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뇌물공여 혐의로 재판 중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왼쪽)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부는 지난 25일 열린 이재용 부회장의 1심 선고에서 미르·K스포츠 재단에 대한 자금출연 부분을 무죄로 판단했다. (사진=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49)의 뇌물죄 재판에서 가장 눈에 띈 대목은 법원이 최순실씨가 실소유주인 미르·K스포츠 재단에 대한 자금출연 부분을 무죄로 판단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최씨 재단에 기부한 여러 대기업들이 사실상 면죄부를 받게 됐다. 뇌물공여 혐의로 기소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재판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법원이 재벌의 손을 들어 준 배경은 뭘까. (CNB=도기천 기자)
“강압 때문에 청탁” 뇌물죄 성립 안돼
헌재·법원 모두 ‘사실상 기업이 피해자’
“정경유착에 ‘면죄부’ 준 셈” 지적도
법원은 지난 25일 이재용 부회장이 최씨의 딸 정유라에게 승마 지원과 영재센터를 후원한 점을 뇌물공여로 판단, 이 부회장에게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삼성이 최씨 측을 지원한 대가로 청와대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국민연금을 통해 도움을 줬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최씨가 설립한 미르·K스포츠 재단에 돈을 낸 부분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이는 최씨가 박근혜 전 대통령과 경제공동체라는 점에서, 대기업들의 최씨 재단 지원이 곧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청탁 행위라는 특검의 기소내용과 배치된다.
재판부는 “재단이 최서원(최순실의 개명이름)의 사익 추구수단인줄 알았다고 볼 만한 사정이 없는데다, 전경련의 가이드라인(기업별 분담비율)에 따라 수동적으로 출연했다는 점에서 기업들이 적극적·능동적 의사결정을 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특히 자금출연이 청와대 경제수석실의 주도로 강압적으로 이뤄졌으며, 박 전 대통령의 재단 지원요구가 구체적이고 직접적이지 않았다는 점 등을 뇌물로 판단하지 않은 근거로 들었다.
이는 지난 3월 헌법재판소가 박 전 대통령 탄핵을 가결할 당시의 판결 내용과도 맥을 같이한다. 당시 헌재는 결정문에서 박 대통령의 행위를 ‘직권남용’으로 명시하면서도 뇌물혐의에 대한 판단은 내놓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이 최씨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미르·K스포츠재단을 설립해 기업들로부터 자금을 거둔 행위를 대통령 지위를 남용한 헌법 위배 행위로 봤다.
헌재는 판결문에서 “피청구인(박근혜)의 행위는 기업의 재산권을 침해하였을 뿐 아니라, 기업경영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밝혔다. 기업을 피의자가 아닌 사실상 피해자로 규정한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왼쪽)과 최순실씨의 최근 재판 중인 모습. (사진=연합뉴스)
최순실재단 출연금 뇌물 아니다?
법원의 이번 판단은 그간의 특검과 검찰 수사결과로 볼 때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다.
지난해 11월 박영수 전 서울고검장이 특별검사에 임명되면서 시작된 ‘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 수사 때 뇌물공여 혐의로 이름이 오르내린 기업은 한둘이 아니었다.
박 전 대통령은 2015년 7월과 2016년 초에 걸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김창근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허창수 GS그룹 회장(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 10개 그룹 총수들과 독대했다.
면담 직후 기업들은 약속이나 한 듯 최씨가 실소유주인 미르·K스포츠재단에 수억~수십억원의 자금을 각자 출연했다. 이 기간 중에 돈을 낸 곳은 이들을 포함해 19개 그룹(53개 계열사)에 이른다. 삼성 204억, 현대차 128억, SK 111억, LG 78억, 포스코 49억, 롯데 45억, GS 42억, 한화 25억, KT 18억, LS 16억, CJ 13억, 두산 11억, 한진 10억, 금호아시아나 7억, 대림 6억, 신세계 5억, 아모레퍼시픽 3억, 부영 3억 등 모두 합쳐 774억원에 달했다.
이런 점에서 특검은 청와대와 기업들 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삼성은 정유라에 대한 승마지원 등으로 기소되면서 최씨 재단에 출연한 204억 전액이 뇌물로 간주 됐다. SK와 CJ는 각각 최태원 회장과 이재현 회장이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는 점에서 의심받았고, 롯데그룹은 면세점 사업 허가와 관련된 특혜 의혹을 받았다. 포스코, KT, 한진, 부영 등도 최씨 측과 관련된 각종 루머로 곤욕을 치렀다. 재계에서는 “최순실과 옷깃만 스쳐도 죄가 된다”는 웃지못할 얘기가 돌았다.

▲미르·K스포츠 재단에 대한 자금을 출연한 기업들 대부분은 기소되지 않았거나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래픽=연합뉴스)
변죽만 울린 특검…실패한 ‘기획’
하지만 이들 기업의 혐의는 대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거나 증거 불충분으로 수사가 마무리됐다.
삼성과 롯데만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롯데는 K스포츠재단에 ‘하남시 복합체육시설 건립’ 명목으로 70억원을 추가로 지원했다가 검찰의 압수수색 직전에 돈을 돌려받은 혐의다. 검찰은 이 돈이 면세점 허가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지만, 최근 감사원의 관세청(면세점 허가권자) 감사결과 롯데는 오히려 입찰 과정에서 부당하게 탈락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처럼 사법당국이 기업들의 재단출연금을 부정청탁으로 규정하지 못한 것은 뇌물죄의 특성상 실체를 밝히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뇌물죄는 ‘받은 사람과 준 사람’ 모두 처벌하는 쌍벌죄다.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2조 ‘뇌물죄의 가중처벌’에 따라 수뢰액이 1억원 이상인 경우에는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는 중범죄다.
뇌물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부정한 청탁이 있었는 지와 그 대가로 실제 돈이 지급(또는 지급약속) 됐는지가 모두 성립해야 한다.
이에 대해 재계는 하나같이 청와대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돈을 냈다고 주장해왔다. 검찰 수사에서는 청와대가 기업들에게 먼저 접근해 압력을 행사했고, 일부 기업은 이 과정에서 민원을 제기한 것으로 밝혀졌다.
SK의 경우 청와대로부터 K스포츠재단에 추가로 자금을 출연해줄 것으로 요구받고 박 전 대통령에게 면세점 특허사업자 선정 및 CJ헬로비전 인수과정에 도움을 달라는 민원을 제기했다. 이후 실무선에서 논의 하다가 결국 돈을 내지 않았다. 검찰은 실제 자금이 오가지 않았고 청와대가 먼저 압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SK를 기소하지 않았다.
CJ 등 다른 기업들도 박 전 대통령과 독대 자리에서 기업의 에로사항을 전했지만, 이를 청탁으로 보기는 어려워 수사를 종결했다. 한마디로 재단출연금과 민원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히지 못한 것이다.
김재식 변호사(법무법인 에이펙스)는 CNB에 “뇌물죄는 청탁의 결과(특혜)가 실행되지 않았더라도 행위만으로 처벌이 가능하지만 서로 간에 구두로 (특혜와 금품을) 약속한 부분은 입증하기가 매우 어렵다. 설령 약속한 사실이 증명되더라도 실제 뇌물을 수수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죄가 크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법원이 미르·K스포츠 재단에 대한 자금출연 부분을 무죄로 판단한 것과 관련해 “정경유착에 ‘면죄부’를 준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이 28일 삼성 판결과 관련한 긴급좌담회를 열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수십년간 드리운 정경유착 그림자
이는 과거 정권에서 있었던 기업들의 정치자금 출연과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재계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통해 소위 ‘통치자금’을 모금했고 이로 인해 총수들이 법정에 섰지만 그때도 돈의 성격이 ‘뇌물’로 규정되지는 않았다.
실제로 80년대 대기업들은 전두환 정권의 자금줄(일해재단) 역할을 해왔으며, 1995년에는 전두환·노태우의 대선 비자금 사건에 휘말려 검찰 수사를 받았다. 1997년 15대 대선 때는 23개 대기업이 166억원의 정치자금을 낸 사실이 알려져 도마에 올랐다. 2002년 대선 때는 전경련 주도 하에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자유한국당의 전신) 대선 후보 측에 823억원을 보냈다.
하지만 뇌물죄로 처벌받은 기업총수는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권의 강압 앞에 기업들이 어쩔 수 없이 돈을 냈다는 점이 고려된 것이다.
김 변호사는 “삼성 재판으로만 본다면 기업들이 사실상 피해자 입장이 된 만큼, 상대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는 (미르·K재단 출연금에 대해) 직권남용죄가 적용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면서도 “하지만 이는 뇌물죄의 법리적 해석일 뿐이며,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경유착 문제는 우리사회가 별개로 공론화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