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산업은행이 한진해운의 법정관리를 서둘러 신청한 것을 두고 국회 청문회를 의식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부산항운노조, 한국선용품산업협회, 부산항만산업협회, 도선사회 등 항만관련 단체들이 지난달 31일 ‘한진해운 살리기 범시민대회’를 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부와 산업은행이 대우조선해양 부실지원 의혹을 규명할 국회 청문회를 앞두고 한진해운의 법정관리를 서두른 것과 관련, 조선·해운 정책 전반에 대한 야권의 질타를 최소화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청문회를 의식해 법정관리행을 서두르다보니 예측분석과 대응이 늦어져 후유증을 키웠다는 지적이다. (CNB=도기천 기자)
청문회서 해운업 부실지원 도마 위
‘한진해운 봐주기 의혹’ 사전 차단
이른 법정행, 대우조선 면피용 된셈
한진해운에 대한 채권단의 법정관리 신청은 의외로 신속했다. 한진그룹은 지난 4월 한진해운에 대한 채권단 자율협약을 신청했고, 협약 만료일은 지난 4일이었다. 자율협약은 법적 구속력 없이 채권단과 기업 간 협의를 통해 자구책을 마련하는 행위다.
한진그룹은 채권단과의 협의과정에서 터미널·사옥 등을 팔아 4112억원을 마련하겠다고 제안했고, 이후 베트남 터미널 지분 매각 등을 통해 1700억원 규모의 유동성을 확보했다.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이 ‘눈에 안 찬다’며 7000억원의 자금 조달을 요구하자 1000억원 규모의 추가 유동성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산은은 지난달 31일 한진해운의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당시 업계에서는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로 가더라도 협약만료시점인 4일 이후가 될 것이라는 견해가 많았다. 물류대란 등 산업계 전반에 미칠 영향이 상당할 것으로 우려됐기 때문에 막판까지 한진그룹 측과 줄다리기를 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6일 국회에서 열린 한진해운 관련 당정간담회. 새누리당 지도부가 김영석 해양수산부 장관의 발언을 경청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법정관리는 해운업 특성상 파산선고나 마찬가지다.
통상 법정관리는 부도를 낸 기업 중 회생 가능성이 보이는 경우, 법원이 지정한 제3자가 기업운영을 맡는 형태다. 구조조정이나 인수합병(M&A)으로 법정관리를 졸업한 대기업도 여럿 있다. 웅진그룹, 쌍용건설, 팬오션, 동양시멘트, 팬택 등이다.
하지만 해운업에는 이런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다. 해운사가 법정관리를 신청하면 해외 선주들은 채권 회수를 위해 해당 회사의 선박을 압류하는 게 관례다. 선박이라는 확실한 담보물이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해운동맹에서도 퇴출당해 원양선사로서의 역할을 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실제로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소식이 전해지자 이 회사 선박 대부분(80여척)이 전세계 항만 곳곳에서 발이 묶였다. 해당 국가들이 항만 입·출항을 금지했고, 하역 관련 업체들은 밀린 대금의 지급을 요구하며 작업을 거부하고 있다.
한진해운 선박이 올스톱하다시피 하면서 수출기업들은 대체선박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운임도 최대 2배 가까이 뛰었다. 한진해운과 거래하는 협력업체들 또한 밀린 돈을 받지 못해 심각한 경영난에 처했다.
▲한진해운 소속 한진텐먼호가 하청업체들의 작업 거부로 외항에서 대기하다가 지난 2일 부산 강서구 한진해운신항만 터미널에 입항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물류대란 예상 못했을까
이런 물류대란이 충분히 예상됐음에도 산은은 왜 한진해운의 법정행을 서둘렀을까. 여기에는 8~9일로 예정된 ‘서별관회의 청문회’가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다.
서별관회의는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청와대 경제수석,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 한국은행 총재 등 경제 수장들이 참여하는 비공개 경제금융점검회의를 이른다. 청와대 본관 서쪽의 회의용 건물에서 열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97년 김영삼 정부 때 경제정책 조율을 목적으로 시작돼 노무현 정부 때에 이르러 정례화 됐다.
지난해 10월 22일 열린 이 회의에서 대우조선에 대한 4조2000억원 규모의 추가지원이 결정됐다. 문제는 회의 3개월 전인 지난해 7월에 대우조선의 분식회계 의혹이 시장에 알려졌다는 점이다. 그러자 산은과 수출입은행은 3개월간 실사를 진행했다.
야권은 이에 대해 “정부가 상당한 부실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추가지원을 결정해 국민 혈세를 허공에 날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검찰이 대우조선에 대해 전면적인 수사를 벌인 결과, 분식회계로 부풀려진 매출액·영업이익 규모가 3년간 5조4천억원에 달했다. 고재호 전 대우조선 사장과 전임자인 남상태 전 사장, 산업은행 부행장 출신의 김갑중 전 대우조선 부사장 등이 줄줄이 구속 수감된 상태다.
앞뒤 상황으로 볼 때, 당시 정부와 산은은 대우조선의 부실을 상당 부분 인지한 상황에서 지원을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은 “청와대-산은-대우조선해양으로 연결된 ‘관피아·금피아’가 작용한 사건”이라며 청문회를 벼르고 있다. 이미 여야 합의로 남상태·고재호 전 대우조선 사장, 홍기택·민유성·강만수 전 산업은행장 등 무려 46명이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된 상태다.
특히 청문회에서는 대우조선 부실지원 뿐 아니라 조선·해운업 정책 실패에 대한 집중적인 책임 추궁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조선·해운업 구조조정을 사실상 진두지휘해온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집중 포화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측면에서 청문회를 의식한 정부와 산은이 비난의 강도를 낮추기 위해 한진해운을 법정관리로 보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한진해운 사태로 시간을 끌다가는 더 심한 비난을 받을 수 있기에 과감히 퇴출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더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CNB에 “해운업은 국가기간산업이라 전 경제에 영향을 미칠 걸 충분히 예측됐음에도 서둘러 법정관리를 신청한 배경에는 대우조선의 학습효과가 작용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부산항 신항 한진해운부두에 배가 접안하는 선선이 비어 있다. (사진=연합뉴스)
“채권은행은 여전히 정부 들러리”
물론 채권단이 해운업 구조조정을 서두르기 위해 법정관리행을 택했을 수도 있다. 청문회와 상관없이 해운업을 정상화 하겠다는 의지가 신속히 작용했을 가능성이다.
이 경우, 한진해운의 알짜 자산을 유일한 국적선사인 현대상선이 사들이는 방식이 유력하게 고려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오래전부터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을 합쳐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해운업계와 정부 일각에서 꾸준히 나왔기 때문이다. 이는 한진해운의 항로운항권과 항만터미널 지분, 핵심 인력 등을 외국 선사에 넘기지 않고 현대상선이 매입해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이다.
하지만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의 주요 영업 항로가 겹쳐 시너지 효과가 떨어지는 데다, 한진해운에는 매각할 만한 우량자산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진그룹이 이미 (주)한진을 통해 한진해운의 알짜 자산을 사들였기 때문.
(주)한진은 한진해운 지원 명분으로 지난해 5월부터 최근까지 한진해운의 평택컨테이너 터미널 지분, 부산해운신항만 지분, 아시아 8개 항로 영업권 등 총2351억원 규모를 사들였다. 한진그룹 지주회사인 한진칼은 상표권까지 가져왔다.
따라서 퍼즐을 맞춰보면, 해운업의 재편 보다는 눈앞의 급한 불(청문회)을 꺼자는 심리가 더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채권은행의 한 관계자는 “홍기택 전 산은 회장이 대우조선 지원 결정 과정에 대해 ‘은행은 정부 들러리였다’고 한 말이 괜히 나왔겠냐”며 “한진해운 부실지원 문제가 청문회에서 불거질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로 읽힌다”고 말했다. 한진해운이 대우조선의 면피용이 됐다는 얘기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