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텔레콤이 ‘11번가’ 매각을 사실상 백지화 하면서 유통업계가 출렁이고 있다. 11번가를 인수해 단숨에 전자상거래 시장의 판도를 바꾸겠다는 롯데와 신세계의 계획이 원점으로 돌아가면서, 온라인쇼핑몰 업계는 일단 안도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재무적 투자 유치, 11번가가 주도하는 인수합병 등은 여전히 가능한 상황이다. 11번가의 앞날은 어찌될까. (CNB=도기천 기자)
SK텔레콤 ‘경영권 매각→투자유치’로 선회
인공지능·사물인터넷→‘전자상거래’에 접목
“98% 지분은 너무 많아” 일부 매각 가능성
“경영권 매각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재무적 투자 유치는 여러 기업들과 협의하고 있다”(18일 SK플래닛 관계자)
‘11번가(11st)’의 경영권 매각 협상은 결렬 됐지만, 일부 지분의 매각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있다. 11번가의 운명을 점치려면 우선 이 회사의 지분과 매출구조를 들여다 봐야한다.
11번가는 2008년 2월 사업을 시작한 오픈 마켓으로 SK텔레콤이 98.1% 지분을 가진 SK플래닛이 운영하고 있다. 사실상 SK텔레콤의 손에 11번가의 앞날이 달려있다.
11번가의 정확한 실적은 알려진 바 없다. 지난 7월 이례적으로 올 상반기 11번가 거래액이 4조2000억원으로 전년 동기대비 10% 늘어났다고 밝혔지만 이는 거래액을 밝힌 것일 뿐, 실적을 가늠할 수 있는 영업이익과는 상관이 없다.
SK플래닛은 지난 2013년 이후 영업기밀 유지를 이유로 자세한 실적으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간 11번가 실적은 SK플래닛의 모회사인 SK텔레콤 실적발표와 관련업계의 시장상황을 통해 대략 가늠할 수 있었다. SK플래닛은 지난해 3652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는데 그 중 절반인 1800억원 가량이 11번가의 적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전자상거래 시장은 최근 5년간 2배 이상 성장하는 등 거래액에 있어서는 ‘규모의 경제’를 자랑하고 있지만 실속은 그다지 없는 편이다. 옥션·G마켓을 운영하는 업계 1위 이베이코리아만 흑자를 내고 있고, 2위 그룹인 쿠팡·11번가·티켓몬스터·위메프는 매년 수천억원 대의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여기에다 11번가의 모기업인 SK텔레콤은 5G 등 고정적인 투자는 계속되는 가운데 정부의 요금 인하 조치로 위기를 맞고 있다. 올 2분기 자회사 실적이 개선되면서 형편이 나아지긴 했지만, 실적 개선을 이룬 자회사를 제외한 별도 기준으로 보면 6분기 만에 영업이익이 감소했다. 매출 역시 전년 대비 0.7% 수준으로 사실상 제자리걸음이다.
▲박정호 SK텔레콤 사장이 올 3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경영권 방어하며 38%지분 매각?
이런 상황이다 보니 SK텔레콤이 굳이 98.1%의 지분을 고수할 이유는 없다. 상법상 지분율이 절반(50%) 이상이면 지배경영권 갖는다. 38% 정도를 처분해도 경영권 방어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얘기다.
실제로 SK는 그간 11번가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여러 차례 투자 유치를 시도해왔다.
2015년 소프트뱅크에 지분 20%를 팔아 1조1000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한 쿠팡 사례를 롤모델로 삼아 지난해 BoA 메릴린치 주관으로 최대 1조원 규모의 투자 유치를 추진했지만 좌절됐다. 중국 민생투자유한공사와 진행했던 투자 논의도 올해 초 좌초됐다.
이후에는 롯데 및 신세계와 지분매각 협상을 벌였지만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했다. SK는 신세계 또는 롯데에 지분 일부를 매각하고 자금을 수혈 받아 11번가를 이베이에 버금가는 온라인쇼핑 전문기업으로 키운다는 전략을 세우고 지난 4월부터 두 기업과 각각 협상팀을 꾸려 협의를 진행해 왔지만 서로 간에 이견을 좁히지 못해 최근 협상이 무산됐다.
롯데와 신세계는 11번가를 별도 법인으로 떼어내 합작사를 설립하고 최대주주를 자신들이 맡는다는 전제로 협상에 임했지만, SK는 양사로부터 지분투자 만을 받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롯데·신세계는 경영권을 넘겨받지 않는 재무적 투자는 의미가 없다고 결론 내렸고 협상은 결렬됐다.
신세계는 현재 온라인몰 ‘SSG닷컴’을 운영하지만 여전히 거래액이 제자리걸음인 상황이다. 롯데는 온라인사업이 롯데닷컴 롯데백화점 롯데마트 롯데홈쇼핑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시너지를 내지 못하고 있다. 두 회사 모두 11번가가 절실한 이유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최근 복합쇼핑몰 스타필드 고양의 그랜드오픈 행사에서 “온라인 강화를 위한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그 중 11번가 인수가 있다”며 대놓고 11번가를 거론하기도 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맨 왼쪽)은 아마존의 성장세를 보고 11번가의 경영권을 지키는 쪽으로 마음을 바꾼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7월 청와대에서 열린 주요기업인과의 간담회에서 최 회장이 문재인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가운데는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사진=연합뉴스)
아마존에 자극받은 최태원 회장 마음 바꿔
이런 여러 상황들로 볼 때, SK는 앞으로도 경영권이 위협받지 않는 전제 하에 지분매각은 계속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계열사를 통한 자금지원은 자칫 배임 논란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투자유치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고 수익만을 목적으로 투자하는 재무적투자자 입장에서는 11번가의 실적 개선이 우선 돼야 한다. 적자가 획기적으로 줄어들지 않는다면 과거처럼 투자유치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 SK플래닛은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특히 그룹차원의 시너지 창출에 거는 기대가 크다. 11번가는 모바일 채팅을 통해 고객이 찾는 맞춤 상품을 추천하는 서비스에 주력하고 있는데, 이는 SK텔레콤이 추구하는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분야와 맞아 떨어진다.
SK플래닛 관계자는 CNB에 “모바일 이용자의 상거래 유형을 빅데이터화 해서 로봇이 고객이 원하는 상품을 추천해주는 시스템이 전자상거래의 핵심 요건으로 부상하고 있는데, SK텔레콤의 기술력이 11번가와 접목하면 충분히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를테면 고객이 모바일을 통해 ‘텐트 구매’라고 입력하면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평소 고객의 구매취향을 빅데이터로 분석해 ‘3인용 자동 텐트’를 추천해주는 식이다.
▲중국 전자상거래 1위 기업인 알리바바의 창업주 마윈 회장. (사진=연합뉴스)
최태원 SK 회장이 11번가에 거는 기대도 크다. SK는 애초 11번가를 완전 매각하는 방안도 염두에 뒀으나, 최근 아마존, 알리바바 등 글로벌 전자상거래 업체들의 무서운 성장세를 본 최 회장의 인식 변화로 경영권은 유지하되 지분 일부만 매각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대표적인 온라인쇼핑몰인 아마존은 1위 오프라인 매장인 월마트를 압도하고 있으며,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는 매년 급성장을 이어가며 시가총액(4198억 달러)이 아마존(4614억 달러)의 턱밑까지 왔다.
SK플래닛 관계자는 “작년에 대규모 적자가 난 것은 원활한 배송을 위한 물류센터의 확장, 인공지능 대화형 커머스(챗봇서비스) 개발, 마케팅 비용 증가 등에 따른 계획된 적자였다”며 “지금은 인프라가 거의 다 구축됐기 때문에 앞으로는 계속 실적이 나아질 것”이라고 밝혔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