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뭐가 튀어 나올지 모른다” (한 대기업 임원)
박근혜 대통령과 대기업들 간의 뇌물죄 의혹에 대한 특검 수사 범위가 확대되면서 재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애초 삼성과 롯데 선에서 수사가 마무리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SK, CJ 등 여러 기업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연일 확인되지 않은 루머가 쏟아지는 가운데 기업들의 신년사업계획서는 캐비넷에서 잠자고 있다. 특검 수사의 종착역은 어딜까. (CNB=도기천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8일 오전 영장 실질심사를 받기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최순실씨와 박근혜 대통령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새해 투자계획·사업재편 ‘올스톱’
저인방식 수사…뭐가 나올지 몰라
갈피 못잡는 재계, 하늘만 쳐다봐
지난달 초 재벌 총수들에 대한 국회 청문회가 진행될 당시만 해도 기업들은 이처럼 사태가 커질지 예상하지 못했다. CNB가 여러 대기업 관계자들을 접촉해본 결과, 이달 초까지만 해도 대부분이 삼성과 롯데 정도로 수사 범위가 한정될 것으로 보고 있었다. 일부 기업은 ‘피해자’라는 이미지가 부각되면서 동정론까지 부상했었다.
기업들이 마음을 놓고 있었던 이유는 뇌물죄의 특성상 혐의를 규명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법해석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특검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적용하려 하는 ‘뇌물공여’는 공무원이 ‘부정한 청탁’을 받고 제3자에게 뇌물을 주도록 강요한 경우에 성립한다. 대통령이 최순실씨의 청탁에 의해 기업들에게 기금을 내라고 했을 가능성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해당 기업들의 ‘청탁성’이 입증돼야 한다. 청와대가 기업들에게 먼저 접근해 압력을 가했다면 뇌물죄를 적용하기 힘들 수 있다. 어려운 경제 상황을 고려해 기업 수사에 신중해야 한다는 여론도 부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박영수 특검은 재계의 기대와 달리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일부 기업에 국한하지 않고 재계 전반으로 범위를 확대하는 ‘저인망식’ 수사로 ‘봐주기’ 논란을 불식하겠다는 것. 저인망식 수사기법은 용의자를 특정하지 않고 무한정 조사 대상을 넓히는 것을 이른다.
특검은 이미 검찰 수사를 통해 박 대통령의 직권남용, 공무상 기밀누설 등의 혐의가 충분히 입증된 만큼, ‘뇌물공여’ 혐의를 추가하는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뇌물죄는 양쪽 당사자를 모두 처벌하는 쌍벌죄다. 기업에게 뇌물죄가 적용되면 대통령도 마찬가지 혐의가 적용된다. 뇌물죄가 10년 이상의 징역형도 가능한 중범죄이기 때문에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점도 특검을 자극하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수사 중인 박영수 특별검사팀 대변인 이규철 특검보가 17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검 기자실에서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피해기업까지 뇌물죄 의혹
이런 분위기다 보니 수사 선상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기업만도 10여 곳이 넘는다.
삼성그룹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박 대통령의 도움을 받고 그 대가로 최순실씨 일가를 지원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특검팀은 삼성이 2015년 8월 최씨의 독일 현지 법인인 코레스포츠(비덱스포츠의 전신)와 220억원 규모의 컨설팅 계약을 맺고 35억원을 송금한 것과 그해 10월∼이듬해 3월 최씨 조카 장시호씨의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16억원을 후원한 점 등을 ‘뇌물’로 판단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상태다.
롯데는 최씨가 실소유주인 K스포츠재단에 70억원을 추가로 출연했다가 돌려받은 사실이 발목을 잡고 있다. 신동빈 롯데 회장이 작년 3월 박 대통령과 단독 면담을 한 직후 최씨 측이 추가로 돈을 요구했는데 당시 롯데는 검찰 수사와 면세점 인허가 등 현안이 있었다. 특검은 박 대통령과 롯데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가능성을 들여다보고 있다.
SK는 체육인재 해외전지훈련에 80억원을 지원해 달라는 K스포츠재단의 요구를 받고 금액을 조정하다가 지원이 무산된 바 있다.
특검은 김창근 SK이노베이션 회장(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 2015년 7월 청와대 인근 안가에서 박 대통령과 독대했고, 그해 8월 최태원 SK회장이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점에 주목하고 있다. 특검팀은 당시 교도소에 면회 온 김영태 SK 부회장이 최 회장에게 “대통령이 사면을 결정했고 그에 따른 숙제를 받았다”는 취지의 말을 한 녹취록을 확보한 상태다. 최 회장 사면의 대가로 SK가 박 대통령 측에 자금을 출연하려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KT는 문화계 국정 농단의 핵심 인물인 차은택(구속기소) 전 창조경제추진단장과의 연루설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차 전 단장은 최씨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과 공모해 KT에 인사 압력을 넣고, 자신과 최씨가 설립한 플레이그라운드를 광고대행사로 선정하도록 한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 된 상태다.
▲지난달 6일 국회청문회에 출석한 기업총수들이 증인선서를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회장, 조양호 한진그룹회장, 신동빈 롯데그룹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대표이사, 김승연 한화그룹회장, 구본무 LG 대표이사, 손경식 CJ 회장. (사진=연합뉴스)
숨죽인 재계…억울해도 항변 못해
아직 수사 중인 상태라 단정 짓긴 어렵지만 최순실 일당과 ‘옷깃을 스쳤다’는 이유만으로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기업들도 여럿 있다.
하현회 LG 대표이사 사장은 지난해 7월 안 전 수석에게 “(LIG넥스원) 구본상 부회장이 95% 복역을 마친 상황이다. 8·15특별사면 대상 후보로 다시 한 번 검토해 달라”는 취지의 문자메세지를 보냈다.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의 동생 고 구철회씨의 장손인 구 부회장은 LG 측의 바램과 달리 특사에서 제외됐고, 그해 10월 29일에 만기출소 했다. 그럼에도 LG는 안 전 수석과의 관계를 의심받고 있다.
한화그룹은 김승연 한화 회장의 셋째아들 김동선 씨가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와 함께 아시안게임에 승마선수로 출전해 단체전 금메달을 딴 사실이 알려져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한화그룹이 정유라의 말을 사줬다’는 루머가 한화 측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통상적인 ‘정책성 민원’이 의심 받고 있는 경우도 있다. 황창규 KT 회장은 지난해 2월 박근혜 대통령과의 독대 과정에서 청와대에 ‘SK텔레콤과 CJ헬로비전의 합병을 막아 달라’는 민원을 넣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SK텔레콤의 시장독과점을 막기 위한 것이었고, 당시 일부 정치권과 시민단체에서도 이런 우려가 제기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특검은 정부가 이들 기업의 합병을 불허했다는 점에서 황 사장과 박 대통령 사이에 무슨 거래가 있었던 것 아닌지를 의심하고 있다.
심지어 피해기업이 되레 의혹을 받는 경우도 있다.
CJ는 박근혜 정권에 비판적인 영화, 풍자 프로 등을 보급·상영했다는 이유로 오너 일가가 사퇴 압력을 받는 등 피해를 봤다. CJ가 최씨 측 재단에 낸 돈은 13억원으로 다른 기업에 비해 상당히 적은 수준이다.
그럼에도 손경식 CJ 회장이 지난해 7월 박 대통령을 면담한 자리에서 이재현 CJ 회장의 건강 문제와 관련된 얘기를 나눴다는 사실 때문에 특검의 주목을 받고 있다. CJ측은 “손 회장이 외삼촌으로서 이 회장의 건강을 우려하는 차원에서 선처를 호소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 또한 안 전 수석과 K스포츠재단 정현식 전 사무총장으로부터 K스포츠 하남 거점 시설 건립비 70억∼80억원을 내라는 압력을 받는 등 시달렸지만 끝내 요구를 거부했다. 하지만 당시 부영이 세무조사 중이었다는 점에서 의혹을 받고 있다.
▲지난 1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제12차 촛불집회에서 참석자들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기업들의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법조계 “뇌물죄 신중 기해야”
특검 수사가 빠르게 속도를 내면서 재계는 잔뜩 웅크린 모습이다. 과거 통상적인 검찰 수사의 경우 기업들은 대관 라인을 동원, 수사의 대상과 범위 정도는 미리 파악해 대응 시나리오를 짤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특검 안에서 ‘별동대’로 불리는 회사분석팀이 주로 첩보수집과 제보에 의존하고 있는데다, 수사 시한이 다음달 말로 한정돼 있어 누가 유탄을 맞을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재계 한 고위임원은 “재벌을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과 김영란법 등으로 인해 대관 부서의 기능이 정지된 지 오래다. 특검이 검찰 조직과 단절된 독립기구다보니 기존 법조 라인을 통해 (수사범위 등을) 알아볼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언론의 과도한 취재 경쟁으로 인해 각종 의혹이 팩트처럼 둔갑되고 있는 점도 기업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CNB에 “SK의 경우 검찰이 면세점 특혜 부분에 무게를 둔 것으로 알려졌는데, 갑자기 최태원 회장 사면에 관한 수사로 전환됐다”며 “정말 어디서 뭐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SK그룹은 최씨 측의 추가출자 요구를 거부했고, 이 시기를 전후해 면세점 입찰에서 두 번이나 연속 탈락한 바 있다. 앞뒤 정황상 면세점 특혜에 대한 규명이 어렵게 된 특검이 갑자기 박 대통령과 최 회장 간의 ’사면 거래’ 쪽으로 수사방향을 틀었단 얘기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뇌물공여죄가 성립되려면 기업 쪽에서 먼저 ‘부정한 청탁’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나온 정황으로 보면 청와대가 먼저 요구하고 대부분 기업들은 이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며 “이 과정에서 기업들의 청탁이 있었더라도 선후를 따지면 뇌물죄를 적용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는 분명하지만 법리 적용은 여론에 편승해서는 안된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