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9월 25일 제1회 저축의 날 행사가 열리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오늘(25일)이 ‘저축의 날’임을 아는 국민은 많지 않다. 가계부채가 사상 최대치인 1100조원을 넘어선 상황에서 저축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1%대 초저금리 시대가 계속되면서 은행은 재테크 수단으로서의 매력을 완전히 잃었다. 올해 초 ‘국민 재테크 통장’으로 출발한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도 외면 받긴 마찬가지다. 갈 곳 없는 돈은 저축은행에만 몰리고 있다. 머쓱해진 금융당국은 올해부터 ‘금융의 날’로 이름을 바꿨다. ‘저축’이란 단어는 이제 역사 속에만 존재하는 걸까. (CNB=도기천 기자)
1%대 저금리, 가계부채 1200조
저축은 언감생심, 빚도 못 갚아
대출 장사로 저축은행만 고고씽
1964년 9월 25일 탄생한 저축의 날은 올해로 53년째를 맞고 있다. 10년째가 되던 1973년부터 10월 25일로 미뤄졌고, 전에 따로 지정됐던 ‘증권의 날’과 ‘보험의 날’이 저축의 날로 합쳐졌다. 올해 행사부터는 ‘금융의 날’로 간판이 바뀌었다.
내 집 마련 붐이 일던 70~80년대에 ‘저축’은 최전성기를 맞았다. 대부분 직장인들이 주택은행(현 KB국민은행) 통장 한 개씩은 갖고 있었고, 학교에서는 해마다 ‘저축 왕’을 뽑아 상을 줬다.
드라마 응팔(응답하라1988)에서는 이웃들이 덕선이 아빠(성동일)에게 “금리 그까짓 거 얼마나 된다고 은행에 맡기냐”고 핀잔주는 장면이 나온다. 한일은행 직원인 성동일은 멋쩍어하며 “하긴 15프로 밖에 안 되긴 하지만”이라고 말한다. 예금금리 연15% 시절의 풍경이다.
2008년경부터 한국은행 기준금리는 계속 내려가 현재는 사상최저인 연1.25%다. 저금리는 가계대출을 급격히 늘리는 역할을 했다.
전세가격이 폭등하자 싼 이자로 빚을 내 집을 사는 사람이 늘었고, 그 결과 가계부채가 1200조원에 다다르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지난해 말 기준 88.4%로 13년째 비교 대상 신흥국 중 1위다. 1년 새 가계부채 증가 폭도 신흥국 중 가장 컸다. 전문가들은 올해 안에 가계부채가 1300조원을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드라마 응팔에서는 한일은행 직원 성동일(오른쪽)이 “금리가 15% 밖에 안된다”고 푸념하는 장면이 나온다. 현재 한국은행 기준금리는 사상최저인 연1.25%다. (사진=tvN 응팔 캡쳐)
저축이 웬 말? ‘슬픈 저축상’
금융권에서는 소비 위축으로 경기 회복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에서 저축을 권유하는 건 현 경제 실정에 맞지 않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실제로 저축의 날 특판예금 상품을 내놓은 시중은행은 KEB하나은행 한 곳뿐이다. 그나마 연1.7%에 불과하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저축의 날 시즌이 되면 은행들은 앞다퉈 특판예금을 내놨다. 금액이 크면 지점장 전결로 이자를 1% 가량 더 얹어주기도 했다. KB국민·NH농협·신한·우리은행 등 주요 은행들이 마지막으로 저축의 날 특판을 출시한 것은 4~5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불황 탓에 투자처를 찾지 못한 돈은 대기자금으로 머물거나 시중은행보다 조금이라도 금리가 높은 저축은행에 몰리고 있다.
예금보험공사에 따르면, 2분기 기준 은행의 수시입출금식예금(요구불예금) 잔액은 189조5000만원(2분기 기준)이다. 전체 예금의 10%에 달한다.
저축은행의 5천만원 초과 예금은 2년 전과 비교해 2배 가량 늘어난 5조821억원이었다. 5천만원 초과 예금자 수도 4만1천명으로 2년 전(2만1천명) 보다 2배 가까이 늘었다. 저금리로 그나마 금리가 나은 저축은행에 돈이 몰리기 때문. 저축은행중앙회에 따르면 저축은행의 1년 만기 정기예금의 평균 금리는 연 2.04%로 은행보다 0.5%가량 높다.
저축은행들은 몰려든 돈으로 대출 장사를 벌여 꽤 재미가 쏠쏠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저축은행 79곳의 올해 상반기 순이익은 4837억원으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74.1%나 늘었다.
특히 일본계 저축은행들의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SBI저축은행 OK저축은행 JT친애저축은행 등 5개 일본계 저축은행의 총자산(6월말 기준)은 11조4761억원으로 국내 저축은행 총자산의 4분의 1에 육박하는 24.14%에 달했다.
▲갈 곳 없는 자금이 금리가 조금이라도 높은 저축은행에 몰리면서 저축은행들은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부는 또 달나라 얘기
정부는 시중은행의 정기 예·적금이 줄어든 이유를 국민의 재산형성 방식이 다양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펀드·연금저축 등 상품이 다양해졌고 핀테크(금융+IT)의 발달로 금융환경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
금융당국 관계자는 “금융의 역할이 기술금융, 보험투자자본, 서민금융 등으로 확대돼 금융환경이 변하고 있다. 은행 예·적금만으로 국민의 저축 상황을 평가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하지만 올 들어 정부가 ‘국민 재테크 통장’이라며 야심차게 내놓은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도 서민들로부터 홀대 받기는 마찬 가지다.
ISA는 저금리·저성장으로 목돈 만들기가 힘든 시대에 개인의 재산형성을 지원한다는 취지로 지난 3월 출발했다. 하나의 계좌로 예·적금은 물론 주식·펀드·ELS 등 파생상품 투자가 가능하다. 금융당국의 말대로라면 달라진 금융환경에 적합한 상품이다.
▲정부는 은행 예·적금의 대안으로 지난 3월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를 출시했지만 ISA가 ‘직장인 자산가’들의 재테크 창구로 전락하면서 갈수록 가입자가 줄고 있다. (단위:명, 자료=ISA다모아)
금융위원회가 지난달 발표한 ‘ISA 출시 6개월 성과 및 향후계획’에 따르면 ISA 출시 6개월 동안 240만 계좌가 개설됐는데, 이 중 잔고가 1000만원 넘는 계좌는 전체의 3.8%(9만1000개)에 불과했다. 대부분(78.8%) 계좌는 10만원 이하의 소액이었다. 가입자 수도 점점 줄어 지난 7월 가입자 수는 전월과 비교해 92.4%나 감소했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CNB에 “대출이자 내기에도 빠듯한 현실에서 세금 혜택 몇 푼 보자고 ISA에 목돈을 투자할 사람은 몇 안 된다”며 “더구나 ISA주식형은 주가가 제자리걸음이다 보니 대부분 상품이 예금이자보다 못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최근 오른 전세금 때문에 9년간 부어온 적금을 깼다는 최모(51)씨는 “(예·적금 감소와 관련된) 정부의 진단은 항상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며 “주택 문제, 가계부채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 한 어떤 상품을 내놓든 투자할 여력이 없다. 설령 새로운 금융상품에 자금이 몰리더라도 자산가들 얘기지, 서민과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라고 꼬집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