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코미디쇼 SNL코리아의 정치 풍자코너 ‘텔레토비’ 시리즈는 국내 정치 상황을 신랄하게 풍자해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사진=SNL코리아 캡처)
검찰이 최순실 게이트 수사를 마무리하면서 “CJ그룹 경영진 퇴진의 배경에 박근혜 대통령이 있다”고 밝히면서 ‘CJ는 현 정권의 미운 털’이라는 의혹이 사실로 확인됐다. 왜 박 대통령은 그토록 CJ를 싫어했을까? CNB가 양측의 오랜 악연사(史)를 들여다봤다. (CNB=김유림 기자)
미디어 비판문화 끝내 이해 못한 그녀
‘정치 풍자’와 ‘인격 모독’ 구분 못해
“대통령은 사인(私人) 아닌 공인(公人)”
“이번 정권이 들어설 때부터 CJ가 타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좌파라서 그렇다기에 그룹 내부에서는 그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지난달 7일 CJ그룹의 전 임원이 한 언론에 알린 내용이다. 당시 최순실의 국정농단 의혹들이 다수의 언론을 통해 쏟아지고 있었지만, 정작 사정기관은 소극적으로 수사를 진행했고 새누리당 역시 박근혜 대통령을 감싸며 두둔했다.
그로부터 한 달 간 촛불은 매주 뜨겁게 타올랐고 결국 지난 9일 박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은 친박까지 끌어모아 234표, 78%의 압도적인 찬성표를 받으며 가결됐다.
▲검찰은 11일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오른쪽)이 CJ 이미경 부회장을 퇴진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배후에 박근혜 대통령이 있다고 결론냈다. (사진=연합뉴스)
탄핵 가결 이틀 후인 11일 검찰은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CJ에 대한 강요미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고, 박근혜 대통령을 공범으로 추가 입건했다고 밝혔다. 청와대는 침묵을 지켰다.
검찰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2013년 7월 청와대에서 조 전 수석을 불러 “손경식 회장이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이미경 부회장은 CJ그룹 경영에서 손을 떼면 좋겠다”는 취지로 지시했다. 실제로 같은 해 8월 손 회장은 대한상의 회장직 임기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돌연 사퇴했으며, 그 다음해 이 부회장 역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朴대통령 ‘뒤끝작렬’ 했나
박 대통령이 이처럼 사심(私心)을 품은 이유는 뭘까. 호사가들은 <SNL코리아>의 정치풍자 코너였던 ‘텔레토비’가 박 대통령을 자극한 것으로 보고 있다.
<SNL코리아>는 CJ E&M이 미국 NBC에서 42년 전통의 코미디쇼 <Saturday Night Live>의 판권을 사들여 tvN에서 2011년부터 방영됐다. 매주 토요일 1시간 동안 생방송으로 진행되며 풍자와 해학을 곁들여 19금 성인 코미디쇼로 화제를 모았고, 현재 시즌 8을 맞이한 상태다.
▲사진은 <SNL코리아>의 정치 풍자 코너 ‘텔레토비’에 등장한 캐릭터.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또(박근혜 대통령), 구라돌이(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 안쳤어(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 문제니(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사진=SNL코리아 캡처)
특히 2012년(시즌2)부터 2013년(시즌4)까지 전파를 탔던 ‘텔레토비’ 코너는 지금도 네티즌들 사이에서 정치 풍자의 백미(白眉)로 꼽히고 있다.
텔레토비에 등장한 캐릭터는 구라돌이(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 앰비(이명박 전 대통령), 문제니(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안쳤어(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 등 국내 정치인뿐만 아니라, 야매(아베 신조 일본총리), 오바돌이(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시핑(시진핑 중국주석), 정으니(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위원장) 등 해외의 정치인들도 등장한다. 그리고 ‘또’가 박 대통령이다.
텔레토비는 매주 가장 화제가 됐던 정치 이슈를 주제로 상황극을 진행하다보니, 당시 여당의 대선후보직을 거쳐 18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 대통령을 자주 다룰 수밖에 없었다.
실례로 2012년 생방송으로 진행된 TV토론에서 이정희 후보는 ‘박근혜 저격수’를 자처하며 박근혜 후보를 맹공격했고, 박 후보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는 모습이 전국에 방송됐다. 여기에 박 후보는 문재인 후보의 주요 정책 방향에 대한 질문에도 동문서답으로 일관하며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그 주에 방영된 ‘텔레토비’는 이를 토대로 한 풍자극을 방영했다. 여기서 ‘또’는 “남은 토론 미친 듯이 수첩을 보강하여 준비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라고 다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또 2013년 초 박 대통령의 인사 실패가 7건에 달했다. 총리 후보를 비롯한 낙마자들은 부동산 투기나 병역 회피, 논문 표절 등 고전적 의혹들을 넘어 무기중개업체 근무, 국외 탈세나 성접대 의혹 등 신종 도덕성 문제에 걸려 좌초했다.
그 즈음에 ‘텔레토비’는 “수첩에 이름이 적히면 반드시 사단이 난다”는 주제로 풍자 했으며, 자막으로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은 부실한 검증과 불통으로 인사 참사를 불러온 ‘또(박 대통령)’에게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마무리 했다.
하지만 ‘텔레토비’는 박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2013년 5월 소리 소문 없이 폐지됐고, 이후 <SNL코리아>에서 정치 풍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시기는 박 대통령이 조 전 수석을 불러 손 회장 등에 대한 해임을 지시한 시기와 맞물려 있다.
최근 청와대 전 직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외부행사가 없을 때 하루 종일 관저에 머물며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본인을 풍자한 ‘텔레토비’ 또한 직접 시청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해당 코너 폐쇄와 경영진 퇴진이라는 ‘보복’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한 대목이다.
특히 “청와대 관계자가 원고 쓴 작가의 성향을 조사해갔고 이후 CJ E&M 법무팀이 빨간 색으로 특정 대사를 삭제할 것을 지시했다”는 전 tvN 관계자의 최근 증언은 이런 추론에 힘을 싣고 있다.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사진=위더스필름)
버텼던 이 부회장, 영화 ‘변호인’ 결정타?
이같은 청와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버티던 이미경 부회장은 2013년 12월 개봉한 영화 <변호인>으로 인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변호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한, 그의 인권변호사 시절을 다룬 영화다.
문화체육관광부 전직 고위 관계자는 언론을 통해 “2013년 중순부터 청와대에서 ‘CJ를 조사해서 손을 좀 보라’는 주문이 간간이 내려오기는 했으나, 2014년 초부터는 그 강도가 갑자기 세졌다”며 “당시 변호인이 1000만명을 돌파하며 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추모의 열기가 다시 살아난 때”라고 말했다.
결국 2014년 11월 이 부회장은 남동생 이재현 회장의 부재로 인한 비상경영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회사 경영에서 손을 떼고 미국으로 떠났다.
사실 <변호인>은 CJ의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의 투자배급사는 당시 <7번방의 선물> 등을 흥행시키며 충무로의 신흥 강자로 부상한 ‘뉴(NEW)’다. CJ는 계열사인 CJ창업투자를 통해 일부 자금을 투자했을 뿐이었다. 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CJ창투가 2008~2013년 투자한 한국영화는 73편, 1년 평균 14.6편이나 된다.
한 영화인은 “변호인이 CJ의 영화라면 대부분의 한국 영화가 CJ 영화가 되는 것”이라며 “CJ가 미우니까 괘씸죄를 적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뒤늦게 마음 풀어주려 했지만…
청와대의 의중을 알아차린 CJ는 뒤늦게 박 대통령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CJ는 2014년 <명량>, <국제시장>, 2015년 <연평해전>, 2016년 <인천상륙작전> 등 박 대통령이 좋아할만한 보수 성향 영화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또 CGV와 CJ 계열 방송사에서는 “창조경제를 응원합니다”라는 광고를 했고, <슈퍼스타 K> 등 CJ E&M의 프로그램 마지막에는 “CJ가 대한민국 창조경제와 함께 합니다”라는 자막을 꼬박꼬박 넣었다.
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 돼 법원과 병원을 오가던 이재현 회장의 경영복귀가 절실했던 점도 CJ가 박 대통령에게 고개를 숙이게 된 배경으로 작용했다.
▲지난 11월 5일, 11월 12일 방송된 <SNL코리아>는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패러디와 촌철살인의 풍자로 화제를 모았다. (사진=SNL코리아 캡처)
이처럼 박 대통령의 눈 밖에 날까 노심초사하던 CJ가 다시 풍자프로그램 본연의 야성(野性)을 회복하게 된 것은 최근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부터다.
<SNL코리아>는 지난 11월 5일, 11월 12일 최순실과 정유라로 분장한 코미디언들이 연이어 등장하는 등 화끈한 풍자로 화제를 낳았다.
탄핵가결 다음날인 지난 10일에는 ‘겨울왕국’ 코너를 통해 박근혜-최순실 패러디의 수위를 한층 높였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여왕이 된 엘사(박근혜)와 그 곁에서 연설문을 고쳐주는 안나(최순실), “기억이 안 난다”고 하는 고령의 비서실장 스벤(김기춘 전 비서실장), “고산병에 걸릴 때 먹는 상비약”이라고 비아그라를 설명하는 울라프, 시크릿가든의 현빈을 흉내 내는 한스 왕자 등 신랄한 풍자로 ‘촛불 정서’를 담았다.
또 최근 이 부회장이 ‘청와대의 사퇴 요구’ 이후 처음으로 공식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경영 복귀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 지난 6일 이 부회장은 홍콩 아시아월드엑스포에서 열린 ‘2016 MAMA Awards’에 조용히 참석해 수상자와 인사를 나눴다. 이 부회장은 CJ그룹의 문화관련 사업에 애정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졌지만, 퇴진 압력을 받은 이후부터 마마 공연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케이콘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마지막까지 정치풍자와 인격모독을 구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지난달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연극인들이 최순실 게이트를 풍자하고 있는 모습. (사진=도기천 기자)
“그녀는 민주주의가 몸에 맞지 않는 사람”
한편 청와대는 탄핵 사태 등의 와중에도 마지막까지 CJ를 압박한 것으로 짐작된다.
<SNL코리아>의 익명의 관계자는 한 언론을 통해 “최순실 패러디를 방송하자 BH(Blue House·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고 하더라. 어떤 내용의 통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PD가 교체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달 24일 <SNL코리아 시즌 8>의 메인 PD가 교체돼 의문을 낳고 있다.
CJ그룹 관계자는 CNB에 외압설과 관련해 “이미경 부회장은 정치적인 이유보다 이재현 회장과 같은 유전병인 CMT(샤르콧마리투스)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간 것”이라며 “주요 현안이 있을 땐 경영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경영 참여를 지속해왔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검찰 발표로 인해 오너 일가의 경영복귀설이 나오고 있지만, 이 회장과 이 부회장은 치료와 요양이 우선”이라고 덧붙였다.
대중문화평론가 구병두 교수(서경대)는 “VIP(박 대통령)는 어린 시절부터 민주주의와 단절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미디어 통제가 자유민주주의를 역행하는 초헌법적 발상이라는 생각을 가질 기회가 전혀 없었다”며 “자신에 대한 비판을 정치풍자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절대자에 대한 인격모독으로 생각한 데서 모든 문제가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CNB=김유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