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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텔링] ‘구로구청 투표함’이 29년 만에 말하는 진실

젊은 양심 앗아간 군(軍) 부정선거, 누가 책임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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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도기천기자 |  2016.08.04 14:17:14

▲선관위 관계자들이 지난달 21일 서울 종로구 선거연수원 대강당에서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구로구청 농성사건의 발단이 됐던 투표함을 29년 만에 개봉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부정선거 시비를 불러왔던 ‘구로구청 투표함’이 29년 만에 개봉돼 논란이 일고 있다. 재야·시민단체가 그동안 주장했던 투표함 바꿔치기, 기표 조작 등 부정행위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당시 군(軍) 부재자투표의 실상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면서 광범위한 군대 내 부정선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로구청 사건 5년 뒤에 있은 이지문 중위의 양심선언은 투표함과 함께 그때 상황을 전하고 있다. 29년 전 투표함은 우리에게 뭘 말하려는 걸까. (CNB=도기천 기자)

개봉된 판도라 상자, 불법·관권선거 증명
이지문 중위 증언·투표함 개표결과 ‘일치’
1987년 투표함 “지금부터 진실규명 시작”
 
지난달 21일 서울 종로구 선거연수원에서 개봉된 ‘그날의 투표함’은 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상흔이다.   

야권에서 ‘구로 항쟁’으로 불리는 구로구청 점거농성 사건은 유신헌법에 의해 폐지됐던 대통령직선제가 15년 만에 부활한 1987년 12월 16일(13대 대통령선거일) 발생했다. 

6월 민주화항쟁으로 다시 찾은 직선제인 만큼 시민들은 전국 규모의 공정선거감시단을 구성해 전두환 정권의 부정선거에 대비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약 10만여명에 이르는 대학생·노동·시민단체 등이 선거감시단에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발단은 그날 오전 11시, 투표소인 구로구청에서 한 대의 트럭이 빵·과자 상자 등으로 덮인 투표함 하나를 싣고 나가려다 시민들에게 적발되면서 비롯됐다. 

시민들은 투표 마감(오후 6시)이 끝나기 전인데 왜 투표함을 옮기냐며 항의했고, 선관위 측은 이미 투표가 끝난 부재자투표함이기 때문에 편의상 먼저 옮기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당시에는 투표함을 투표가 끝난 뒤에 옮긴다는 규정이 없을 때였다.

하지만 경찰 호송차량도 없이 선관위가 단독으로 투표함을 옮기려 했던 점, 3층 선관위 사무실에서 백지 투표용지 1506장과 인주·붓두껍이 발견된 점, 투표함이 빵 봉지 등으로 가려진 점 등을 수상히 여긴 시민들은 ‘부정선거 진상규명’을 외치며 구로구청을 점거했고,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1만여명이 넘는 시민들이 동참해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당시 선관위는 “무거운 투표함 위에다 빵을 올려놓지 빵 위에다가 투표함을 올려놓나”는 웃지못할 해명으로 시민들의 공분을 샀다. 

정부는 이틀 뒤인 18일 새벽에 4천여명의 경찰을 동원해 강제 해산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생 양원태 씨가 5층 강당에서 추락해 하반신이 마비되는 등 수십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연행자 1천여명 중 208명이 구속되고, 이 중 114명이 기소됐다. 농성자 중 김병곤씨는 2심 재판 도중에 유명을 달리했으며, 2년 넘게 수감된 사람도 여럿이었다. 

투표함을 되찾은 정부는 개표 결과 노태우 당선자와 김영삼 후보 간 표차가 커 투표함에 든 4천여표가 당락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보고 봉인을 결정했다. 

▲1987년 대선 당시 기표된 서울 구로을 부재자 투표용지를 선관위 관계자들이 29년 만에 확인하고 있다. 개표 결과 일반인 투표와 달리 부재자 투표에서 당시 노태우 후보가 압도적인 1위를 기록했다. (사진=연합뉴스)


이후 투표함은 구로구 선관위, 경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을 거쳐 2007년 중앙선관위로 넘어갔다. 

선관위는 우리나라에 선거제도가 최초 도입된 1948년으로부터 60년이 되는 2018년 이전에 구로구청 투표함 문제를 해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한국정치학회 측에 투표함 개봉을 의뢰했고, 정치학회가 이를 수락하면서 지난달 21일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개표 및 계수 작업은 중앙선관위와 한국정치학회, 정당 참관인,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직원 등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됐다. 국과수가 참여한 것은 투표함과 투표용지의 ‘나이’를 따져보기 위해서다. 당시에 제작된 종이와 잉크가 맞는지를 본 것. 개표 이후 투표함은 정밀조사를 위해 국과수로 옮겨졌다. 

정확한 결과는 국과수 검증이 끝나야 알겠지만, 현재까지 부정투표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총 투표용지 수는 선관위가 당시 파악했던 부재자 투표 4325장과 일치했다. 

당시 부재자 투표자는 우편 봉투에 자신의 주소와 이름을 직접 기입해서 선관위로 보냈는데, 육안으로 볼 때 필적이 동일한 봉투가 없었다. 우체국 소인과 등기번호 역시 손을 댄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강원택 한국정치학회장과 김남이 중앙선관위 기록보존소장은 “당시의 투표함이 맞는 것 같다”고 기자들에게 밝혔다. 
 

▲구로구청 사건 5년 뒤인 1992년에 이지문 중위(오른쪽)는 부대 내에서 부정투표가 있었음을 폭로했다. (사진=연합뉴스)


구로 투표함, 부재자투표 유일한 증거물

그런데 놀라운 진실은 따로 있었다. 당시 대선의 득표 결과는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가 36.6%, 김영삼 통일민주당 후보 28.0%, 김대중 평화민주당 후보 27.0%였다. 

구로구청이 위치한 구로을의 경우, 김대중 후보는 34.3%로 1위를 기록했으며, 노 후보는 27.0%로 2위에 머물렀다. 구로구는 예나 지금이나 야당세가 강했다.  

하지만 이번에 개봉된 투표함의 개표 결과는 노 후보가 72.4%(3133표), 김대중 후보가 13.3%(575표), 김영삼 후보가 9.3%(404표)였다. 부재자 투표에서의 노 후보 득표율이 일반 투표에 비해 무려 45.4%나 높게 나온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는 당시 군대 내에서 광범위한 부정선거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구로구청 사건 5년 뒤인 1992년에 이지문 중위는 부대 내에서 부정투표가 있었음을 폭로했다. 

육군 9사단 28연대의 소대장으로 근무 중이던 이 중위는 기자회견을 열어 “중대장 등 지휘관이 지켜보는 앞에서 투표를 하는 공개 기표행위, 여당에 대한 투표강요가 공공연히 이뤄졌다”고 밝혔다. 

이 중위가 언급한 선거는 1992년 14대 총선이었다. 당시는 그나마 민주화의 물꼬가 트인 시절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보다 5년 전인 구로구청 사건 때는 훨씬 더 조직적인 부대 내 부정선거가 저질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사건이 하나 있다. 87년 대선 당시, 육군 8350부대에서 부재자 투표를 한 날 저녁에 내무반 선임병이 후임병 9명을 불러 세워놓고 주먹으로 구타해 이들 중 정모 상병이 넘어져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이유인즉 ‘1번표’가 다른 부대에 비해 적게 나왔다는 것이다. 국회에서 조사단까지 꾸렸지만 군 관계자들이 입을 다물어 조사가 흐지부지 됐었다. 

▲CNB가 입수한 <길>지 1992년 6월호에 실린 이지문 중위 인터뷰. 이 중위는 “국군기무사 대위가 장교들을 불러놓고 사병들이 여당 후보를 지지하도록 하라고 압박했고, 이에 지휘관들은 중대원을 모아놓고 장시간 특별교육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사진=CNB포토뱅크)


이런 얘기는 이 중위의 진술에서도 자세하게 나온다. CNB가 어렵게 입수한 <길>지 1992년 6월호에 실린 이 중위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국군기무사령부(기무대)가 서신검열기로 중대별 표본조사를 실시했다. 

당시는 장교·사병 모두 부대 내에서 투표를 했고, 기표된 투표용지는 우편으로 해당 병사의 주소지 선관위로 부쳐졌다. 그런데 우편발송 책임을 맡았던 기무사가 중대별로 투표 성향을 파악했다는 것이다.

또 기무사 대위가 장교들을 불러놓고 사병들이 여당 후보를 지지하도록 하라고 압박했고, 이에 지휘관들은 중대원을 모아놓고 장시간 특별교육을 실시했다. 

이 중위는 “기무대 파견 장교가 중대장들을 만나 여당표가 80% 이상 나오도록 하라고 회유했다. 장교들이 심적 부담을 크게 느끼는 것을 보고 (양심선언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군대 내 총체적인 부정선거 실상을 폭로한 이지문 중위의 양심선언을 최초 보도한 한겨레신문 1992년 3월23일자.


국가폭력의 상흔 고스란히 남아

이 중위의 폭로는 조사과정에서 대부분 사실로 밝혀졌고, 이후 부재자 투표소가 부대 바깥에 설치됐다.

이 중위는 헌병대에 체포돼 고초를 겪고 이등병으로 강등돼 불명예 제대를 당했다. 이후 ‘공익의 호루라기를 부는 사람들’을 꾸려 공익제보·내부고발자를 상담하고 보호하는 일을 했고 최연소 서울시의원도 지냈다. 현재는 연세대 연구교수로 재직하며 ‘호루라기 재단’에 참여하고 있다. 

당시 구로구청 점거에 참여했던 시민들은 군대 내 부정선거 의혹과 더불어 투표함이 1987년부터 2007년까지 20년간 어디에 있었는지 등 근본적인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이번에 공개된 투표함이 당시 투표함이 맞는지, 사라진 세월 동안 조작되지는 않았는지 등이다. 이 문제는 국과수가 풀어줄 것으로 예상된다.   

결과적으로 구로구청 투표함은 군대 내 부정선거 실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최초의 단서를 제공했다.  

당시에는 부재자 투표함을 별도로 개표하지 않고 지역의 일반 투표함과 섞어서 혼합 개표를 했기 때문에 지역별 부재자 투표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이번에 개봉된 투표함만이 불법·관권선거 의혹을 전하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수백명이 구속되고 부상당한 엄청난 생채기가 있었다. 어쩌면 그날의 투표함은 우리에게 “지금부터가 진짜 진실규명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CNB=도기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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