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의 접대 문화 패턴이 ‘한번 찐하게’에서, ‘가볍게 여러 번’으로 변할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시내 한 고급음식점의 회정식 상차림. (사진=연합뉴스)
김영란법의 헌법재판소 위헌 판결을 기대했던 재계에 비상이 걸렸다. 이번 합헌 결정으로 일부 의원이 발의한 ‘김영란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 가능성이 희박해진데다, 비껴갈 줄 알았던 ‘언론인’마저 최종적으로 법 적용 대상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지방자치단체와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기업, 각종 허가 문제로 공무원과 접촉이 잦은 건설업계, 총수가 재판 중인 기업은 물론 언론사 등을 상대로 한 통상적인 홍보업무도 차질을 빚게 됐다. 하지만 기업들의 접대 패턴이 김영란법을 피해 ‘잘게 쪼개지면’ 되레 바닥경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CNB=도기천 기자)
‘찐하게’ 한 번→‘잘게’ 여러 번
식당·유통업 되레 매출 오를수도
대기업 홍보담당들 ‘체력전’ 돌입
2015년 3월 국회를 통과한 김영란법은 1년6개월의 유예기간이 있었던 터라, 그동안 재계는 비교적 느긋한 태도였다.
대기업들의 연합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그동안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법 통과 직후 “기업들이 유예 기간을 활용해 윤리경영 시스템을 정비하고 임직원 교육을 잘하자”는 정도의 권고문을 냈을 뿐이다. 이 권고를 따른 기업은 거의 없었다. 헌재의 판단과 국회의 법 개정 여부를 지켜본 뒤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실제 CNB가 그간 만난 대기업 홍보·대관 임직원들은 대부분 김영란법이 위헌 판결을 받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헌재가 위헌 결정을 내리거나 법안 자체가 재개정 될 것이라는 예측이 팽배했다. 원안대로 적용될 것이라 믿고 매뉴얼을 마련한 기업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관련, 정부와 수산업단체 간의 간담회에서 참가자들이 굳은 표정으로 서장우 해수부 수산정책관의 발언을 듣고 있다. 농수축산업 업계는 김영란법이 소비위축으로 이어져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이번 합헌 결정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김영란법 개정안들도 캐비넷에 들어갈 신세가 됐다.
현재 국회에 제출된 개정안은 4건이다. 강석호 김종태 강효상 이완영 새누리당 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했다. 대부분 농축수산물을 금품 수수 금지 품목에서 제외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헌재 결정이 나온 만큼 일단 원안대로 법을 시행하자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지금 상황에서 법개정을 밀어붙였다간 입법부인 국회가 헌재 결정을 뒤집는듯한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초선의원은 “김영란법에 의문을 나타냈던 일부 의원들도 헌재 결정을 받아들이는 분위기로 돌아서고 있다. 개정 여론은 자연스레 고개를 숙일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은 당장 코앞에 다가온 추석선물 기준을 어떻게 마련할 지가 고민이다. 김영란법은 유예기간이 끝나는 9월 28일부터 시행된다. 올해 추석은 9월 15일이다. 날짜로 보면 올 추석까지는 법적용을 받지 않게 되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선물 공세를 펼 수는 없는 분위기다. 국민들의 시선이 이번 추석에 쏠려있기 때문이다.
한 대기업 홍보실 관계자는 “(이해관계가 있는) 언론인이나 공무원에게 그동안 5~10만원 규모의 명절선물을 일괄 배송했는데, 올해는 기준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고민이다. 다른 기업 홍보담당들과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내 고급음식점 두 곳의 한정식 세트 메뉴판. 김영란법의 음식비 제한선인 3만원 이하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고급음식점들은 타격을 받겠지만, 중저가 식당들은 오히려 풍선효과를 누릴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CNB포토뱅크)
백화점·유통업계 속으로 웃는다?
하지만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김영란법은 이해당사자로부터 연간 300만원(1명 기준)을 초과하는 금품을 받으면 직무 연관성과 상관없이 준 사람과 받은 사람 모두 형사 처벌(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된다. 1회당 금액은 직무 연관성이 있을 경우, 식사 3만원, 선물 5만원, 경조사비 10만원까지만 허용된다.
이처럼 상한액을 명시했지만 횟수는 제한하지 않았다. 잘게 나눠서 접대를 할 경우, 연간 300만원을 넘지 않는다면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가령, 롯데쇼핑은 서울 마포구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DMC)에 대형복합쇼핑몰을 추진하고 있는데 골목상인들의 반발로 난항을 겪고 있다. 서울시가 중재하고 있는 상황이라 담당 공무원들에게 적극적으로 입장을 전해야 한다.
따라서 공무원들과의 식사 자리가 잦아질 수밖에 없다. 기존에 1인당 5만원짜리 정식을 함께 했다면 앞으로는 3만원 미만으로 줄여야 한다. 하지만 예전보다 자주 식사 자리를 마련하는 건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5만원) 대접할 것을 3만원씩 두 번 해도 무방하단 얘기다.
다만 때와 장소는 가릴 필요가 있다. 3만원짜리 식사를 대접하고 곧바로 커피숍으로 옮겨 5천원짜리 커피를 샀더라도 문제가 된다. 근접성·계속성 등을 고려해 이 경우는 하나의 행위로 판단하기 때문에 상한액 3만원을 넘은 것으로 본다.
이처럼 기업이 공무원을 상대해야할 경우는 헤아리기조차 힘들 정도다.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에 수조원을 투입해 메머드급 신사옥 건립을 추진 중인 현대차 그룹, 경복궁 옆에 복합문화시설을 짓고 있는 한진그룹(대한항공)은 서울시와 기부채납 방식 등을 놓고 협의 중이다.
종로구 공평동 개발지구에 대규모 오피스타운을 건립하고 있는 포스코건설은 공사현장에서 문화재가 대거 출토돼 문화재청과 협의 중이며, 삼성생명이 매입한 한국감정원 부지도 향후 개발과정에서 지자체와의 조율이 불가피하다.
건설사들은 대규모 택지개발 과정에서 학교 도로 등 기반시설 건립을 놓고 지자체와 협의해야 한다. 세종시, 김포 한강신도시, 하남 미사강변도시, 고양 향동지구 등 전국곳곳의 개발지구에서 대우건설, 대림산업, GS건설, 호반건설 등 대형건설사들이 공무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있다.
또 총수가 재판 받고 있는 기업들은 언론을 통해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도 1회당 접대 금액을 줄이는 대신, 기자들과의 접촉 횟수를 늘리는 식으로 홍보 패턴이 바뀌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재판 중이거나 수감, 집행유예 등의 상황에 놓인 기업 총수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담철곤 오리온 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 현재현 전 동양회장,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 최재원 SK그룹 수석 부회장, 구본상 전 LIG넥스원 부회장 등이다.
▲유통업계는 5만원 이하 선물세트 물량을 기존 보다 20∼30% 늘렸다. 김영란법이 선물 횟수를 규정하고 있지 않아 5만원 이하 작은 선물들이 반사이익을 누릴 것이라는 분석이 아온다. 고객이 올해 추석 선물세트 팸플릿을 보면서 선물을 고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아담한 선물 ‘자주 발송’ 가능
식사 대접과 마찬가지로 선물 횟수를 잘게 쪼개는 것도 방법이다. ‘쪼개기 식사’처럼 5만원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선물 공세를 펼친다면 법망을 피해갈 수 있다.
가령, 기업이 언론인·공무원 등 이해당사자에게 설 명절마다 20만원짜리 선물세트를 제공했다면, 앞으로는 설·추석·결혼기념일·생일 등으로 나눠 5만원씩 선물하면 된다.
이미 백화점과 대형마트는 김영란법 제한 금액에 맞춰 5만원 이하 선물세트 물량을 기존보다 20∼30% 늘렸다. 5만원에 맞추기 위해 사과, 배 같은 청과는 물론 굴비세트까지 기존 수량보다 줄여서 소규모 포장하고 있다.
이렇게 변신한 ‘아담한(?) 선물’을 이해당사자로부터 매월 받더라도 연간 300만원 한도를 넘지 않는다면 과태료를 물릴 근거가 없다.
경조사비 부조도 마찬가지 원리로 범위를 넓히면 된다. 이해당사자의 직계 가족에 국한했던 부조를 금액을 낮추는 대신 친척에게까지 확대하는 식이다. 가령 기업이 언론사 데스크의 직계가족 경조사에 20만원씩을 부조해 왔다면, 앞으로는 김영란법에 맞게 10만원으로 낮추는 대신 경조사의 범위를 해당 언론인의 친척까지 넓히면 된다.
국민권익위 관계자는 CNB와의 통화에서 “시행령에서 (식사·선물·경조사의) 횟수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있으므로 고의적으로 분할해서 밥을 사거나 선물을 주는 행위에 대해 제재할 근거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라며 “다만 법에서 정한 사교·의례 목적에 부합되느냐와 장소·시간·인물의 동일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법 저촉 여부를) 판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래저래 기업들의 홍보업무는 더 바빠지게 됐다. 이해상대방과 한번 ‘찐하게(?)’ 만날 일을 여러번 ‘쪼개서’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김영란법으로 식당(고급음식점 제외)들의 영업이 오히려 잘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유통업계도 ‘작은 선물’ 붐이 일어 호황을 누릴 가능성이 있다.
한 대기업 홍보담당자는 “그야말로 체력으로 버텨야 하는 시대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