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사임했거나 재판을 받고 있는 문화예술계 고위 인사들. (왼쪽부터)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박명진 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문예위)가 기금 지원규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예산을 집행하다 문체부로부터 정정 요구를 받은 사실을 CNB가 단독확인 했다. 언론사에는 문예진흥기금을 지원할 수 없다는 원칙을 어기고 공연행사까지 지원한 것으로 밝혀졌다. 가뜩이나 박명진 문예위 위원장이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해 최근 사임한 상태라 이번 일을 두고 의혹이 커지고 있다. (CNB=도기천 기자)
문예진흥기금 규정에 ‘언론사’ 제외
공연행사까지 후원…김영란법 논란
문화계 “제2의 블랙리스트 같은 일”
문예위의 문예진흥기금 신청자격에 따르면, ‘언론사 및 언론사 소속의 단체’는 제외(부적격자) 된다. 기금 지원을 순수민간 분야에 한정하기 위한 취지다.
언론중재법 제2조에 명시된 ‘언론사의 범위’는 방송사업자, 신문사업자, 잡지 등 정기간행물사업자, 뉴스통신사업자 및 인터넷신문사업자다.
하지만 CNB 취재 결과, 문예위는 정기간행물사업자로서 매월 잡지를 발간하고 있는 언론사 10여 곳을 해마다 수천~수억원씩 지원하고 있었다.
문예위의 지원항목은 크게 문학지원과 공연지원으로 나뉜다. 문학지원은 문예집·비평집 등 출판물 발간을 돕는 사업이다. 공연지원은 연극·예술제·페스티벌 등을 지원하는 분야다. 문예위는 매년 2천억원 이상의 정부 예산을 집행하고 있다.
문체부는 이와 관련, “문예위가 자체적으로 판단할 사항”이라며 답변을 피하다 감사원이 문예위에 대한 감사에 나서자 지난 16일 뒤늦게 문예위에 ‘언론사 범주를 명확히 하라’고 시정 요청했다.
CNB가 단독입수한 문체부가 문예위에 보낸 공문에는 “문예위는 언론사 적용범위에 대한 명확한 규정 없이 신문사·방송사 등은 지원을 제외하고, 언론사로 분류될 수 있는 비평지·문예지 등은 지원해 옴에 따라, 자의적 해석 논란의 소지가 있으므로 언론사의 적용범위에 대하여 추가 세부규정이 필요하다”고 명시돼 있었다. 그동안 잘못이 있었음을 자인한 셈이다.
▲‘언론사 및 언론사 소속의 단체’는 문예진흥기금 신청자격이 없다는 공식 규정에도 불구하고 문예위는 해마다 언론사 10여곳에 예산을 지원해왔다. (문화예술위원회 홈페이지 캡처)
하지만 문체부는 언론사 범주에 대한 해석의 문제지, 특혜 시비와는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문체부 공연전통예술과 관계자는 CNB에 “문예·비평 잡지는 정기간행물 등록이 되어있다는 점에서 언론사가 맞지만 그렇다고 이를 지원에서 배제하면 문화계의 출판물 지원을 중단하라는 얘기가 될 수도 있다”며 “언론사의 개념이 명확하지가 않아 관련 규정을 고치라고 요청한 것”이라고 말했다.
문예위는 그동안 기금 신청자격 규정에 ‘언론사를 제외한다’고 명시해 놓고, 지원범위는 ‘공연예술 관련 리뷰, 비평, 국내외 관련정보 등을 포함한 전문지, 비평지 등 출판물을 발간하는 사업’으로 공시했다. 전문지·비평지를 언론사로 인식하면서 혼선이 생겼다는 게 문체부의 설명이다.
문화계에서는 이번 일이 오랜 관행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문예위는 문화·예술 진흥을 목적으로 1973년 정부 주도로 설립됐다. 언론사가 지원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규정은 당시부터 있었다. 하지만 언론사의 범주를 규정한 언론중재법이 시행되기 전이었다. 당시 사회적 인식은 방송사와 신문사만 언론으로 봤고 월간지·계간지 등은 언론사로 보지 않았다. 그때 인식이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착오가 생겼다는 것이다.
언론사 공연행사까지 지원 “왜”
여기까지만 보면 단순한 해프닝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CNB 취재 결과, 문예위는 언론사가 주관하는 공연행사까지 지원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체부의 말처럼 출판 지원이 ‘언론사의 범주’ 혼돈에서 비롯된 일이라 치더라도, ‘출판’과 무관한 ‘공연’까지 지원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A언론사의 경우, 2015년과 2016년 페스티벌을 개최하며 문예위로부터 총6천만원의 지원금을 수령했으며, 올해는 지역대표공연예술제 지원을 신청해 6천만원의 기금 지원이 결정 난 상태다.
더구나 지난해부터 시행된 부정청탁금지법(김영란법)은 언론사 주관의 행사에 직무연관성이 있는 정부·공적기관의 예산 지원을 금지하고 있다. 문예위는 준정부기관(공직유관단체)이라 적용대상이다.
국민권익위 관계자는 CNB에 “(청탁금지법 외에) 다른법에서 언론사에 지원할 수 있는 근거가 확실하지 않으면 법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문예위는 CNB에 “(A언론사가) 기초예술 활성화 사업 취지에 부합한다고 판단해 지원했다”고 짧게 답했다.
▲문화예술위원회 스스로 청탁금지법 적용 기관임을 공지해놓고도 언론사의 각종 행사를 지원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청탁금지법은 언론사 주관의 행사에 직무연관성이 있는 정부·공적기관의 예산 지원을 금지하고 있다. (문화예술위원회 홈페이지 캡처)
문화예술인들은 이번 사안을 단순한 업무 착오나 관행으로 봐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한 문화계 인사는 “기금지원의 기회를 박탈당한 다른 예술가들을 위해서라도 A언론사의 공연행사를 지원하게 된 경위부터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며 “만일 부당하게 기금 지원이 이뤄졌다면, 관련자를 엄벌하고 이미 지급된 기금은 즉시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예진흥기금 운용 규정에 따르면, 지원 부적격자로 판명되면 지원금을 전액 회수 조치해야 한다.
반면 A언론사 관계자는 CNB에 “10여년 넘게 사회공헌 예술 활동을 해온 점이 인정받아 지원받았을 뿐 특혜와는 전혀 무관하다”며 “관련 규정을 명확하게 정비해서 정당하게 지원받고도 오해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화예술계 일각에서는 이번 일을 ‘제2의 블랙리스트(지원배제 명단)’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한 언론사 대표는 CNB에 “문화행사를 주최하면서 (문예위에) 지원 신청을 했다가 언론사는 자격이 안된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다”며 “같은 언론인데 어디는 되고 어디는 안된다는 게 말이 되냐”고 반문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던 한 연극인은 “주먹구구식으로 지원대상을 선정해온 오랜 병폐가 드러난 하나의 예”라며 “새정부는 문예위 뿐 아니라 문체부 산하 모든 기관들의 지원실태를 낱낱이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