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은행의 수장들이 내부 출신으로 채워지거나 연임에 성공해 주목된다. (왼쪽부터) 신한금융지주 회장에 내정된 조용병 신한은행장, 신한은행장에 내정된 위성호 신한카드 사장, 평사원 출신인 김도진 기업은행장, 연임에 성공한 이광구 우리은행장. (사진=CNB포토뱅크, 연합뉴스)
박근혜 정부의 여러 실책이 인사 폐해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인재 등용 시스템의 혁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최근 주요 은행의 신임 CEO들이 모두 내부 출신으로 채워져 주목된다. 금융권은 이번이 금피아(금융+마피아) 관행을 끊어낼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고 있다. 이들은 올해를 외풍 없는 원년(元年)으로 만들 수 있을까. (CNB=도기천 기자)
기업·우리·신한銀 내부 출신 CEO
박근혜정부 공백 ‘투명 인사’ 계기돼
정치권 흔들기 ‘뉴(new) 외풍’ 등장
“사실상 국정이 마비된 상태라서 그런지 이번에는 외압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최근 새로 최고경영자(CEO)를 선출한 한 금융사 고위관계자의 말이다. 이처럼 달라진 분위기를 두고 금융권 안팎에서는 ‘최순실이 준 선물’이라는 웃지못할 말까지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로 정부가 제기능을 못하게 된 점이 오히려 금융권에 도움이 됐단 얘기다.
실제로 지난해 연말 기업은행장을 인선을 시작으로 우리은행, 신한은행, 신한금융지주 등의 CEO가 전부 내부 출신들로 채워졌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은행권의 첫 인사에서 기업은행장에 선출된 김도진 행장은 1985년 기업은행에 평사원으로 입행해 지점장, 전략본부장, 부행장을 지냈다. 조직관리와 경영전략은 물론 영업현장까지 꿰차고 있어 관리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성과연봉제 도입을 두고 노조와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대체로 될 만한 사람이 됐다는 평이다.
국내 최대 금융그룹인 신한금융에서는 최근 1개월 사이에 릴레이 승급이 이뤄졌다. 위성호 신한카드 사장이 신한은행장으로, 조용병 신한은행장은 신한지주 회장으로, 한동우 지주 회장은 고문으로 포지션이 확정됐다. 이들은 모두 수십년 전 신한은행에서 행원으로 시작해 영업, 전략기획 등을 두루 거친 ‘순도 100% 신한맨’들이다.
▲낙하산 인사에 반대하는 의미의 대형 풍선이 설치돼 있는 여의도 증권거래소 1층 로비. (사진=CNB포토뱅크)
신한금융은 2011년 국내 금융지주사 중 최초로 도입한 ‘CEO승계프로그램’을 통해 철저히 능력위주로 이들의 자리를 정했다. 이 프로그램은 신한은행 신한카드 신한금융투자 신한생명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 등 5개 자회사 경영진을 이사회가 수시로 평가하는 제도다. 이렇게 축적된 데이터를 토대로 이번 인사가 이뤄졌다.
위 사장과 조 행장은 국내 ‘리딩뱅크’ 자리를 넘보는 KB금융그룹의 끊임없는 도전에도 불구하고 업계 1위 자리를 수성했다는 점이 후한 점수를 받았다. 한 회장 또한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신한금융이 올해 처음 만드는 상담역(고문)에 위촉될 것으로 알려졌다. 말이 퇴임이지 한 회장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얻은 셈이다.
내부평가만 적용, 외풍 없어
우리은행도 이광구 현 우리은행장이 연임에 성공함으로써 외풍이 없었음을 입증했다. 우리은행은 과거 ‘낙하산 천국’으로 불릴 정도로 외압이 심한 곳이었다는 점에서 이 행장의 연임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은행은 16년 간의 매각 노력 끝에 지난해 11월 정부지분 29.7%를 IMM PE(6%), 동양생명(4%), 유진자산운용(4%), 키움증권(4%), 한국투자증권(4%), 한화생명(4%), 미래에셋자산운용(3.7%) 등 7개사에 분할 매각했다. 이들은 과점주주(여러 명의 주주가 각자 경영권 행사) 형태로 우리은행을 새로 이끌고 있다.
하지만 남은 지분 21.4%를 가진 예금보험공사가 여전히 최대주주라서 정부 입김이 작용할 가능성이 제기돼 왔다. 금융권 관계자는 CNB에 “오래전부터 ‘주인 없는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강한데다, 새로 경영에 참여한 기업들의 지분이 모두 그만그만하다는 점에서 외압이 작용할 가능성이 우려됐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하지만 새 이사회는 이 행장의 민영화 공로를 우선에 뒀다. 전통적인 매각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유연한 태도로 우리은행을 매력적인 매물로 변신시켰다는 점에서다.
▲지난해 10월 한국거래소 직원들이 낙하산 논란을 빚고 있는 정찬우 이사장의 출근을 저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인사 참사→경제 참사’로 이어져
그동안 정부는 금융정책을 주도하면서 은행들의 각종 인사에 노골적으로 개입해 왔다.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이 지난해 국감 때 금융당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정부가 지분을 보유한 금융회사 27군데의 임원 255명 중 97명(약40%)이 박근혜 정부가 내리꽂은 낙하산들이었다.
박 대통령과 동문인 서강대 출신의 금융인 그룹인 ‘서금회’는 주요 금융사 요직에 진출하며 세를 넓혀 왔다. 앞서 이명박 정부 때는 ‘금융 4대천왕’으로 불렸던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 김승유 하나금융 회장 등 친MB 성향의 수장(首長)들이 임기 내내 ‘낙하산’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런 인사 병폐는 국가경제를 흔드는 대형사고로 연결됐다. 대표적인 예가 대우조선해양에 수조원대의 금융지원을 결정했던 ‘청와대 서별관회의’다.
서별관회의는 행정부 경제사령탑(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 한국은행 총재 등을 주축으로 열리는 비공개 경제금융점검회의를 이른다.
2015년 10월 최경환 당시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임종룡 금융위원장,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 진웅섭 금융감독원장, 홍기택 산업은행 회장, 이덕훈 수출입은행장 등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대우조선에 4조2000억원(유상증자 및 출자전환 포함)의 금융지원이 결정됐다. 산은의 실사를 통해 대우조선에 수조원대의 부실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상황이었음에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청와대(금융당국)→산업은행→대우조선’으로 연결된 금피아(금융+마피아)가 있었다.
‘대우조선해양 자문 및 고문현황’ 자료에 따르면, 대우조선 부실의 큰 책임이 있는 남상태·고재호 전 사장을 비롯해 산업은행과 정부고위관료 출신 인사 등 60명이 2000년 이후 대우조선과 대우조선 자회사들의 고문, 상담역, 자문역을 역임했었다. 특히 산은 출신들은 대우조선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산은의 인사권은 청와대가 쥐고 있었다. 이렇게 연결된 고리 속에서 수조원대의 국민세금이 증발한 것이다.
최근에도 인사 참사로 인한 사건들은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10월 취임한 정찬우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박 대통령의 문고리 3인방 중 하나인 이재만 전 총무비서관, 현기환 전 청와대 경제수석 등을 배경삼아 금융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정 이사장을 상대로 최순실씨 측근 특혜인사에 관여한 의혹 등을 조사 중이다.
정 이사장은 최씨 모녀의 독일 정착을 도운 KEB하나은행 이상화 본부장의 승진에 영향력을 행사한 혐의를 비롯,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재직 당시 금융권에 대해 전방위적인 인사개입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피아가 남긴 상처는 금융시장의 경쟁력 약화로 나타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해 9월 세계 138개국의 국가경쟁력을 평가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금융시장 성숙도는 80위로 우간다(77위)보다 낮았다.
▲어느 정부 출자기관의 노조원들이 낙하산 인사를 반대하는 내용이 담긴 풍선을 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은행 스스로 용기 내야”
최근의 금융권 CEO 인사에서 보듯, 은행들은 박 대통령 탄핵 정국을 기회삼아 투명한 인사 시스템을 확립하려 힘쓰고 있다. ‘경영평가 프로그램’이 속속 도입되고 있고, 이미 도입된 곳에서는 모처럼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자정 노력으로 인해 금융당국이 인사에 개입할 여지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일부 정치권의 외압은 여전하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은 신한은행장 내정 과정에서 위성호 사장에게 과거 신한 사태의 책임을 물어 자격 문제를 제기하는 등 반대 목소리를 냈다. 신한사태는 2010년 라응찬 당시 신한지주 회장과 신상훈 신한지주 사장 간에 발생한 경영권 분쟁이다. 7년전 일을 들고 나와 흔들기를 시도한 것. 기업은행장 인선 때는 성과연봉제 도입을 문제 삼기도 했다.
금융권에 외풍 시비가 끊이지 않아온 이유는 국민연금, 예금보험공사, 기획재정부 등 정부가 보유한 지분 때문이다. 정부가 주주권을 행사해 이사회를 장악하고 해당 이사회가 행장(또는 지주회장)을 선정하는 구조다보니 은행 스스로 자율성을 갖기 힘든 구조다.
전문가들은 인사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법·제도를 손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세현 경영컨설턴트는 CNB에 “정부 지분의 완전 민영화와 공직자윤리법의 강화 등을 통해 금융기관 스스로 능력위주로 인물을 뽑을 수 있는 룰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중은행의 한 고위관계자는 “제도 개선도 중요하지만 은행 스스로 외압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며 “은행이 공공기관이 아닌 사기업임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