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면세점 대주주인 김기병 롯데관광개발 회장이 호텔신라에 담보로 맡긴 동화면세점 주식을 되찾아오지 않아 구설수에 올랐다.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사진=연합뉴스)
김기병 롯데관광개발 회장이 호텔신라로부터 자금을 빌리며 담보로 잡힌 동화면세점 주식을 사실상 포기하면서 44년 역사의 동화면세점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채권자인 호텔신라는 주식이 아닌 현금으로 갚으라며 소송에 나선 상태다. 한때 잘나가던 서울 1호 면세점이 왜 이런 신세가 된 걸까. (CNB=도기천 기자)
동화면세점 경영권 서로 안가지려 소송
호텔신라 vs 김 회장, “지분 너가 가져”
면세점 우후죽순 포화상태…황금알 옛말
면세점 사업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서 ‘계륵’ 신세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호텔신라와 김기병 회장 간의 소송전이다.
호텔신라는 지난 4월 김 회장을 상대로 주식매매대금 청구소송을 낸 데 이어, 최근 김 회장이 보유 중인 롯데관광개발 주식에 대한 채권 가압류를 신청했다. 법원은 이를 일부 받아들여 김 회장의 롯데관광개발 지분 1700억원 중 절반가량을 압류조치 했다.
양측의 분쟁은 4년 전 김 회장이 호텔신라로부터 자금을 끌어오면서 비롯됐다. 김 회장은 지난 2013년 동화면세점 주식 19.9%(35만8200주)를 호텔신라에 600억원에 매각하면서 계약 체결일로부터 3년이 지난 후 호텔신라가 풋옵션(매도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풋옵션은 특정 시기에 주식을 미리 정한 가격으로 팔 수 있는 권리다. 호텔신라는 김 회장이 풋옵션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김 회장의 동화면세점 주식 30.2%를 담보 설정했다.
이후 날짜가 도래하자 호텔신라는 예정대로 풋옵션을 행사했다. 이때가 작년 6월경이다.
▲신세계면세점 명동점에서 쇼핑 중인 중국인 관광객들. (사진=김유림 기자)
하지만 김 회장은 주식 재인수 여건이 안된다며 담보 설정된 주식 30.2%를 가져가라고 대응했다.
호텔신라는 ‘주식이 아닌 현금으로 갚으라’며 재차 채무 상환을 요구했고, 김 회장이 거부하자 소송과 가압류를 진행했다.
호텔신라 관계자는 CNB에 “담보는 원칙적으로 채무자가 돈을 갚을 능력이 안 될 때 가져가는 것”이라며 “김 회장은 충분한 변제 능력이 있으면서도 담보물을 떠안으라고 하기에 소송을 진행하게 됐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부인 신정희씨(21.58%), 아들 김한성씨(7.92%)의 주식을 포함해 약 71%의 동화면세점 지분을 갖고 있다. 이를 현금으로 환산하면 6000억원이 넘는다. 김 회장이 호텔신라에 돈을 갚으려고 한다면 주식을 팔아서 충분히 갚을 수 있는 상황이다.
만약 호텔신라가 기존에 매입한 주식 19.9%에 담보 주식을 추가로 취득하면 동화면세점의 50.1%를 소유한 최대주주가 된다. 상법상 지분율이 절반(50%) 이상이면 지배경영권 갖는다. 애초 50.1%에 계약조건을 맞춘 것도 김 회장이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면 동화면세점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경고의 의미로 읽힌다.
따라서 김 회장 입장에서는 풋옵션을 받아들여야만 경영권을 지킬 수 있음에도 이를 거부했다는 것은 동화면세점을 사실상 매각 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과거에도 호텔신라 측에 경영권을 넘기고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다. 이후 업계에서는 호텔신라가 동화면세점을 가져갈 것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이번 사태는 결과적으로 양측이 서로 경영권을 떠넘기려는 모양새가 됐다. 재계에서는 이를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로 보고 있다.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한 송사들은 수도 없이 있었지만, 경영권을 서로 가져가라고 재판을 벌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HDC신라면세점과 한화갤러리아면세점이 각각 입점해 있는 용산 아이파크몰(사진 위)과 여의도 63빌딩. (사진=CNB포토뱅크)
‘사드 한파’ 비상경영 돌입
이렇게 된 이유는 면세점업계의 추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정부는 유커(중국단체관광객)를 비롯한 한국을 찾는 외국인 여행객이 급증하자 최근 몇 년 새 신규면세점을 크게 늘렸다. 관세청 규정에 따르면 광역시의 외국관광객 수가 전년 대비 30만명 이상 증가하면 신규 면세점을 허가할 수 있다.
관세청은 2015년에만 한화갤러리아, HDC신라, 두산, 신세계, SM(하나투어) 등 서울시내 신규사업자 5곳을 선정했다. 작년에는 현대백화점그룹, 신세계면세점(센트럴시티), 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 등 4곳을 추가로 허가해줬다. 현재 서울에서만 11개의 면세점이 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올해 안에 2곳이 새로 문을 연다. 국내 면세점 수는 계속 늘어나 3~4년 전에 비해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하지만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등으로 경영 환경은 크게 악화된 상태다.
동화면세점의 경우 지난해 124억원의 영업적자를 냈다. 1979년 문을 연 이후 수십년 간 흑자 기조를 유지해 왔지만 최근 몇 년 새 실적악화가 계속되면서 루이비통, 구찌 등 명품브랜드들이 철수한 상태다.
면세점업계 1위인 롯데면세점도 사정이 좋지 않다. 지난 4월 이후 중국인 매출이 작년 같은 기간보다 40%가량 줄면서 전체 매출도 약 25% 감소했다.
단체관광객 비중이 높은 신규면세점들은 타격이 더 심하다. 국내 최초 심야면세점을 내세우며 일부 매장을 오전 2시까지 영업하던 두타면세점은 최근 문 닫는 시각을 밤 11시까지로 앞당기고 매장 면적도 줄였다.
SM면세점은 애초 지하 1층부터 지상 5층까지 6개층 매장을 운영했지만 2개층을 줄여 지상 1∼4층만 면세점으로 쓰고 있다.
한화갤러리아는 면세점사업 적자로 비상경영 중이다. 올해 1월부터 임원은 연봉 10%를 자진 반납했으며, 2월부터는 부장과 차장급 등 중간관리자들이 상여금 100% 자진반납에 들어갔다.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면세점 DF3 구역 사업자 선정 입찰은 세 번째, 네 번째 입찰에서 10%씩 임대료를 낮췄지만 또다시 유찰됐다.
▲난 3월 중국정부가 사드배치에 대한 보복으로 한한령(限韓令)을 내린 직후 중국의 한 슈퍼마켓에서 직원이 롯데제과 제품을 회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악재만 가득…소송 예견된 일
면세점업계는 동남아 고객 유치와 해외시장 진출 등 자구책 마련에 나서고 있지만,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던 중국인 공백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으로 대기업에 대한 규제가 강해질 것이라는 전망도 면세점 사업을 꺼리는 배경이 되고 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골목상권 보호가 강조되면서 재벌의 면세점 경영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
국회에는 독과점을 막기 위해 면세점 특허 심사 시 시장지배적 사업자에게 감점을 주는 법안, 면세점도 대형마트와 같이 영업시간을 제한하고 의무휴업을 실시하는 법안 등이 발의된 상태다. 기획재정부는 최근 면세점 특허수수료율을 현행 매출액 대비 0.05%에서 매출액 규모별 0.1∼1.0%로 최대 20배 인상하는 관세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이번 동화면세점 지분을 둘러싼 소송전은 이미 예견된 일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동화면세점이 중소기업으로 분류돼 있어 현행법상 대기업인 호텔신라가 이 회사를 경영지배할 순 없다. 하지만 면세점이 호황을 누릴 때라면 지분을 재매각하거나 재무적 투자자로 참여하는 등 여러 방안이 고려됐을 수 있다. 호텔신라가 소송이라는 극단적인 카드를 택한 것은 그만큼 면세업 사업의 앞날이 어둡기 때문이다.
이번 재판을 바라보는 업계의 심경은 착잡하다. 한 대형면세점 관계자는 “한때 황금알 낳는 거위로 불렸던 동화면세점이 어쩌다가 서로 떠안지 않으려는 지경에까지 왔는지 모르겠다”며 “가뜩이나 사드 사태로 어려운데 특허수수료 인상 등 악재만 가득하다”고 토로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