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 CJ 회장의 예전 모습(왼쪽)과 병세가 악화된 지난해 11월 재판에 출두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CNB=도기천 기자) “살고 싶습니다. 살아서 제가 시작한 문화 사업을 포함해 CJ의 미완성 사업들을 완성해 반드시 세계적인 글로벌 생활 문화 기업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이것이 선대 회장의 유지를 받드는 길이고, 길지 않은 저의 여생을 국가와 사회에 헌신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2014년 8월 항소심 최후진술)
3년 넘게 투병…경영 투혼은 그대로
“국가에 기여하는게 인생 최후 목표”
정체된 CJ 큰 변화…삼성과 관계개선도
‘살고 싶다’던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자유의 몸이 됐다. 재계총수들 중에 유일하게 8.15특사로 사면된데다, 특별복권까지 이뤄져 경영에 즉시 복귀해도 법적인 문제가 없는 상태다.
이번 광복절 특사를 기대했던 다른 총수들은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었다.
재판 중이거나 수감, 집행유예, 가석방 등의 상황에 놓인 기업 총수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담철곤 오리온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 현재현 전 동양회장,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 최재원 SK그룹 수석 부회장, 구본상 전 LIG넥스원 부회장 등이다. 이 회장 외의 총수들은 처지가 그대로다.
이번 이 회장에 대한 사면·복권은 기대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한 재계인사는 “가석방 정도를 기대했는데, 사면·복권이 한 번에 이뤄질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고 말했다. 롯데그룹 비리 의혹, 재벌 총수의 사생활 스캔들 등이 터지면서 재계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총 4876명에 대한 특별사면이 이뤄졌는데 그 중 경제인은 14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 회장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중소기업인들이다.
김현웅 법무장관은 사면을 발표하면서 이례적으로 이 회장을 콕 집어 언급했다.
김 장관은 “이재현 회장은 지병 악화 등으로 사실상 형 집행이 어렵다는 전문가 의견을 감안해 인도적 배려와 국가 경제에 기여할 기회를 부여하는 의미에서 사면 대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법무부는 “경제·종교단체 등 각계 의견과 국가 경제와 사회에 기여한 공로, 죄질 및 정상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명단을 확정했다”고 설명했다.
법무부가 밝힌 대로라면, 이 회장이 과거 한국경제에 기여한 공로를 최종사면권자인 박근혜 대통령이 인정한 셈이다. 아울러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에 투자·고용창출 등을 통해 기여해 달라는 주문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CJ그룹은 “사업을 통해 국가경제에 크게 기여해달라는 뜻으로 알고 글로벌 문화기업 도약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화답했다. CJ그룹주는 닷새째 상승세를 지속하며 20만원 선을 돌파하는 등 시장의 기대가 커지고 있다.
▲서울 중구 소월로 CJ그룹 사옥. (사진=연합뉴스)
당장은 치료에 전념
하지만 이 회장의 건강상태로 볼 때 당장 경영복귀는 힘들다는 게 전문가들 견해다.
이 회장은 2013년 7월 1일 구속 수감된 이후 지금까지 대부분 시간을 구치소가 아닌 병원에서 보냈다.
구속 직후 요독증이 심해져 부인 김희재씨의 신장을 이식받는 수술을 받았다. 이식 수술 후에도 거부 반응과 감염 등으로 회복이 늦어지고 있다. 3년 넘게 서울대병원을 오가며 재판을 받아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손과 발의 근육이 위축되는 희귀유전병 ‘샤르코-마리-투스’(CMT)의 증세가 악화돼 걸을 때 특수신발 등 보조기구를 이용하고 있다. 삼성가의 유전병으로도 알려진 ‘샤르코-마리-투스’는 10만명 당 36명에게 발병하는 희귀질환으로 손발의 근육이 점차 약해지는 무서운 병이다.
더구나 오랜 재판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부친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의 지난해 별세, 모친의 건강 악화 등 악재가 겹치면서 정신적 고통도 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회장은 치료목적의 구속집행정지가 수차례 계속되면서 역대 ‘최장기 구속집행정지’ 기록을 세운 상태다.
CJ그룹 관계자는 12일 CNB와의 통화에서 “아직 경영복귀를 언급할 단계가 전혀 아니다. 건강문제가 심각해 치료에만 전념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문화가 미래 먹거리” 강한 신념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 회장의 경영 복귀 의지가 워낙 크다는 점에서 병중이라도 경영에 관여할 것이라는 조심스런 전망을 내놓고 있다.
CJ는 이 회장의 경영공백으로 인해 최근 3년간 투자계획은 세우지 못했고, 경영계획은 계열사별 자율에 맡기고 있는 상태다. 이러다보니 중국발 위기 등에 대해 그룹차원의 공동대응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이 회장은 사면 확정 직후 “치료에 전념해 빠른 시일 내에 건강을 회복하고 사업으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인생의 마지막 목표로 노력 하겠다”고 밝히는 등 복귀 의지를 강하게 나타내기도 했다.
이 회장은 지난 1995년 스티븐 스필버그 등이 설립한 미국의 영화제작·배급사 드림웍스에 3500억 원을 투자하면서 ‘문화 CJ’를 세계에 선포한 바 있다. 당시 주변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화가 미래 먹거리’라는 확고한 신념으로 투자를 강행했다.
이후 한류 열풍을 주도했고, 중국 시장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엔터테인먼트·서비스·유통·식음료 분야에서 후발 기업들의 길을 터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회장은 지난 2010년 “2020년까지 그룹 매출 100조원, 영업이익 10조원, 글로벌 매출 비중 70%를 넘어서는 ‘그레이트 CJ’를 완성하겠다”고 공언했었다.
따라서 이 회장이 복귀할 경우, SK텔레콤에 넘기려다 불발된 CJ헬로비전의 매각 문제, 한국맥도날드, 동양매직 인수전 등 굵직한 사업재편을 추진할 것으로 점쳐진다.
또 내수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외식·유통·물류 사업 분야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CJ제일제당, CJ푸드빌, CJ프레시웨이, CJ대한통운, CJ오쇼핑 등이 이에 해당된다.
한류·미디어를 주도하고 있는 CJ E&M, CJ CGV, tvN 등도 차별화된 콘텐츠 개발에 속도를 낼 전망이다.
▲이재현 CJ 회장이 경영에 복귀할 경우, 삼성과의 관계도 자연스레 개선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재현 회장의 사촌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2일 오후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모친 빈소를 조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삼성과 화해·협력설 ‘솔솔’
한편으로는 형제 기업인 삼성그룹과의 관계개선도 기대된다.
이 회장의 부친인 고 이맹희 CJ 명예회장과 숙부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맹희 회장의 동생)은 유산상속을 두고 오랜 세월 송사를 벌였다. 이맹희 회장이 일부 소송을 취하하며 화해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했고, 이맹희 회장은 지난해 운명을 달리했다.
이재현 회장의 건강이 악화되자 삼성가 여인들이 법원에 선처를 호소한 일도 있었다.
범삼성가 여인들 중 가장 웃어른 격인 손복남 여사가 병세가 극도로 악화된 아들 이재현 회장을 위해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자 이 회장의 숙모인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건희 회장의 부인)이 이를 받아 들였고, 다른 숙모·고모들이 함께 탄원서를 냈다. 탄원서에는 이 회장 건강문제 외에도 가족 간 화해 등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가운데 이재현 회장이 자유의 몸이 된 터라, 삼성과의 관계도 자연스레 개선될 것으로 예상된다.
CJ 사정에 밝은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 현대차, 포스코 등 대기업들이 대대적인 사업재편,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CJ의 시계는 3년 전에 멈춰 있었다”며 “이재현 회장의 도전정신이 정체된 CJ에 상당한 자극을 줄 것으로 예상되며, 이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재현 회장의 사촌)을 중심으로 경영혁신을 진행 중인 삼성과의 협력도 기대해 볼만하다”고 말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