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7월 청와대에서 열린 재계 총수·CEO들과의 간담회를 마치고 대화하며 함께 웃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미르, K스포츠재단에 협조해 줄 것을 요구했다. 최순실과 기업의 악연이 시작된 날이었다. (맨 앞줄 왼쪽부터)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허창수 GS그룹 회장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최순실 씨가 대한민국 국정 전반을 쥐락펴락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온갖 루머가 기업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최씨가 실소유주인 미르·K스포츠재단이 재계를 상대로 강제모금을 벌이면서 시작된 이번 사태는 문화·교육·국방 등 여러 분야로 번지며 관련 기업들을 긴장 시키고 있다. 해당 기업 총수의 운명이 최씨 입에 달렸다는 말까지 나온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뜬소문일까. (CNB=도기천 기자)
‘아님말고’식 루머 일파만파
돈 뜯기고 의혹 받고 이중고
총수 운명 최순실 입에 달려
박근혜 대통령까지 개입된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커지면서 언론사들의 보도 경쟁이 치열하다. 같은 내용을 서로 단독·특종이라고 내세우는 경우도 잦고, 관계자의 말 한마디가 ‘팩트’로 둔갑하는 사례도 비일비재 하다. ‘아님말고’식 루머가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최씨와의 연루설에 휘말린 대기업이 10여 곳에 이른다.
우선 삼성그룹은 최씨의 딸 정유라의 승마 훈련을 후원한 것이 화근이 됐다. 삼성은 지난해 3월부터 박상진 삼성전자 사장이 대한승마협회장을 맡고 있는데, 정씨는 승마 국가대표다.
삼성 측은 “승마협회 회장사로서 승마 선수(정씨)를 지원한 것”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하고 있지만, 검찰은 삼성이 정씨의 말 구입비 등 35억원을 후원한 경위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
여기에 더해 삼성이 삼성테크윈과 삼성탈레스 등 방위산업 계열사를 한화그룹에 매각한 과정에 최씨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루머가 나돈다. 방산업체 매각은 정부 승인이 있어야 하는데 최씨가 이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이다.
하지만 삼성의 사업재편은 이미 2013년부터 시작됐었다. 제일모직의 패션사업부문을 삼성에버랜드에 넘긴 것을 시작으로 2014년에는 삼성SDS, 삼성에버랜드, 제일모직, 삼성SDI 등 핵심계열사들이 줄줄이 합병·이전 등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이런 가운데 2014년 11월 삼성은 방산·화학 계열사 4곳을 한화에 매각한다고 발표한다. 삼성이 정씨에게 35억원을 지원한 것은 이보다 약 1년 뒤인 지난해 9∼10월경이다. 시기로만 보면 정씨 후원과 방산업체 매각과의 연관성을 찾기 힘들다. 재계 한 관계자는 “검찰 수사 중이라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앞뒤 정황으로 볼 때 나가도 너무 나간 얘기 같다”고 전했다.
▲최순실 게이트가 문화·교육·국방 등 여러 분야로 번지며 여러 대기업들이 최씨와의 연루설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사진=CNB포토뱅크, 연합뉴스)
KT, 차은택 스캔들 곤혹
KT는 최씨 측근 차은택 씨와의 연루설에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지난 2∼9월 공개된 KT 영상 광고 24편 중 6편을 차씨 소유 회사인 아프리카픽쳐스가 제작했는데, 이를 두고 ‘문화계 황태자’로 불리는 차씨와 KT 간의 관계를 의심하는 눈길이 있다.
여기에는 KT의 IMC마케팅부문 전무가 차씨와 오랜 친분이 있다는 점, 최씨 게이트에 연루돼 구속된 안종범 전 청와대정책조정수석비서관이 창조경제추진단장을 지낸 차씨와 20년 이상 알고 지낸 사이라는 점 등이 배경이 되고 있다.
하지만 통상 대기업 광고 제작은 중간에 대행사를 끼고 진행된다. KT는 CNB에 “아프리카픽쳐스는 2003년부터 광고대행사를 통해 KT, KTF 광고를 수주해 왔다”며 “대행사가 제작사(아프리카픽쳐스)를 선정하는 과정에 KT가 관여할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KT가 개입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얘기다.
KT는 또 미르·K스포츠에 18억원을 출연하는 과정에 이사회 승인이 없었다는 의심을 받았다. KT 새노조는 절차 없이 자금을 출연한 것은 횡령·배임에 해당된다며 황창규 KT 회장 등을 지난 6일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하지만 확인 결과 지난해 12월 이사회에서 자금 집행이 승인됐고,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도 이 같은 사실이 공시됐다.
한화, 방위산업에 불똥
국내 최대 방산기업인 한화그룹은 한화탈레스(현 한화시스템)가 올 4월 한국형 전투기(KFX)에 탑재될 능동주사배열(AESA) 레이더 개발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는 과정에서 최씨의 도움을 받은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당시 입찰 때 LIG넥스원이 한화탈레스보다 기술력이 앞선다는 게 중론이었는데 국방부가 한화탈레스를 선택한 점이 석연치 않다는 것.
이런 의혹에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셋째 아들인 김동선 한화건설 신성장전략팀장이 최씨의 딸 정유라와 같은 승마 국가대표라는 점이 배경이 됐다.
그러자 방위사업청은 지난 4일 해명자료를 통해 “우선협상대상자는 기술능력과 비용점수 등을 종합하여 선정하였으며, 한화탈레스가 비용평가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아 최종업체로 선정됐다”며 직접 진화에 나섰다.
한화는 또 이 과정에서 검찰수사에 대비해 대부분의 자료를 폐기했다는 의혹도 받았다. 장시권 한화시스템 사장이 팀장급 회의를 소집해 진행 중인 업무 외의 모든 자료를 폐기·소각하라고 지시했다는 것.
한화그룹 관계자는 CNB에 “방산업체 특성상 ‘방위산업보안업무훈령’ 지침에 따라 데이터를 매일 삭제한다”며 “늘 하던 대로 보안문서를 파기한 것뿐인데, 최순실 의혹과 엮여서 오해를 받고 있어 억울하다”고 전했다.
▲자료=재벌닷컴, 경제개혁연대 / 그래픽=연합뉴스
부영, 회의록 한 줄 때문에
부영그룹은 안 전 수석과의 대화 내용이 담긴 K스포츠재단의 회의록이 공개돼 곤란을 겪고 있다. 이 회의록은 지난 2월 K스포츠 정현식 전 사무총장이 안 전 수석에게 보고하기 위해 작성했다.
회의록에 따르면, 안 전 수석은 정 전 사무총장과 함께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을 만나 K스포츠 하남 거점 시설 건립을 지원해 달라며 70억∼80억원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이 회장은 안 전 수석에게 ‘국세청 세무조사 편의’를 부탁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당시 부영은 지난해 12월께부터 세무조사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부영은 끝내 안 전 수석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부영 관계자는 CNB에 “정말 청탁 목적이었으면 왜 기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겠느냐”며 “이중근 회장은 당시 자리에서 회사 사정이 어려워서 지원할 수 없다고 분명히 거절 했는데, 왜 이런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롯데·SK, 오비이락?
롯데는 검찰 수사를 앞둔 시점에 최씨 측과 접촉했다는 점에서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롯데 측에 따르면, 정 전 사무총장은 직접 롯데 본사를 찾아가 소진세 롯데그룹 정책본부 대외협력단장(사장)을 만나 기금 출연을 요구했다. 이후 롯데케미칼 등 6개 계열사가 총 70억원을 K스포츠에 송금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송금 열흘 만에 K스포츠는 이 돈을 롯데에 돌려줬다.
돈이 오간 시점이 검찰이 롯데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압수수색에 들어간 6월 10일 직전이었다는 점에서, 롯데가 모종의 대가를 바란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더구나 신 회장이 2월 말~3월 초쯤 박 대통령과 독대했다는 언론보도가 나오면서 롯데를 더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롯데 측은 ‘피해자’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법적 문제가 불거질까봐 검찰 수사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SK도 최태원 회장의 동생 최재원 수석부회장이 수감 중인 때에 최씨 측을 만났다는 점에서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정 전 사무총장의 주장에 따르면, 올해 초 K스포츠 측은 SK그룹에 80억원을 출자해 줄 것을 요구했다. SK가 30억원만 지원하겠다고 하자 최씨가 받지 말라고 했다. 서로 간에 오간 게 없지만 최재원 부회장 사면을 놓고 청탁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기업들에게 외압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정권 실세들.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검찰조사를 받으러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을 오가고 있다. 왼쪽부터 차은택 전 창조경제추진단장, 최순실씨, 안종범 전 청와대정책조정수석비서관. (사진=연합뉴스)
한진·CJ, 되레 ‘최순실 효과’
이처럼 최씨와 ‘옷깃만 스쳐도’ 논란이 일고 있지만, 해당 기업들이 전부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몇몇 재벌 총수는 소신 있는 태도가 알려지면서 되레 ‘최순실 효과’를 누리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다가 문화관광체육부로부터 해임된 조양호 한진그룹(대한항공) 회장의 경우다.
조 회장은 문체부로부터 600억원 규모의 평창올림픽 부속시설 공사를 최씨 회사 더블루케이와 업무 협약을 맺은 스위스 건설업체 누슬리에게 맡기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끝내 거부했다. 이미 개·폐회식장 공사를 대림산업이 따 낸 상황에서 굳이 부속시설 공사업체를 따로 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진그룹은 K스포츠에 기부금도 내지 않았다. 조 회장은 결국 지난 5월 위원장직에서 해임됐다. 이를 두고 ‘최순실에게 밉보였기 때문’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권오준 포스코 회장도 나름 소신을 지킨 것으로 평가된다. K스포츠재단의 회의록에 따르면 포스코는 최씨 측으로부터 수차례 배드민턴단을 창단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하지만 당시 회사가 위기상황이었던 포스코는 끝내 안 전 수석의 요구를 거부했다.
CJ그룹도 현 정권 들어 미운털이 박혀 온갖 불이익을 당했다는 얘기가 회자되고 있다. 이재현 회장이 배임 등 혐의로 구속된 직후인 2013년 말 조원동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손경식 CJ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너무 늦으면 난리 난다”며 이미경 부회장의 퇴진을 요구한 녹음 파일이 공개된 상태다.
조 전 수석은 손 회장에게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에서 물러나라고 압력을 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손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청와대의 견제는 계속됐다. 2014년 1월 대한상의 주최 경제계 신년인사회에서 재계 서열 13위인 CJ그룹의 손 회장이 헤드테이블에 앉지도 못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최근에는 지난 6월 프랑스를 국빈 방문 중이던 박근혜 대통령이 파리에서 열린 CJ그룹 주최 한류 콘서트에 참석하면서 청와대가 이 부회장은 참석하지 말라고 CJ 측에 요청했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
현 정부가 이처럼 CJ를 미워한 이유는 지난 대선 당시 ‘SNL 코리아’ 등 자사 방송채널의 개그 프로에서 박 대통령을 희화화하고, 야권 지지층을 자극한 영화 ‘광해’와 ‘변호인’을 배급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로 인해 야권 지지층은 물론 국민들 사이에는 CJ에 대한 동정론이 확산되고 있다.
“말(馬)이 말(言)을 만들고 있다”
한편 검찰(최순실게이트 특별수사본부)은 기업과 관련된 각종 의혹들에 대해 전면적인 수사를 벌이고 있다. 최씨 일당과 안 전 수석이 전국경제인연합회를 통해 19개 그룹으로부터 774억원을 강제 모금한 혐의는 물론 개별적으로 기업 총수들을 접촉한 부분에 대해서도 조사를 진행 중이다.
최씨 일당이 해당 기업이 자발적으로 접근해왔다고 진술할 경우, 재계에 엄청난 후폭풍이 예상된다. 자발적이었다는 얘기는 곧 대가를 바랬다는 의미라 사법처리가 불가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최씨 측이 외압을 행사한 부분이 부각되면 기업은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여러 기업의 운명이 최씨와 안 전 수석의 입에 달린 셈이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인들 사이에는 말(馬)에서 시작돼 말(馬)이 말(言)을 만들고 있다는 웃지못할 얘기가 회자되고 있다. 나라 경제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검찰이 기업에 더 큰 피해가 없도록 신속하게 수사를 마무리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재벌사>의 저자 이한구 교수(수원대)는 CNB에 “부정청탁이냐 외압의 피해자냐를 따지는 건 사실상 종이 한 장 차이”라며 “이런 문제가 근본적으로는 해소되려면 정경유착의 깊은 뿌리를 뽑아낼 수 있는 강력한 사회규범이 시급히 만들어져야한다”고 지적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