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원씨가 경영하고 있는 더본코리아의 특혜의혹을 제기한 이찬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왼쪽)과 요리연구가 백종원씨. (사진=연합뉴스)
불러놓고 보자는 식의 증인 요구, 저인망식 자료 모으기…. 이번 국정감사에서도 아님말고식 폭로와 망신주기식 질의가 계속되면서 재계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국회에 불려나갈 기업인은 총수를 포함해 수백여명이 이른다. 의원들의 윽박지르기에 대기업 총수가 고개를 떨구고 있는 풍경은 익숙해진지 오래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매년 이런 식의 통과의례가 되풀이되는 이유는 뭘까. (CNB=도기천 기자)
또 ‘골목상권’ 얘기…철지난 유행가
아님말고식 폭로에 호통·막말 되풀이
‘국감 스타’는 옛말, 성실히 준비해야
해마다 계속되고 있는 병폐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자료만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분석이 부실하다보니 ‘일단 튀고 보자’는 심리에 무리수를 두거나 함량 미달의 질문만 늘어놓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기 요리연구가 백종원의 ‘더본코리아’다. 백씨가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피했다는 지적이 이번 국정감사 중에 나왔지만 법조계에서는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고 있다.
논란은 지난달 29일 더민주 이찬열 의원이 산업통상자원위 국감에서 “문어발식 사업 확장으로 영세 자영업자들을 궁지로 몰고 있는 더본코리아가 음식점이 아닌 도소매 중소기업으로 분류돼 각종 규제를 피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이 의원이 중소기업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더본코리아는 2016년 9월 현재 1267개의 직영점과 가맹점을 운영 중이다. 최근 3년간 평균 매출액은 980억원이다.
중소기업기본법 시행령에 따르면 ‘도·소매업은 3년 평균 매출액 1000억원 이하, 음식점업은 400억원 이하’면 중소기업에 해당한다. 이 금액 이상이면 대기업으로 분류돼 출점제한 등 각종 규제를 받게 된다.
이 의원은 더본을 음식점업으로 분류해 규제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더본의 대부분 매출은 가맹사업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음식점 경영이 아닌 가맹점에 공급하는 식자재 유통을 통해 대부분 수익이 나오고 있다는 얘기다.
중소기업청도 이런 점을 보고 더본코리아를 도·소매업으로 분류했다. 백씨 측은 “고의적으로 법을 피한 게 아니라, 법에 따라 중소기업으로 분류된 것”이라고 밝혔다.
더본이 골목상권을 침해한다는 주장도 논리가 빈약해 보인다. 더본의 가맹점주들은 개인사업자다. 약간의 가맹점 비용을 제외한 대부분 수익은 가맹점주의 몫이다. 따라서 이들 또한 소상인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백씨의 외식사업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해 국감 때는 더본코리아가 국세청 세무 조사를 받은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백씨의 탈세 의혹이 불거졌지만, 조사결과 아무런 혐의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처럼 국감 때마다 백씨가 화두에 오르는 것은 의원들의 ‘한건주의’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한 전직 보좌관은 CNB에 “국감 때마다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짜릿한 소재를 찾는데 혈안이 된다”며 “골목상권 침해는 의원들이 선호하는 단골 메뉴인데, 여기에 유명인 백씨가 맞물려 타깃이 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의 해양수산부 국감에 증인으로 출석해 눈물을 훔치고 있는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전 한진해운 회장). 의원들의 질타가 계속되자 무릎을 꿇고 통곡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재료만 좋으면 앞뒤 안가려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된 책임을 물어 전 한진해운 회장인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을 국감장에 불러낸 것을 두고도 포퓰리즘적 행태라는 비판이 나온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 국감에서 야당 의원들은 최 회장의 재산과 배당수익을 따져 물으며 사재출연 등 책임있는 자세를 보이라고 압박했다. 국적선사인 한진해운은 현재 파산 직전까지 간 상태로 긴급수혈 없이는 정상운영이 불가능한 상태다.
이에 최 회장이 “법정관리까지 가게 된 상황은 현 경영진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반박하자, 의원들은 “반성하는 자세가 아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최 회장은 격한 감정을 드러내며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쏟았다.
앞뒤를 따져보면, 이번 한진해운 사태는 최 회장과 사실상 무관하다.
고(故)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의 부인인 최 회장은 2007년부터 한진해운의 경영을 맡았지만 고전하다 2014년 경영권을 시숙인 조양호 한진그룹(대한항공) 회장에게 넘겼다. 당시 한진해운은 지주회사인 한진해운홀딩스에서 분리됐으며 이후 한진해운홀딩스는 유수홀딩스로 명칭을 바꿨다. 따라서 최 회장이 경영하고 있는 유수홀딩스와 한진해운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
더구나 지난 4월 최 회장 일가는 마지막까지 갖고 있던 한진해운 지분 0.39%(약31억원 규모)을 모두 팔았다. 이후 한진해운은 자율협약을 거쳐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이처럼 최 회장이 법적으로 책임질 부분은 없음에도 일부 의원들은 한진해운이 국민적 관심사라는 점에서 최 회장을 불러내 망신을 준 것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집에 불이 났는데, 전 주인에게 물어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현 경영주와 이런 사태가 올 것을 알고도 법정행을 택한 채권단에게 먼저 책임을 묻는 게 순서”라고 꼬집었다.
정부가 사드 후보지로 낙점한 경북 성주 롯데골프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엮으려는 시도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우상호 더민주 원내대표와 김기식 정책특보는 6일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에서 “정부가 롯데골프장을 헐값에 사들이면, 롯데 신동빈 회장이 배임죄를 짓게 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일부 의원들은 이번 국감 때 이 문제를 정식질의 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사드’와 ‘롯데’라는 두 가지 큰 재료를 활용해 무리하게 시선을 끌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지난해 9월 국회 정무위원회의 공정거래위원회 국감에서 증인으로 참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탕주의’ 환상 버려야
이런 ‘정책 없는 국감’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해 국감 때는 여야 할 것 없이 ‘재벌개혁’을 내세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및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등 재계 10위권 내 총수들 전부를 국감장에 세우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막상 불러내 놓고는 “한·일 축구전에서 누굴 응원하겠느냐”는 황당질문을 던지는가 하면, 노골적으로 지역구 민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무산되긴 했지만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을 국감장에 세우려는 시도도 있었다. 일명 ‘땅콩회항’ 사건을 일으킨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지난해 국감 당시 대법원 선고를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대한항공은 물론 모든 계열사 직위에서 물러나 자숙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음에도 일부 의원들은 그녀를 카메라 앞에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됐었다.
‘재계 호통치기 국감’의 분수령은 오는 11일로 예정된 국회 정무위원회의 공정거래위원회 국감이 될 예정이다. 정무위는 재계 CEO 9명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김용회 삼성전자 부사장과 곽진 현대자동차그룹 부사장은 단가 후려치기 및 대리점 불공정 행위 등의 이유로 불려 나간다.
우무현 GS건설 부사장은 하도급업체 대금 미지급 문제로, 김헌탁 두산중공업 부사장은 특별사면 후 건설공익재단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최규복 유한킴벌리 대표이사는 제품 가격 인상 문제로 출석한다.
이들이 국감장에서 해결책을 내놓더라도 실제 이행될 지는 미지수다. 과거 국감 사례를 보면 약속이 지켜진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 결국 이번 국감도 의원들의 ‘얼굴 알리기’ 수단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아님말고식 폭로에 호통·막말 되풀이되고 있는 국정감사 풍경은 익숙해진지 오래다. 6일 국회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전국 광역시 교육청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증인채택 문제를 놓고 여야가 신경전을 벌이는 바람에 의원석은 비어있고 불려나간 증인들만 자리를 채우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여야정쟁→준비부족→한건주의
이처럼 국감이 제 기능을 못하는 데는 ‘진영 논리’가 배경이 되고 있다.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 사드 문제 등 굵직한 현안을 두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 하는 동안 국감 준비는 뒷전이 되고 있다는 것. 이러다 국감이 코앞에 닥치면 급한 마음에 ‘한건’하려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민주화시대 초기에 마련된 국감 제도를 현실에 맞게 바꿀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국감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성과로 이듬해 부활해 올해가 29년째다.
대중평론가 구병두 교수(교육학)는 CNB에 “군사독재시절의 끝물에 시작된 국감은 정경유착과 각종 비리를 파헤치는 청문회 기능을 했지만, 정보가 차고 넘치는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며 “상임위원회 차원에서 수시로 국정 현안을 점검하는 ‘상시 국감’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