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는 개막 전날인 26일 열린 미디어 이벤트에서 3월 출시 예정인 아이오닉의 신형 모델을 소개했다. 행사를 진행한 현대자동차 미국 법인의 마이크 오브라이언 상품담당 부사장은 아이오닉이 “전기차의 단점인 주행거리 향상에 힘썼고, 전기차 최초로 라이프타임 워런티를 제공할 것”이라고 밝혀 관심을 모았다.
미국 EPA가 인증한 현대차의 전기차 ‘아이오닉 일렉트릭’의 주행거리(한번 가득히 충전한 상태에서 주행 가능한 최대 거리)는 124마일(200km)이다. 200km면 서울에서 천안을 겨우 왕복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 정도의 주행거리는 2017년 현재 전기차 구매에 관심을 가진 소비자들에게 높은 수치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전기차는 가격과 주행거리가 중요
작년까지 전기차 시장에서 가장 긴 주행거리를 자랑한 차는 테슬라 모터스의 모델S다. 가장 높은 사양의 모델S는 한번 충전으로 315마일(507km)까지 달릴 수 있는 데다 어지간한 슈퍼카를 압도하는 가속력 등의 성능까지 갖추고 있어 미국 전기차 시장의 최강자로 수년째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이정도 주행거리를 갖춘 모델S의 대당 가격은 13만 달러(1억 5천만 원)가 넘는다. 전기차 주행거리는 장착된 배터리의 용량이 결정하는데, 차량 생산 원가에서 배터리 가격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주행거리가 긴 차는 그만큼 가격도 높을 수밖에 없다.
전기차의 적정가격과 주행거리간의 줄다리기는 현재 모든 전기차 업체들의 고민이다. 이들은 시장 수요를 분석해 3만 달러 대에 주행거리 200마일 이상의 전기차가 현재 소비자들의 구매력과 성능을 충족시켜 줄 적정한 선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테슬라 모델3, 2세대 닛산 리프 등 앞으로 1~2년 안에 출시가 예고된 2세대 전기차 상당수가 이 기준에 맞춰져 있다. 그리고 그 첫 주자인 쉐보레 볼트(Bolt) EV가 3만 7495달러의 가격에 238마일(383km)의 주행거리를 내세우며 등장, 지난해 말부터 미국에서 시판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현재 테슬라의 모델들과 쉐보레 볼트 EV를 제외한 기존 전기차들의 주행거리는 대개 100마일 전후다. BMW i3가 81~114마일, 닛산의 2017년형 리프가 107마일 정도인데 미국 전기차 시장의 점유율 최상위에 랭크되어 있다. 따라서 아이오닉 일렉트릭의 주행거리 정도면 차량 가격이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지 않는 한 아직까지는 경쟁력이 있는 셈이다.
오브라이언 부사장도 이날 행사에서 “124마일은 미국 운전자의 98%에게 필요한 일간 주행거리를 충족시키는 수치”라며 “또한, 전기차 구매자의 91%는 밤새 자기 집에서 차를 재충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므로 124마일의 주행거리는 추운 지방에서조차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미 2세대 전기차(볼트 EV)가 시장에 등장한 마당에 아이오닉이 주행거리를 장점으로 내세우는 것은 큰 반향을 얻기 어렵다. 라이프타임 워런티가 대단히 파격적인 제안인 것도 분명하나 더 뚜렷한 무기를 갖출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전비 1위’ 아이오닉
이에 현대차가 내세운 아이오닉의 강점은 바로 ‘전비(電費)’다.
전비는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통용되는 개념으로, 풀어서 ‘전기차의 연비’라고 이해하면 된다.
연비는 내연기관 자동차의 에너지 효율을 수치화한 것이다. 자동차가 일정량의 연료로 얼마나 멀리까지 주행할 수 있는지 측정해서 산출한 것으로, 자동차의 경제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비자들의 구매 결정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
전비는 전기차의 연비를 내연기관 차와 비교하기 위한 개념으로, MPGe(Miles per gallon equivalent)로 표시한다. 휘발유 1갤런을 넣는 데 필요한 비용으로 전기차를 충전했을 때 주행할 수 있는 거리를 의미한다.
오브라이언 부사장은 이날 행사에서 전기차의 주행거리 뿐 아니라 전비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주행거리를 늘이려면 배터리를 더 많이 얹으면 된다. 그러나 그러면 가격 상승으로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중량이 늘어나므로) 전기차의 전비도 떨어지게 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이오닉 일렉트릭이 현재 미국에서 판매되는 모든 자동차들 가운데 가장 전비가 높은 차라는 점을 강조했다.
아이오닉 일렉트릭은 지난해 11월 미국 EPA에서 복합전비 136MPGe를 인증 받았다. 이는 전기 모드로 주행할 경우 도요타 프리우스 프라임의 133MPGe를 넘어서는 것이고 BMW i3 중 가장 연비가 높은 버전의 124MPGe도 뛰어 넘는 수치다.
무엇보다 가장 큰 경쟁모델인 볼트EV(전비 119MPGe)를 뛰어 넘는다는 점에서 큰 강점으로 보인다.
전기차의 전비, 의미가 큰가?
내연기관차의 연비는 구매결정과정에 중요한 고려사항이고, 따라서 시장 점유율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이는 친환경차에 대해서도 비슷하다. 하이브리드 차가 ‘친환경’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장에 등장했을 때 소비자들이 더 관심을 보인 이유는 환경 보호에 대한 것보다도 연료비를 아낄 수 있다는 강점 때문이었다.
미국의 친환경차 전문 매체인 ‘그린카 리포트’는 최근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하이브리드 차의 연간 판매량과 시장점유율의 변화를 조사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하이브리드 차의 판매량과 시장점유율이 가장 높았던 해는 2013년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매체는 하이브리드 차의 판매량이 그 해 미국에서의 기름 값과 큰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2013년도 미국의 기름 값은 2016년 평균보다도 높았다.
다만 2013년 이후 하이브리드 차의 판매량과 시장점유율이 계속 하락하고 있는 것은 성능이 우수한 전기차들이 등장했으며, 전기차에 대한 정부 보조금이 높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이 매체는 덧붙였다. 전기차의 판매량을 포함해서 전체 친환경차의 판매량과 시장 점유율 변화를 따졌을 경우에는 2013년 이후로도 계속 일정 비율 이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테슬라 모델S를 구매할 수 있는 소비자층은 연료 가격에 크게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하지만 3만 달러 선에서 친환경차 구매를 고민하는 다수 소비자들은 여전히 기름 값과 연비(전비)를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하이브리드 차의 소비는 감소하고 전기차 소비가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난 데에는 바로 전기차의 높은 전비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2016~2017년 미국 시장에서 팔린 모든 전기차 중에서 가장 전비가 나쁜 모델은 중국 비야디(BYD)의 e6로 전비가 72MPGe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수치조차 가장 연비가 높은 내연기관 차보다 높은 수치다.
전기차의 전비는 내연기관차의 연비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전기차 모델들끼리의 경쟁에서는 주행거리만큼 영향력이 큰 요소가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두 가지 이유에서 전비가 중요한 고려사항이 될 수 있다. 배터리 생산 단가가 예전만큼 비싸지 않아 2세대 전기차 이후로는 대부분 충분한 주행거리를 갖추게 될 것이라는 점이 한 가지 이유다. 또 다른 이유는, 전기차 충전이 더 이상 무료가 아니라는 점이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4월부터 전기차 급속 충전기를 유료화해 kWh당 313.1원의 요금을 부과했다가 이번 달 12일부터 44% 인하한 173.8원으로 책정했다. 테슬라도 그동안 무료로 제공하던 슈퍼차저 충전 요금 정책을 뒤집어 올해부터는 고객에게 요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앞으로 전기차 구매자가 늘어 전기차 충전 수요도 크게 늘어난다면 급속충전 비용의 상승은 불가피할 것이다.
따라서 전기차 구매자는 배터리의 용량과 무관하게 일정한 비용만큼만 충전해서 몰고 다닐 가능성이 높다. 이는 충전비용 뿐 아니라 충전 시간과도 관계가 있는 문제인데, 배터리 용량이 크면 클수록 완충하는 시간도 길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데 아이오닉의 배터리 용량은 28kWh이고 볼트는 60kWh다. 240V의 전기로 완속 충전할 경우 아이오닉은 완충하는 데 4시간 25분이 걸리지만 볼트 EV는 9시간 30분이 걸린다. 볼트 EV 사용자가 급속충전으로 60kWh를 완충하지 않는다면 두 차의 주행거리 차이는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또한, 전기차의 전비가 우수하다는 것은 모터와 배터리의 에너지 효율이 높다는 의미다. 배터리 효율이 높으면 충전 시간은 줄어들고, 같은 용량의 배터리로 주행거리를 더 늘일 수 있다는 의미다.
현대차 관계자는 “배터리 용량이 커질수록 충전 시간이 오래 걸리고 배터리 무게 때문에 에너지 효율은 떨어진다”며 “1회 충전 주행거리를 늘리면서도 충전 시간을 줄여나가는 기술이 앞으로 전기차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