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주요기업인들의 간담회 모습. (왼쪽부터)최태원 SK그룹 회장,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문재인 대통령, 허창수 GS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사진=청와대)
여름휴가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가운데 대부분 재계 총수들은 휴가지가 아닌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청와대 간담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주문한 ‘일자리 창출’과 ‘상생 협력’을 놓고 실천전략을 고민하고 있으며, 기업의 생존을 담보할 미래 성장동력에 대해서도 구상 중이다. 그룹별로 산적한 현안의 대응책 마련에도 마음이 급하다. (CNB=도기천 기자)
총수들, 새정부 코드맞추기 지상과제
일자리·상생·미래동력 등 숙제 산더미
휴가 ‘반납’…자택에서 경영구상 ‘올인’
대부분 기업들은 지난달 말을 전후해 일제히 여름휴가에 돌입했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2주간 휴식이 주어진다.
하지만 올해도 회장님들의 마음은 편치 못하다. ‘갑 횡포’ 논란으로 여러 기업의 오너들이 공정거래위원회나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상황인데다, 미국의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요구,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조치로 인해 경제 피해 등 나라 안팎으로 과제가 쌓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문재인 정부는 사실상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수출대기업 지원 중심’의 성장 전략을 ‘사람 중심’으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정부→대기업→중소·벤처’ 순으로 내려가는 수직적 구조의 산업생태계를 ‘사람(노동자)’을 중심에 두는 쪽으로 급속히 재편하고 있다. 일자리 안정 등 삶의 질을 높여 경제를 선순환 시키겠다는 것.
이를 위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양질의 일자리 창출, 고용안정, 최저임금제 보장, 본사의 횡포로부터 가맹점 보호, 대기업과 골목상권의 상생 등을 국정운영의 우선 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이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10년간 유지돼온 노동시장 유연화 기조를 전면 수정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총수들은 이런 급변하는 산업환경에 맞춰 사고의 대전환을 이뤄야한다. 이들에게 이번 여름휴가는 ‘문재인표 사람경제’에 대해 기업별로 해답을 제시해야 하는 ‘숙제 풀기’ 시즌이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해 8월 기아차 유럽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정 회장은 매년 휴가철 마다 현지공장 방문하거나 자택에서 경영구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진=현대차)
현대차 안팎으로 ‘위기’…힘든 여름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난달 31일부터 주요 계열사의 휴가가 시작되면서 현재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정 회장이 당장 풀어야할 과제는 상당히 많다. 사실상 그룹 전체가 위기 상황이기 때문.
현대기아차는 올해초 전년 대비 4.7% 성장한 825만대의 판매목표를 내놓았지만, 상반기에 351만8566대를 판매하는 데 그쳤다. 이대로라면 목표 달성은커녕 전년과 비교해서도 판매량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다. 중국정부의 사드 보복이 계속되면서 하반기에도 중국시장에서의 실적 회복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
미국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 견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경쟁업체들과의 힘겨운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친환경차, 자율주행차 등 미래자동차산업을 놓고도 글로벌경쟁업체들과 치열한 신경전이 펼쳐지고 있다. 자칫 트렌드에 뒤쳐질 경우 한국 자동차산업 전체가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정부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 고용의 질을 높여줄 것을 주문하고 있는 점도 부담이다. 실적 악화가 계속되면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물론이고 신규 채용도 버거운 상황이다. 여기에다 노조는 최근 파업 찬반투표를 가결했으며 조만간 파업에 들어갈 태세다.
정 회장에게 이번 여름휴가는 이런 복잡한 안팎의 상황들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를 장고(長考)하는 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최길선 현대중공업 회장에게도 이번 여름은 절체절명의 시간이다. 현대중공업그룹 계열사들은 올해 들어 모두 81척, 45억달러어치의 수주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작년 같은 기간(16척, 17억달러)과 비교해 크게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조선산업의 특성상 늘어난 수주가 실제 매출과 영업이익으로 나타나려면 최소 1~2년은 걸린다. 올해 수주한 물량의 대금 결제가 2~3년에 걸쳐 진행되기 때문. 이런 탓에 올해 매출과 영업이익은 1년 전보다 10% 이상 뒷걸음질 쳤다. 작년까지만 해도 수주 절벽이 계속돼온 탓이다.
최 회장은 문 대통령과의 간담회 때도 어려운 상황을 거듭 설명하며 정부의 협조를 구했다. 문 대통령은 “힘내라”며 다른 총수들과 함께 박수로 응원했다. 희망퇴직과 원가절감, 자산매각 등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있는 현대중공업은 2019년을 터닝포인트로 삼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 회장에게 휴가란 언감생심이다. 최 회장은 작년 휴가 기간 때도 중동과 유럽 등 공사현장을 오가며 시간을 보냈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재계의 맏형 역할을 했던 전경련의 기능이 대한상의로 넘어오면서 바쁜 여름을 보내고 있다. 지난달 27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주요기업인들의 호프미팅에서 문 대통령과 박 회장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최태원·박용만, 누구보다 바쁜 휴가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2015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뒤 지난 2년간 재계 총수들 중 가장 활발한 경영행보를 펼치고 있다. 그에게 ‘휴가’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올해 들어서만 일본 도시바 인수전 참여, 미국 GE·콘티넨탈리소스와 셰일가스 개발 협력 제휴, 중국 톈진시 정부와 투자 협력 방안 논의 등 숨가쁜 일정을 소화해냈다. 현재 최 회장은 자택과 회사를 오가며 하반기 일정을 구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그룹의 가장 큰 이슈는 낸드플래시 부문 세계 2위의 기술력을 갖고 있는 도시바 인수를 마무리하는 것. 미국, 일본 기업과 컨소시엄이 구성돼 인수를 추진하고 있는 만큼 치밀한 전략이 요구되고 있다.
여기에다 문재인 정부가 요구하고 있는 일자리 창출과 고용안정에도 답해야 한다. 우선 하반기에 기존 목표보다 더 많은 채용을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장기적으로 최 회장은 ‘10만 사회적 기업 창업’을 목표로 삼고 있다. 10년 안에 우리나라 사회적 기업 시장 규모를 국내총생산(GDP)의 3% 수준으로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최근 청와대 간담회 때 이런 뜻을 전했고, 문 대통령은 “지원 법안을 정부가 적극 추진하겠다”고 그 자리에서 답했다.
상생과 사람중심을 국정철학으로 갖고 있는 문재인 정부와 최 회장의 평소 지론인 ‘사회적 경제’는 코드가 잘 맞아 보인다. 최 회장의 여름휴가는 이를 구체화하는 전략을 세우는 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두산그룹 회장직을 조카인 박정원 회장에게 물려준 뒤 두산인프라코어를 이끌고 있는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역시 바쁜 여름을 보내고 있다. 재계의 맏형 역할을 했던 전국경제인연합회의 기능이 사실상 대한상의로 넘어오면서 행보가 크게 넓혀졌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 방미 경제인단을 선별했으며, 청와대 간담회 때는 재계 참석자를 조율하는 등 굵직한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존재감이 크게 부각됐다. 휴가철인 지금도 세법개정 등 재계 현안을 놓고 정부의 경제 수장들과 머리를 맞대고 있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2011년부터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는데 역할이 크게 축소된 상태다. 허 회장이 지난달 26일 열린 ‘전경련 CEO 하계포럼’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전경련)
대부분 ‘정중동(靜中動) 휴가’ 중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자택에서 가족들과 휴식을 취하며 경영 전략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LG전자는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loT) 등 4차산업혁명을 착실하게 준비하며 글로벌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구 회장이 휴가 뒤 그룹의 지속 성장을 위해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 주목되고 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주력인 항공산업이 성수기를 맞는 때라 예년과 같이 정상 근무하고 있다. 핵심 계열사인 대한항공은 매년 휴가철마다 비상근무체제에 들어간다. 임직원들의 휴가는 연중 분산돼 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등도 특별한 휴가계획 없이 자택에 머물면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편 휴가 기간이 더 고통스런 오너들도 있다. 롯데는 현재 총수 일가의 경영권 분쟁이 탈세·횡령 재판으로 번진데다,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재판 중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에게 휴가는 먼 나라 얘기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에게도 이번 여름은 힘든 시기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최순실씨 소유 재단의 모금을 주도하다 정경유착의 근원으로 지목돼 대부분 기능이 중소·중견기업이 주축이 된 대한상의로 넘어간 상태다. 허 회장은 2011년부터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는데 이번 청와대 간담회, 대통령 방미 등에서 역할이 전혀 없었다. 허 회장의 이번 여름휴가는 구겨진 자존심을 어떻게 회복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재계 한 고위관계자는 CNB에 “문재인 정부의 사람중심 경제가 선포된 지 며칠 만에 맞이하는 여름휴가다보니 당연히 총수들의 고민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일자리와 소득을 늘려 경제를 선순환 시키겠다는 정부 구상을 어떻게 잘 활용해서 서로 윈윈할 것인지가 이번 휴가철의 최대 숙제”라고 말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