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조선해양 비리를 수사 중인 대검찰청 부패범죄특별수사단(단장 김기동 검사장)이 남상태(66)·고재호(61) 전 사장을 잇따라 구속수감 한데 이어 대우조선에 천문학적인 자금 지원을 해온 산업은행에 대해서도 고삐를 죄고 있다. 산은과 더불어 대우조선에 대한 지원을 결정했던 시중은행들도 자유롭지 못한 처지가 됐다. 은행들은 “실사 결과를 보고 지원여부를 자체 판단했다”는 입장이지만 금융당국과 산은의 외압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 (CNB=도기천·이성호 기자)
▲임종룡 금융위원장(오른쪽)과 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다. 임 위원장은 대우조선에 대한 시중은행들의 금융지원을 “산은이 주도했다”고 밝혔지만, 홍 전 회장은 “정부가 짜 둔 시나리오대로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연합뉴스)
은행들 천문학적 부실기업 전폭 지원
금융위 “산은이 주도한 것” 책임 전가
홍기택 전 산은 회장 “우린 들러리”
이번에도 ‘보이지 않는 손’에 휘둘려
홍익표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최근 입수한 금융위원회의 ‘대우조선해양 정상화 지원방안’ 문건을 보면, 시중은행들의 이름이 나란히 등장한다.
국책금융기관인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을 통해 4조2천억원의 유동성을 지원한다는 내용 외에도 50억 달러(약 5조7500억원) 규모의 신규 선수금환급보증(RG) 가운데 10%를 시중은행이 분담토록 했다.
산업은행·수출입은행·무역보험공사가 15억 달러씩 분담하고 나머지 5억 달러는 농협·하나·KB국민·신한·우리은행 순으로 분담한다는 내용이다.
RG는 발주사가 조선사에 배 건조를 위해 미리 지급한 금액(선수금)을 부도 등의 사태로 떼이는 상황에 대비해 금융사가 해당 금액만큼 지급보증해 주는 것을 이른다.
야권은 해당 문건을 지난해 10월 22일 열린 청와대 서별관회의 자료로 추정하고 있다.
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에 따르면, 자신과 최경환 당시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임종룡 금융위원장, 안종범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 진웅섭 금융감독원장, 이덕훈 수출입은행장 등이 이 회의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산은 등을 통해 대우조선에 4조2000억원(유상증자와 출자전환 포함)을 추가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대우조선해양 사태는 조선업계 전체로 번져 대량해고와 사업재편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우조선에 대한 금융당국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 지원이 사태를 더 키웠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진=CNB포토뱅크, 연합뉴스)
5조원대 지급보증 깨알관치 논란
문제는 대우조선의 분식회계 사실을 이들이 사전에 알았느냐다. 해당 문건에는 “대우조선해양에 5조원 이상의 부실이 있어 사실관계 규명을 위해 감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를 근거로 홍익표 의원은 “청와대와 정부가 분식회계 가능성을 미리 눈치 채고도 지원을 결정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우조선에 수조원대의 부실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처음 시장에 알려진 것은 지난해 7월경이었다. 서별관회의는 이로부터 3개월이 지나서 열렸다. 그 3개월 동안 산은이 실사를 진행하며 구조조정 방향을 검토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지난 4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공시된 내용과 같은 상태인지 확인하려 회계법인을 투입해 3개월 실사했다”고 답했다. 실사 결과 산은이 파악한 대우조선의 부실규모는 4조원 대에 이르렀다.
검찰은 현재 대우조선의 회계조작 혐의에 대해 전면적인 수사를 벌이고 있다. 분식회계를 거쳐 부풀려진 매출액·영업이익을 매년 허위공시 했는데, 규모가 3년간 5조4천억원에 달했다. 이로 인해 고 전 사장과 전임자인 남상태 전 사장, 산업은행 부행장 출신의 김갑중 전 대우조선 부사장 등이 줄줄이 구속 수감된 상태다.
앞뒤 퍼즐을 맞춰보면, 당시 정부와 산은은 대우조선의 부실을 상당 부분 인지한 상황이었다. 분식회계 사실까지 알고 있었는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지만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시중은행들이 RG를 진행하게 된 데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산은 혼자 뒤집어쓰라?
정부와 금융당국은 산은에 책임을 떠넘기는 분위기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6일 해명자료를 통해 “국책은행이나 시중은행에 압력을 행사한 사실이 없다”며 “서별관회의에서 관계기관 간 비공식적으로 논의한 후, 각 금융기관이 최종적으로 지원방안을 결정하여 집행한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금융위는 “산업은행이 대우조선 정상화 방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일반 채권은행 등과 수차례 사전 협의를 거쳤다”고 주장했다.
금융위에 따르면 산은은 지난해 7월부터 수출입은행, 농협, KEB하나은행 등과 함께 경영관리단을 만들어 대우조선 실사 및 경영상황을 점검·감독했다. 한마디로 산은이 시중은행들의 포지션을 주도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정부가 그동안 산은을 통제해 왔다는 점에서 금융당국의 해명은 궁색해 보인다.
산은의 인사권은 청와대가 쥐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실세로 불리며 금융계 4대천황으로 불리던 강만수 전 산업은행장, 그의 뒤를 이어 2013년 취임한 홍기택 전 회장 모두 낙하산 논란에 휩싸여 금융노조와 시민단체로부터 거센 사퇴 요구를 받았던 인물들이다.
홍 전 회장은 최근 한 언론에 당시 서별관회의와 관련 “청와대와 정부가 산은에서 얼마, 수은에서 얼마 하는 식으로 금액을 미리 정해뒀다. 산업은행은 들러리 역할만 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시중은행들은 말을 아끼고 있다. 거론되고 있는 은행들은 12일 CNB에 “금융당국의 압력은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한 은행 관계자는 “산은의 실사 결과를 검토해서 자체적으로 (대우조선 지원 여부를) 판단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익명을 요구한 한 금융권 관계자는 “당시는 세월호 참사로 민심이 크게 동요하던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우조선까지 불거지게 되면 여론이 어찌 되겠나. 위에서 그만큼 신경을 쓰고 있던 터라 금융권이 상당한 부담을 느꼈던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앞뒤 상황을 종합해 보면, 정부가 산은을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우조선해양 지분 49.7%를 보유한 최대주주이자 주채권은행인 산은이 은행들을 좌지우지했다. 이런 가운데 4조2천억원의 신규 자금 지원 뿐 아니라 선수금 보증 등 최대 10조원에 달하는 금융지원이 이뤄진 것이다.
▲법원 경매가 진행 중인 모뉴엘 제주 사옥 전경. 모뉴엘의 역대급 대출사기 사건 이후 은행들은 여신심사를 강화했지만 대우조선해양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사진=도기천 기자)
금피아 척결 ‘공염불’
지난해 10월 이후 대우조선이 수주를 거의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시중은행들이 떼인 보증금액은 거의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만일 대우조선의 회계조작이 계속 됐더라면 지난 2014년 발생한 ‘제2의 모뉴엘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게 금융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IT기업 모뉴엘은 현지 수입업체와 짜고 수출서류를 거짓으로 작성해 수출액을 부풀리는 수법의 분식회계를 통해 10개 시중은행으로부터 약 7000억원의 사기대출을 받았다.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 서울보증보험 등 공적기관들이 모두 가짜서류에 속았다.
비슷한 시기에 KT 계열사 KT ENS의 협력업체들도 유사한 사기행각을 벌였다. KT ENS의 고위 간부가 협력업체들과 짜고 세금계산서 등을 조작해 허위 매출채권을 발행, 협력업체들은 이 가짜 채권을 담보로 시중 은행들로부터 1조원 넘게 부당대출을 받았다.
이러한 역대급 금융 사기가 잇따르자 시중은행들은 기업들이 제출한 대출관련 서류의 전수조사에 나서는 등 여신관리시스템을 강화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이 대우조선해양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됐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허덕회 상법박사는 12일 CNB와 통화에서 “1997년 외환위기의 발단이 된 한보그룹 사태는 시중은행들의 5조원대 부실대출에서 비롯됐다”며 “만일 대우조선이 이 상태로 계속 갔으면 금융사들은 물론 국민경제가 엄청난 타격을 입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재벌사>의 저자 이한구 교수(수원대 경제금융학과)는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관피아·금피아를 척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아무것도 된 것이 없었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대우조선 사건”이라며 “정경유착·관치금융의 폐해를 일벌백계하지 않으면 모뉴엘, 대우조선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CNB=도기천·이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