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소비자연맹·민변·참여연대·금융정의연대·금융소비자네트워크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작년 6월 서울 태평로 삼성생명 본관 앞에서 보험사들의 자살보험금 지급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이성호 기자)
10여년 간 계속돼온 자살보험금 논란이 종착역으로 치닫고 있다. 금융당국이 자살보험금을 끝내 전액 지급하지 않은 삼성생명, 한화생명, 교보생명 등 3곳에 대한 제재에 들어간 가운데, 최종징계안 확정 전에 해당 보험사들이 태도를 바꿀지 주목된다. 이들은 징계를 받으면 수백억원이 절감되고, 수백억원을 내놓으면 징계를 피할 수 있는 희한한 상황에 놓여 있다. 생보업계 ‘빅3’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CNB=도기천 기자)
소송-판결-뒤집기-징계 10년 논란
‘징계 따로 법 따로’ 희한한 사건
징계 확정 앞두고 ‘빅3’ 백기 들까
“징계가 확정되면 모든 게 끝난다. 따로 소송이 진행될 가능성은 ‘제로’라고 보면 된다”(A보험사 관계자)
이번 자살보험금 논란이 상당히 이례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통상 금융당국의 제재가 확정되면 이를 근거로 재판이 진행된다. 가령 공정위가 골목상권 침해(유통산업발전법 위반)를 문제 삼아 대형마트 측에 과징금을 물리면 피해를 본 기업은 이를 근거로 민사소송을 제기해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소송이 의미가 없다. 이미 대법원이 소멸시효가 지난 건에 대해서는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결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징계 따로 법 따로’가 된 데는 생보사들과 보험가입자 간의 오랜 법정공방이 배경이 됐다. 이 초유의 법리적 다툼은 무려 10여년 간 계속돼 왔고 이 과정에서 보험사들은 수차례 ‘신의 한 수’를 보여줬다.
▲2007년 9월 대법원이 “보험사들은 약관대로 자살보험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하면서 자살보험금 논란이 본격화됐다. (사진=연합뉴스)
챕터1, 논란 발단은 약관…생보사들 “실수였다”
논란은 2001년께 잉태됐다. 당시 금호생명(현 KDB생명)이 재해사망특약 상품을 처음 판매하면서 자살도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을 약관에 포함시켰다. 다른 보험사들은 이 약관을 그대로 베껴 유사 상품을 출시했다.
하지만 약관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자살보험금이 일반 사망보험금 보다 2~3배나 많다보니 가입자가 적극적으로 보험금을 청구하지 않는 이상 보험사가 먼저 알아서 챙겨주는 일은 없었다.
그러자 한 유족이 보험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2007년 9월 대법원은 “약관대로 자살보험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다급해진 생보사들은 2010년 1월 자살을 재해사망보험금 지급 대상에서 삭제했다. 하지만 이미 약280만명에게 자살보험 특약 상품이 팔린 뒤였다. 당시 이 상품에 가입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의 유족들은 대부분 자살보험금을 지급받지 못했다.
2013년 ING생명에 대한 금융감독원의 종합검사 때 이런 사실이 적발됐고, 금감원은 이듬해 ING생명에게 과징금 제재를 내렸다. 불씨는 생보업계 전반으로 번졌고 보험사들은 “약관이 실수였다”며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자살은 그 자체가 ‘고의적’인 행동이므로 ‘재해’가 될 수 없는데 약관에 잘못 기재했다는 것이다.
지루한 법정공방 끝에 대법원은 작년 5월 “생보사들은 약관에 적힌 대로 자살 시에도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로써 막을 내리는듯했던 논란은 ‘소멸시효’를 두고 다시 점화됐다. 소멸시효는 권리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에도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상태(보험금 미청구)가 일정기간 계속된 경우, 그 권리가 소멸되는 제도다. 보험금의 소멸시효는 현행법상 2년이다.
보험사가 고의로 지급하지 않은 경우에도 소멸시효가 적용될 수 있느냐를 두고 양측의 법리공방이 치열했지만 대법원은 지난해 9월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은 보험사가 지급할 의무가 없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금감원은 소멸시효가 지났더라도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밝혔다. 애초 줘야 할 보험금을 주지 않아 소멸시효가 지난 만큼 소비자 책임으로 볼 수 없다는 것. 그러면서 자살보험금 미지급 생보사에 대한 중징계 방침을 통보했다.
이 과정에서 ING·알리안츠·동부·신한·KDB·메트라이프·현대라이프·PCA·흥국·DGB·하나생명 등 11개 생보사들은 자살보험금을 전액 지급했다. 금융당국의 강경한 태도 앞에 손을 든 것이다.
▲보험사별 자살보험금 미지급 현황. ()안은 %
챕터2, 삼성․교보․한화생명 ‘신의 한 수’
하지만 삼성·한화·교보 등 이른바 ‘빅3’는 일부만 지급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교보생명과 한화생명은 보험업법 개정안이 시행돼 약관을 지키지 않은 보험사를 제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처음 마련된 2011년 1월 24일 이후 청구가 들어온 건에 대해서만 보험금을 지급한다고 밝혔다.
삼성생명은 한술 더 떠 금감원이 첫 보험금 지급권고를 내린 2014년 9월 5일로부터 2년의 소멸시효를 계산해 2012년 9월 6일 이후 사망한 건에 대해서만 지급하겠다고 공표했다.
미지급된 자살보험금 총액은 삼성생명 1608억원, 교보생명 1143억원, 한화생명 1050억원에 이르는데, 이들은 이런 절묘한 논리를 내세워 전체금액의 15~20%정도만 지급하려 한 것이다.
금융당국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금감원은 지난 23일 삼성생명, 한화생명, 교보생명에 대해 각각 3개월, 2개월, 1개월의 ‘일부 영업정지’ 처분을 내렸다.
빅3 중 교보생명의 징계수위가 가장 낮았던 이유는 막판에 지급 범위를 전체 계약자로 수정했기 때문이다. 단, 2007년 9월 대법원 판결 이전 보험 계약에 대해선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이자는 안 주고 보험금만 주기로 했다. 이자는 470억원에 이른다.
금감원 관계자는 “계약(약관) 불이행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제재의 법적 근거가 생긴 시점과 금감원 지도가 내려온 시점만 따지고 있다”며 “그 이전에는 약관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김재식 변호사(법무법인 에이펙스)는 CNB기자와 만나 “소멸시효는 정상적인 계약·거래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보험사들이 계약을 위반(약관에 명시된 보험금 지급 거부)해 놓고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건 문제가 있어 보인다”며 “이는 민법에 명시된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자살보험금을 전액 지급하지 않은 삼성․한화·교보생명 모두 CNB 취재에 “입장을 밝힐 단계가 아니다”며 말을 아꼈다. 삼성생명 본사. (사진=연합뉴스)
챕터3, 주판알 튕기기…징계 받을까 돈 낼까
이번 금감원 제재로 해당 보험사들이 곧장 영업정지에 들어가는 건 아니다. 3월중 개최될 금융위원회에서 최종 확정되며, 보험사들의 태도 변화 여부에 따라 징계수위가 낮아질 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조건 없이 전액 지급(이자 포함)을 약속할 경우 경징계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실례로 지급을 거부하며 버티다 ‘전액 지급’으로 돌아선 메트라이프, 흥국생명, 신한생명, PCA생명, 처브라이프(옛 에이스생명)에 대해 금융당국은 100~700만원의 경미한 과징금을 부과한 바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빅3의 태도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금감원의 원안대로 징계가 확정되더라도 이들이 보험금을 내놓을 가능성은 낮다. 이미 대법원이 소멸시효가 지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시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지급을 거부하는 부분은 ‘소멸시효에 해당되는 보험금’이다.
생보업계 관계자는 CNB에 “이번 사안은 이미 판례가 나와 있는 만큼, 징계는 징계대로 받고 보험금은 보험금대로 지급할 보험사는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해 자살보험금 관련 집단소송을 이끌어냈던 금융소비자연맹의 이기욱 사무처장도 CNB 기자에게 “유족들이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이다 보니 거대 로펌과의 힘겨운 싸움을 견디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망자(亡者)의 유족들에게 경제적 어려움이 대물림되고 있는 상황에서 비용과 긴 시간이 소모되는 소송을 감당하기는 힘들 것이란 얘기다.
이대로 자살보험금 사태가 마무리될 경우 형평성 시비가 일 우려도 있다. 같은 보험특약에 가입해놓고도 소비자에 따라 전액지급, 일부지급, 전혀 못 받은 경우 등 각기 다른 케이스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미 자살보험금을 이자까지 쳐서 전부 지급한 보험사들 또한 빅3에 비해 상대적으로 억울(?)한 경우가 됐다. 헌정사상 유래 없는 대규모 불평등 보험 사건으로 역사에 남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자살보험에 가입한 당사자와 가족은 대부분 소외 계층이라는 점에서 보험금을 전액 지급하지 않은 대형보험사들의 도덕성이 도마 위에 올랐다. 한 남성이 서울광장 나무 위에 올라가 자살 소동을 벌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챕터4, 사건 종료 초읽기…마지막 기회는 ‘백기 투항’
따라서 현재로서는 빅3의 극적인 ‘백기 투항’에 마지막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빅3는 영업정지로 입는 피해와 자살보험금을 전액 지급했을 때 등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놓고 득실을 따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CNB 취재에 “입장을 밝힐 단계가 아니다”며 말을 아꼈다.
업계에서는 이번 영업정지가 ‘재해사망 특약’에 한정되는 만큼 전체 실적에 미칠 영향이 크지 않을 것으로 내다본다. 고객이 재해사망 보장 특약을 고집하지 않는 한, 종신보험과 저축성보험 등 대부분 상품을 지금처럼 팔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주계약으로 재해사망보장이 들어있는 일부 상해보험 외에는 타격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권·시민단체들은 빅3가 이해득실을 떠나 사회적 책무를 다해줄 것으로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는 자살에 대한 사회적 미안함이 배어 있다.
이기욱 처장은 “보험사가 약관에 정해진 것 외에 보상을 해준 적이 없듯이, 마찬가지로 보험사도 약관을 지켜야 함은 너무도 분명한 이치”라며 “더구나 자살보험에 가입한 당사자와 가족은 대부분 소외 계층이라는 점에서 대기업의 모럴헤저드가 더 심각하게 다가온다. 지금이라도 대승적 시각에서 태도를 바꿔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