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검사에 임명된 박영수 변호사가 30일 서울 서초구 자신의 로펌 사무실에서 기자들에게 각오를 밝히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검찰이 최순실씨 등과 엮인 기업들을 사실상 피해자로 규정해 뇌물 혐의를 적용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은 특검으로 넘어갔다. 특검수사팀은 박근혜 대통령과 기업들을 상대로 뇌물죄 여부에 관한 수사를 재개할 방침이라 재계가 긴장하고 있다. 특검은 왜 뇌물죄 입증에 매달리는 걸까. 기업들은 특검 수사에 어떻게 대응할까. (CNB=도기천 기자)
박근혜 중죄 입증할 히든카드 ‘뇌물죄’
특검 손에 쥔 野, 수사 가이드라인 제시
‘뇌물죄=쌍벌죄’ 재계 희생양 될 수도
박근혜 대통령이 30일 ‘최순실 특검’으로 야 3당이 추천한 조승식, 박영수 변호사 가운데 서울고검장 출신의 박 변호사를 임명하면서 초유의 슈퍼 특검이 공식 출범했다.
특검은 이미 검찰 수사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직권남용, 공무상 기밀누설 등의 혐의가 충분히 입증된 만큼, 박 대통령과 해당기업들에게 ‘제3자 뇌물공여’ 혐의를 추가하는데 수사력을 모을 것으로 전망된다.
뇌물공여는 공무원이 ‘부정한 청탁’을 받고 제3자에게 뇌물을 주도록 강요한 경우에 성립한다. 대통령이 최씨의 청탁에 의해 기업들에게 기금을 내라고 했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간 수사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지난해 7월과 올해 초에 걸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김창근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허창수 GS그룹 회장(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 10개 그룹 총수들과 독대했다. 면담 직후 기업들은 약속이나 한 듯 최씨가 실소유주인 미르·K스포츠재단에 수억~수십억원의 자금을 각자 출연했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대통령 면담 전 이들 기업에게 현안(민원) 자료를 내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들이 먼저 민원을 제시하고 최씨의 재단에 출연금을 냈다면 뇌물죄 성립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처럼 청와대가 기업들에게 먼저 민원을 제출하라고 했다면 뇌물죄를 적용하기 힘들 수 있다. 또한 대통령의 압력 행사에 어쩔 수 없이 돈을 냈다면 강요에 의한 것이라 기업들에게 책임을 묻기 힘들다. 검찰이 지난 20일 중간수사 발표에서 기업들을 사실상 피해자로 규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야당은 탄핵안 초안에 삼성, SK, 롯데 등 3개 기업을 박 대통령과 묶어 뇌물공여 혐의로 적시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운데),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왼쪽), 정의당 심상정 상임대표가 30일 국회에서 야3당 대표 회동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검찰 발표에 따르면 롯데그룹은 최씨와 안 전 수석으로부터 최씨가 실소유주인 K스포츠재단이 추진하는 하남 복합체육시설의 건립비용 70억원을 내놓으라는 강요를 받았다.
현대차그룹은 최씨의 지인이 운영하는 회사가 현대차에 11억원 규모의 납품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KT는 최씨 지인을 광고 발주를 담당하는 전무와 상무보로 채용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며, 최씨 소유 광고회사에 68억원 규모의 광고를 밀어줬다.
포스코그룹은 포스코 펜싱팀을 창단해 달라는 주문과 함께 최씨 소유 회사인 더블루케이가 펜싱팀의 매니지먼트를 맡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검찰이 발표한 4곳 외에도 여러 기업들이 협박·강요를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양호 한진그룹(대한항공) 회장은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다가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갑자기 해임됐는데 최씨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 화근이 됐다. CJ 이미경 부회장은 청와대로부터 사퇴압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와 안 전 수석은 세무조사 등을 빌미로 기업들을 협박했고, 일부 기업들은 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기업들이 협박·강요를 당한 부분이 확인되면서, 검찰은 끝내 뇌물 혐의를 적용하지 못한 채 특검으로 수사를 이첩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7월 청와대에서 열린 재계 총수·CEO들과의 간담회를 마치고 대화하며 함께 웃고 있다. 최순실과 기업들 간의 악연이 시작된 날이었다. (맨 앞줄 왼쪽부터)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허창수 GS그룹 회장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특검 칼날 앞에선 재계 “억울해”
상황이 이러함에도 특검이 뇌물죄를 추가하려는 이유는 뭘까.
검찰이 혐의 입증에 사실상 실패한 부분을 특검이 다시 수사하려는 데는 박 대통령이 타깃이 됐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번 특검팀을 지휘하는 박영수 변호사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정의당 등 야3당이 합의 추천한 인물이다. 야권은 박 대통령 탄핵안에 뇌물죄를 명시했다. 따라서 헌법재판소의 탄핵 소추 심리와 합치(合致)되기 위해서는 대통령에게 뇌물죄가 적용돼야 한다. 뇌물죄가 10년 이상의 징역형도 가능한 중범죄란 점도 야권이 공을 들이는 이유다.
뇌물죄는 양쪽 당사자를 모두 처벌하는 쌍벌죄다. 대통령에게 뇌물죄가 적용되면 기업들도 마찬가지 혐의가 적용된다. 특검이 기업들을 강력하게 수사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다보니 벌써부터 수사 가이드라인이 제시되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야당은 탄핵안 초안에 삼성, SK, 롯데 등 3개 기업을 박 대통령과 묶어 뇌물공여 혐의로 적시했는데, 해당 기업들은 이를 두고 국회가 특검 수사방향을 정해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삼성의 경우, 최씨의 딸 정유라 씨에게 승마 훈련 지원을 했다는 것 외에는 뚜렷이 입증된 사실이 없다.
특검의 출발로 재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기업들은 애초 정부의 문화융성 정책 취지에 공감해 자발적으로 기금을 출연했다고 주장하다가 현재는 청와대의 외압 탓에 어쩔 수 없이 돈을 냈다며 하소연하고 있다.
재계 고위관계자는 “제3자 뇌물공여죄가 성립되려면 기업 쪽에서 ‘부정한 청탁’이 먼저 있어야 하는데, 기업이 청탁을 목적으로 접근해 기금을 납부한 것은 결코 아니다”고 항변했다.
한편 재계는 박 대통령이 지난 29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임기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선언한 뒤 정치권에 묘한 속도조절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는 점에 기대를 걸고 있다. 탄핵안 통과가 늦춰질 경우, 특검 수사도 탄력을 받기 힘들게 되고 그리되면 뇌물죄 수사가 흐지부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