회’에는 예상보다 많은 3만여 시민이 참여했다. 3~4000명 수준일거란 당초 추정치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일주일 뒤 열린 2차 집회에 20만명이 참석하더니, 3차에 이르러 100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는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의 70만명을 넘는 최대 규모로 기록됐다. 마지막이자 23차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 4월 29일까지 누적 1700만명이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집회 참여인원이 거듭 폭증하면서 바빠진 건 이동통신사들이었다. 첫 집회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리면서 '카톡', 전화, 문자가 삐걱댔기 때문. 아이를 잃어버리고 발만 동동 구르는 부모, 약속 장소를 찾지 못해 헤매는 사람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이런 현상은 백만인파가 모인 3차 촛불집회까지 이어졌다.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가 이동식 기지국 차량 네댓 대씩을 광화문 주변에 보냈지만 역부족이었다. 문자 메시지 하나를 전송하는 데 5분 넘게 걸리기도 했고, 음성통화는 수시로 먹통이 됐다.
▲통신장애 해소를 위해 이동식 기지국을 설치하는 SK텔레콤·KT·LG유플러스. (사진=연합뉴스)
이통사들은 회차를 거듭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운집하는 시민들에 맞춰 관련 장비들을 광화문 일대에 대거 집결시켜 나갔다.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버벅거리던 통신환경은 4차에서 5차 집회로 넘어가면서 안정을 찾았다. 장비 규모에 더해 트래픽 수용량을 대폭 키운 탓이었다.
SK텔레콤은 이동식 기지국 5대를 배치하면서 4차 집회보다 트래픽 수용량을 4.5배 늘렸다. KT의 경우 이동식 기지국 8대를 파견한 데 더해, LTE·3G 기지국을 두 배 이상 많은 346대를 설치했다. 와이파이 AP도 71대로 대폭 늘렸고, LTE·3G 기지국은 400대를 설치했다. LG유플러스는 광화문 주변에 이동식 기지국 10대를 배치하고, 기지국 75대와 와이파이 AP 13대를 추가 증설해 원활한 이용이 가능하도록 했다.
당시 SNS에는 “지금 광화문인데 이전보다 많은 사람이 많이 모였는데도 통신상태가 좋다” “인터넷 짱짱하다. 현장 상황을 빨리 알리겠다”는 글이 속속 올라왔다.
▲수의 입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형을 촬영하는 시민들(사진=도기천 기자)
불편이 해소되고 시위 인원이 크게 늘면서 ‘풍자의 민족’다운 해학 가득한 패러디들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백미(百媚)는 염원(?)을 담아 만든 결박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형이었다. 성인 남성의 약 1.5배 크기인 이 인형은 박 전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인 올림머리에 잔뜩 찡그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푸른색 수의와 몸을 감싼 포승줄에 시민들은 연신 환호했고, 사진으로 남기기에 바빴다. 그리고 이 장면은 머지않아 현실이 됐다.
‘웃픈(웃기다+슬프다)’ 패러디 글귀들은 민심을 대변했다. “이러려고 국민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1588-순실순실 OK! 대리연설” 등의 문구가 적힌 포스터가 시위현장 곳곳에 내걸렸다. 무거운 집회 분위기는 점차 국민들의 목소리로 채워지는 축제의 장이 되어갔다.
▲집회현장에 등장한 풍자가 담긴 문구, 퍼포먼스들은 숱한 화제를 남겼다.(사진=도기천 기자)
ICT기술이 접목된 최첨단 시위도구들도 화제가 됐다. 칼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LED촛불’, 대형 공연장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전자 피켓’ 등이 어두운 거리를 밝혔다.
장비를 미처 준비하지 못한 시민들은 스마트폰 ‘촛불앱’을 다운로드 받아 활용했다.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다양한 모양의 불꽃을 화면에 띄웠고, 직접 문장을 입력해 전광판처럼 이용하기도 했다. 스마트폰이 발산하는 빛은 실제 촛불 보다 밝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온라인에서는 ‘박근핵닷컴’이 관심사였다. 지난해 12월 2일 등장한 이 사이트는 시민들이 자신의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이메일을 보내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요청하고 답변을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해당 의원이 답변을 하면 찬반에 따라 녹색과 적색으로 표기돼 그래픽으로 노출돼 한 눈에 볼 수 있게 했다. ‘박근핵닷컴’은 개설 닷새 만에 이용자 100만명을 돌파할 정도로 뜨거운 감자가 됐다.
▲LED 피켓을 들고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 모습(사진=도기천 기자)
시위 과정에서 돋보인 성숙한 시민의식은 주요 외신을 타고 알려지며 ‘국격’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가두 행진을 벌이며 쓰레기를 줍는 시민들과 한 데 모인 쓰레기봉투들을 외신들은 집중 보도했다. 수백만 명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깨끗한 거리는 국내외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부상자와 연행자가 거의 없는 ‘평화집회’란 점도 화젯거리였다. 시위 도중 과격한 언사가 들리거나 경찰을 위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너나할 것 없이 나서서 자제시켰다. 집회 현장에서 간혹 볼 수 있었던 불미스러운 폭력사태는 전혀 없었다. 일부 보수단체들이 ‘폭력적인 장면’을 '카톡'으로 퍼트리기도 했지만, 전부 조작됐거나 다른 집회 사진으로 밝혀졌다.
▲지난해 12월 촛불집회에서 한 어린이가 경찰버스에 평화집회를 상징하는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사진=도기천 기자)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평화시위의 새역사를 썼다는 평가를 받은 촛불집회는 다시금 조명 받고 있다. 지난 16일 독일의 권위 있는 인권상을 수여하는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이 당시 집회에 참여한 모든 한국 국민들에게 ‘2017년 인권상’을 주기로 했다고 발표했는데, 특정 국가 국민이 이 상을 받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나라 안팎에서 주목받고 있다.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민주적 참여권의 평화적 행사와 평화 집회의 자유는 생동하는 민주주의의 필수적 요소”라면서 “대한민국의 촛불집회가 이 중요한 사실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고 시상 이유를 밝혔다. 인권상 시상식은 오는 12월 5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며, 1700만 촛불 시민을 대신해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이 참석할 예정이다.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