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이 국정공백으로 사업재편과 정기인사를 미루고 있으며, 인사를 단행하더라도 소폭에 그치고 있다. 지난 6일 국회청문회에 출석한 기업총수들. (사진=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 미국 트럼프 정부의 불확실성, 특검 수사 등 매머드급 악재가 연달아 터지면서 재계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통상 10~11월이면 내년 사업계획이 완료되고 12월에는 정기인사가 단행되지만 재계 시계는 최순실 사태 이전에 여전히 멈춰있다. (CNB=도기천 기자)
‘국난’으로 연말 인사 제동
헌재판결까지 투자 올스톱
조직·인사 개편 ‘반쪽 신세’
“내년 조기 대선에 대비해 사업계획을 다시 짜고 있다. 방향이 정해져야 인사이동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에 올 연말 인사는 물 건너갔다”(A대기업 관계자)
“여러 경우를 가정해 A플랜과 B플랜 등 몇 개의 사업계획을 수립해뒀다”(B건설사 관계자)
CNB가 대기업 관계자들을 두루 만난 결과, 하나같이 내년 전망을 속시원하게 내놓지 못했다.
국정 공백의 여파는 피부로 실감할 정도였다. 롯데·신세계 등 중국에 진출한 유통기업들은 중국정부가 한반도 사드 배치에 반발해 발동한 한한령(한류금지령)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건설사들은 뉴스테이 등 정부주도 사업에 제동이 걸린 데다, 금리인상과 각종규제로 내년 전망이 어둡다.
삼성·LG 등 수출기업들은 반덤핑관세 압박 등 상대국의 보호무역주의를 실감하고 있다. 미중일 주변 강대국들은 한국의 컨트롤타워가 붕괴된 틈을 타 가뜩이나 힘든 경제를 더 암울하게 하고 있다.
▲안으로는 국정혼란, 밖으로는 보호무역주의 영향으로 수출기업들에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생산라인(왼쪽)과 현대차 울산 선적부두 전경. (사진=연합뉴스)
위기의 삼성, 사령탑 재정비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부분 기업들은 해마다 이맘때 이뤄지던 정기인사를 연기했다.
삼성은 매년 12월 첫째 주에 사장단 인사를 실시했지만 검찰 수사 등으로 인해 무기한 연기됐다. 매년 12월에 열리던 '자랑스러운 삼성인상' 시상식은 물론 용인 인재개발원에서 해마다 개최했던 사장단 워크숍도 열지 않기로 했다. 국정조사 청문회에 이은 본격적인 특검조사, 지배구조 개편 작업 등 당면한 과제가 더 시급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을 폐쇄하는 문제가 걸려 있다. 삼성호(號)의 수장격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6일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미래전략실 해체를 약속한 만큼 강도 높은 조직개편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만큼 정기인사도 늦춰질 수밖에 없다.
삼성은 지난 2007년 특검 당시 연말 인사를 그 다음해 5월과 12월로 미뤄서 두 차례 진행한 바 있다. 그때보다 지금 상황이 더 심각한 만큼 현재로서는 인사 시기를 예측하기조차 쉽지 않다.
인사가 이뤄져도 문책 성격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10월 삼성은 갤럭시노트7 발화 원인을 찾지 못해 결국 생산중단을 결정했다. 이를 계기로 업무 프로세스를 조정하고 품질관리조직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직개편을 단행할 여지가 있다. 사내에서 ‘만회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여론도 없지 않지만 신상필벌(信賞必罰)에 무게가 실리는 분위기다.
현대차, 비상 계획 가동
현대차그룹 역시 매년 연말에 인사를 단행했지만 내년으로 연기될 전망된다.
현대차는 글로벌 경기침체 장기화와 내수시장 위축 속에 지난 10월부터 51개 계열사 소속 전체 임원 1천여명의 급여를 10% 삭감하는 등 실질적인 비상경영 체제에 들어간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보호무역주의를 공약으로 내건 美 트럼트 후보의 당선, 탄핵 사태 등 악재가 겹쳤다. 내수, 해외 수출 모두 정체돼 있는 상황에서 내년이 중대고비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인사에 신중을 기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차 내부에서는 ‘선택과 집중’ 전략이 강화될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친환경차 사업, IT(정보기술)와 관련한 연구개발(R&D), 지난해 론칭한 고급차 브랜드 ‘제네시스’ 부문 등에는 과감한 승진이 이뤄지는 반면 실적이 저조한 파트에서는 눈에 띄는 인사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여러 악재에 직면한 롯데그룹 역시 조직·인사 개편이 내년으로 미뤄졌다.
롯데는 면세점 특혜 의혹과 관련해 특검 수사를 앞두고 있는데다,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정부의 보복 조치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롯데는 보유하고 있는 성주골프장을 사드 부지로 내놨는데 이로 인해 중국 내 법인이 세무조사, 소방·위생 점검 등을 동시에 받고 있다.
앞서 지난 10월 신동빈 회장은 ‘정책본부 기능 개선과 축소’를 골자로 하는 그룹 쇄신안을 내놓은 바 있다. 하지만 아직 큰 그림조차 나오지 않아 시간 여건상 인사를 먼저 내고 조직 개편은 그 뒤로 미루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이 경우 고(故) 이인원 부회장 자리를 비워두고 정책본부 운영은 황각규 사장이, 대외협력 업무는 소진세 사장이 각각 나눠 맡는 현 체제가 당분간 유지될 전망이다.
SK그룹은 예년처럼 12월 내에 인사를 단행할 예정이지만 어수선한 시국 분위기를 고려해 조용하게 진행할 것으로 예측된다.
지난 10월 연례 CE0 세미나에서 최태원 회장이 ‘변화와 혁신’ 메시지를 강하게 주문한 이후 실적이 부진하거나 사업 추진이 더딘 계열사를 중심으로 큰 폭의 인사이동이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돼 왔다. 하지만 면세점 특혜 의혹이 제기된 이후 소폭 인사에 그칠 것이란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조직 개편도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수펙스추구협의회 중심의 집단경영체제는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수펙스추구협의회 인사가 계열사 인사에 줄줄이 영향을 미치는 만큼 김창근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 계속 자리를 유지할지, 만약 교체된다면 부회장 중 누가 의장직에 오를지가 최대 관심사다.
또 가습기 살균제 사망 피해 사건과 연관된 SK케미칼 김철·한병로 공동대표의 거취에 변화가 있을지도 인사의 한 포인트다.
포스코는 내년 3월 임기가 끝나는 권오준 회장의 연임 여부가 관전 포인트다. 권 회장이 연임 의사를 밝히면서 사외이사로 구성된 ‘CEO후보추천위원회’가 한달 간의 후보 검증작업에 돌입했다.
포스코는 정부 지분이 다른 기업보다 크다는 점에서 회장 선임 때 마다 낙하산 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현재 대통령 직무가 정지된 상태라 외풍이 작용하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여전히 ‘최순실 리스크’가 발목을 잡고 있어 권 회장의 연임을 장담하기도 어렵다. 권 회장의 연임 여부가 결정되는 내년 1월 이후가 돼야 인사의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전망된다.
CJ, ‘이재현 효과’ 고심
CJ그룹은 이재현 회장이 8.15 특사로 경영에 복귀한 이후 첫 인사를 앞두고 있다.
애초 이 회장의 오너경영에 힘을 싣는 쪽으로 대대적인 인사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됐지만 어수선한 국정 상황 등을 고려해 인사 일정을 늦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으로는 이 회장 직속의 새로운 기구를 만드는 방안 등이 논의되고 있다.
국난(國難)과 상관없이 예전처럼 연말 인사를 단행한 기업들도 있다.
LG그룹은 지난 1일 정기인사를 실시했는데, LG전자의 승진자 수가 예년에 비해 늘었고, 다른 주요 계열사도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LG전자는 3인 대표 체제(조성진 H&A사업본부장, 조준호 MC사업본부장, 정도현 CFO)가 1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변동없이 유지될 것으로 전망됐지만, 조성진 본부장이 LG전자 부회장이 부회장으로 파격 승진해 LG전자호(號)의 선장이 됐다. 다시 1인 CEO체제로 복귀한 것은 안팎으로 경영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LG화학과 LG유플러스는 지난해와 동일하게 각각 19명, 10명이 승진했고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 LG플러스, LG생활건강 등은 작년에 비해 승진 규모가 다소 줄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동생인 구본준 신성장사업추진단장의 역할 확대, 구 회장의 아들인 구광모 LG 시너지팀 상무의 승진 등도 점쳐졌지만, 최순실 사태로 인해 재계에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오너 일가의 자리 이동은 없었다.
한진그룹은 최근 각종 이슈에 휘말려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지만 예년처럼 12월 말 정기 인사를 단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자녀들은 최근 일부 인사이동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정기 인사에서는 변화가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조 회장의 장남인 조원태 대한항공 총괄부사장은 올 3월 대한항공 대표이사를 맡은 데 이어 4월에는 계열사인 저비용항공사(LCC) 진에어의 대표이사로 선임됐으며, 지난 8월에는 한진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인 정석기업 이사에 취임했다.
조 회장의 둘째 딸인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는 지난 7월 진에어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2014년 말에 대한항공 부사장직을 사임한 조 회장의 장녀 조현아 씨의 경영복귀는 최근의 분위기로 봐서는 고려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항공은 파격적인 인사보다는 보직 변경 최소화로 조직 안정성을 추구해왔으며 올해도 이 같은 보수적 기조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한화그룹은 10월초 국내 주요 대기업 그룹 중 처음 사장단 인사를 단행한데 이어 지난 11일 전무 8명, 상무 36명, 상무보 75명 등 총 119명에 대한 임원 인사를 실시했다.
한화 측은 ‘성과와 현장중심’의 인사원칙에 입각해 영업, R&D, 신사업 등에서 성과를 창출해낸 이들은 임원으로 등용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지난 10월에는 그룹 경영기획실장으로서 그룹 전체 살림을 짜고 미래성장의 큰 그림을 그려온 금춘수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신세계그룹도 예년처럼 12월에 인사를 단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용진 부회장과 정유경 총괄사장이 각각 이마트와 백화점 부문을 맡는 책임경영이 강화되는 가운데 이뤄지는 이번 인사는 세대교체 폭에 관심이 쏠린다.
신세계는 지난해 말 정기 인사에서 정유경 당시 신세계백화점 부사장이 총괄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정용진 부회장과의 ‘남매 경영’ 시대를 연 상태다. 당시 인사에서 젊은 임원들을 대거 발탁한 바 있어 이번에도 세대교체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두산그룹은 연말이 아니라 통상 5~6월에 정기 인사를 하기 때문에 최순실 사태에 따른 영향이 없고 연말 조직개편도 시기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연말에 인사를 하지 않는 이유는 내년도 사업계획을 만든 사람이 적어도 다음 해 상반기까지는 그 보직에 남아 사업계획을 시행하는 게 맞는다는 판단에서다. 올해에는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이 지난 3월 취임한 후 첫 정기 인사로 지난 5월 20일 신규 임원 승진 인사를 발표한 바 있다.
재계 한 고위관계자는 CNB에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이 내려질 것으로 예상되는 내년 3~4월까지는 투자와 사업재편, 인수합병 등을 최대한 보수적으로 실행한다는 비상대응 계획(컨틴전시 플랜)을 기업들이 가동하기 시작했다”며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어 정기인사는 진행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소폭에 그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