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실세’로 군림하다 구속된 최순실씨가 4일 서울중앙지검에서 조사를 마친 뒤 구치소로 돌아가기 위해 호송버스에 탑승하고 있다(왼쪽). 같은 날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국정 농단’ 파문에 관한 대국민담화를 마친 뒤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대한민국을 바꾸는 일이라며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의 제정을 촉구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정작 자신은 이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해온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청와대 공무원들이 ‘비선실세’ 최순실 씨를 앞세워 대기업들에게 금품을 요구하는 과정에 박 대통령이 깊숙이 관여했기 때문이다. 대기업 모금이 김영란법 시행 이전에 이뤄졌다지만 이미 이 법이 지난해 3월 공포돼 유예기간 중이었다는 점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CNB가 김영란법으로 미르·K스포츠재단의 대기업 강제모금 행위를 따져봤다. (CNB=도기천 기자)
공무원이 대기업에 “돈 내라” 김영란법 위반
청와대·최순실, 부영·롯데·SK·포스코 상대 압박
청탁금지 강조했던 朴대통령 스스로 법어긴 셈
김영란법은 2014년 5월 박 대통령이 대국민담화 통해 통과를 촉구했던 법이다. 박 대통령은 국회의장에게 직접 처리를 부탁할 정도로 이 법에 공을 들였다. 시행 직후인 지난달에는 “부작용만 부각돼선 안 될 것”이라며 언론·정치권 일각의 비판 목소리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청와대는 기자들에게 ‘김영란법’ 대신 ‘청탁금지법’이란 용어를 사용해 달라고 주문했다. 김영란씨가 참여정부와 이명박정부에서 대법관, 국민권익위 위원장을 지냈다는 점에서 현 정부의 공로가 묻힐까봐 정정을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과 일부 청와대 보좌진은 이 법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를 해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김영란법은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직원, 공직자가 직무 관련성과 상관없이 1회 100만원(연간 300만원)을 초과하는 금품을 받으면 형사처벌토록 규정하고 있다. 3년 이하의 징역,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공무원이 민원인에게 잘 봐주겠다며 금품을 요구하는 행위는 물론 언론사가 행사나 기사를 빌미로 기업에게 광고를 요구하는 행위도 처벌된다. 설령 대가를 받지 못했더라도 청탁행위 자체만으로 처벌이 가능하다는 게 권익위의 유권해석이다.
이런 측면에서 현재 정국을 달구고 있는 박 대통령과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등의 대기업 강제모금 행위는 명백히 김영란법에 위배된다.
검찰과 재계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지난해 7월 24~25일 이틀에 걸쳐 대기업 총수들을 만나 미르, K스포츠재단에 협조해 줄 것을 요구했다. 대기업 총수 17명과 점심을 갖는가하면 삼성 이재용, 현대자동차 정몽구, SK 김창근, LG 구본무, 롯데 신동빈 등 총수 7명은 따로 청와대로 불러 재차 지원을 당부했다.
그 뒤 안 전 수석(당시 경제수석)이 매출, 자산규모 등을 따져 기업별 모금액을 정했다. 검찰은 청와대 관계자의 집을 압수수색해 이런 내용이 담긴 각종 자료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인 증거자료는 지난 2월 안 전 수석 등이 기업인들을 만난 직후 작성된 회의록이다. 이 회의록은 K스포츠 측이 안 전 수석에게 보고하기 위해 작성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위 오른쪽)은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을 당시 최순실씨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위원장직에서 해임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CJ, 포스코, 롯데 등이 미르·K스포츠재단의 모금 과정 등에서 청와대 또는 최씨 측과 마찰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CNB포토뱅크, 연합뉴스)
“넌 부지 사줘, 넌 건물 지어” 대놓고 압박
회의록에 따르면 안 전 수석은 K스포츠 정현식 전 사무총장, 박모 과장 등과 함께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을 만나 K스포츠 하남 거점 시설 건립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했다. 대략 70억∼80억원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부영은 이미 3억원을 K스포츠에 낸 상태였다. 이 회장은 “최선을 다해서 돕겠다”고 해놓고 시간을 끌다가 결국 돈을 내지 않았다.
같은 회의록에는 포스코도 거명된다. 정 전 사무총장은 황은영 포스코 사장을 만나 포스코가 배드민턴단을 창단해 줄 것을 요구했다. K스포츠를 통해 대기업 스포츠단들을 관장하고 이를 구실로 협찬이나 기금 등을 요구하려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황 사장이 이를 거부하자 안 전 수석이 직접 나서 포스코 측에 전화를 걸어 다시 한번 협조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회사가 위기상황이었던 포스코는 끝내 안 전 수석의 요구를 거부했다.
포스코 관계자는 CNB에 “이미 프로축구팀을 운영하고 있는데다 구조조정 등 조직을 줄이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스포츠단을 창단할 여력도 생각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얼마 뒤 롯데그룹에도 손을 뻗었다. 롯데 측에 따르면, 정 전 사무총장은 “엘리트 스포츠 육성을 위해 제안할 일이 있다”며 직접 롯데 본사를 찾아가 소진세 롯데그룹 정책본부 대외협력단장(사장)을 면담했다. 이후 롯데케미칼 등 6개 계열사가 총 70억원을 K스포츠에 송금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송금 열흘 만에 K스포츠는 롯데에 이 돈을 돌려줬다. 재계에서는 롯데에 대한 검찰의 대대적 압수수색(6월 10일 개시)이 임박했다는 수사 정보를 미리 입수한 최씨 측이 ‘뒤탈’을 염려해 반환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최씨 일당은 비슷한 시기 SK그룹에도 80억원을 요구했다. 정 전 사무총장의 주장에 따르면, SK그룹이 30억원만 지원하겠다고 하자 최씨가 받지 말라고 했다. 당시 최태원 SK 회장의 동생 최재원 수석부회장은 2014년 2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6개월이 확정돼 수감 중이었다. 최씨 측은 이런 약점을 잡고 접근한 것으로 짐작된다.

▲노컷뉴스가 공개한 K스포츠재단의 대기업 모금 관련 회의록.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모금을 주도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최순실·안종범, 돈 안낸 기업 조졌나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던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지난 5월 위원장직에서 해임된 이유를 ‘최순실에게 밉보였기 때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600억원 규모의 평창올림픽 부속시설 공사권과 관련해 문화체육관광부는 최씨 회사 더블루케이와 업무 협약을 맺은 스위스 건설업체 누슬리를 선택하라고 노골적으로 위원회에 압력을 가했지만, 조 위원장은 끝내 거부했다. 이미 개·폐회식장 공사를 대림산업이 따 낸 상황에서 굳이 부속시설 공사업체를 따로 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 위원장의 한진그룹이 K스포츠에 기부금을 한 푼도 내지 않은 점도 경질 사유로 꼽힌다.
이밖에 CJ그룹도 현 정권 들어 미운털이 박혀 갖은 압력과 불이익을 당했다는 얘기가 회자되고 있다. CJ가 지난 대선 당시 ‘SNL 코리아’ 등 자사 방송채널의 개그 프로에서 박 대통령을 희화화하고, 야권 지지층을 자극한 영화 ‘광해’와 ‘변호인’을 배급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돈다.

▲자료=재벌닷컴, 경제개혁연대 / 그래픽=연합뉴스
재벌닷컴과 경제개혁연대에 따르면 미르·K스포츠에 자금을 출연한 기업은 모두 53개사에 이른다.
이 중 현대자동차, SK하이닉스, 삼성전자, 삼성생명, 삼성화재, 포스코, LG화학, 현대모비스, 호텔롯데, 기아자동차, SK종합화학, SK텔레콤, KT, LG디스플레이, 롯데케미칼, 삼성물산, 한화, GS칼텍스, 에스원, 제일기획, 한화생명, 대한항공, E1 등 23개사는 10억원 이상을 기부했다.
물론 해당 기업들이 전부 최씨 일당의 강압에 의해 돈을 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지난해 수백~수척억원 대의 적자를 낸 기업들까지 수억원씩 출자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외압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진해운 사태의 여파로 2년 연속 수천억원대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대한항공이 10억원을 기부한 것을 비롯, 두산중공업(4억원) 두산(7억원) CJ E&M(8억원) GS건설(7억8천만원) 아시아나항공(3억원) GS글로벌(2억5천만원) 금호타이어(4억원), LS니꼬동제련(2억4천만원), GS이앤알(2억3천만원) LG전자(1억8천만원), LS엠트론(6200만원) 등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한 대기업 홍보실 관계자는 CNB에 “경기불황이 계속되면서 대다수 기업들이 홍보·사회적책임(CSR) 비용을 대폭 삭감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규모 모금이 이뤄졌다는 건 외풍 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귀뜸했다.
재계, 돈 뜯기고 의혹 받고
최씨 일당의 모금 시기는 김영란법이 제정된 이후다. 미르 재단은 지난해 10월, K스포츠 재단은 올해 1월 각각 출범했으며 이 직후부터 기업들에 대한 강제 출자가 시작됐다. 김영란법은 지난해 3월 공포된 후 18개월 간의 유예기간을 거쳐 9월 28일부터 시행됐다. 최씨 일당은 유예기간에 법을 위반했으므로 이 법으로 처벌 받지는 않는다. 최씨와 안 전 수석 등은 직권남용과 강요죄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정부가 법안 통과에 앞장서왔고 청탁금지의 취지와 정신을 강조해 왔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분노는 더 커지고 있다. 앞뒤 정황으로 볼 때, 최순실게이트가 불거지지 않았다면 김영란법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의 강제모금이 계속됐을 가능성이 높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지난 3일 세계변호사협회(IBA)가 개최한 ‘아시아태평양 반부패 콘퍼런스’의 기조연설에서 “요즘 보면 어떤 법리를 구상해서라도 측근을 이용한 리더에게 직접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국정 농단에 대한 대통령의 책임을 언급하기도 했다.

▲청와대가 개입된 대기업 강제모금은 김영란법 제정 이후에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이참에 정경유착 끊자”
한편 기업들도 이번 사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기업들은 ‘피해자’라는 입장을 내비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특혜를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출연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당시 롯데그룹은 검찰 수사를 앞두고 있었고, 부영그룹은 세무 조사 진행 중이었으며, SK그룹은 최재원 부회장이 수감 중이었다. 청와대와 최씨는 이런 약점을 잡아 돈을 내라고 요구했고 기업들은 대가를 바랬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재벌사>의 저자 이한구 교수(수원대)는 CNB에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관피아를 척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 영향으로 김영란법이 제정됐지만 되레 예전보다 더한 정경유착이 드러난 사건이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라며 “제왕적 관치의 폐해를 일벌백계하지 않으면 제2, 제3의 최순실은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대중문화평론가 구병두 교수(서경대)는 “고마움의 표시로 경찰관에게 4만5천원짜리 떡을 돌렸다가 김영란법으로 처벌받은 시민이 이 나라를 어떻게 생각할 지를 생각해야 한다. 최씨 일당은 물론 박 대통령까지 철저하게 조사하지 않는다면 국민적 분노가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