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정은 회장의 현대상선을 살리기 위한 적극적 행보가 주목 받고 있다. 1976년 울산 영빈관에서 결혼 3개월 전 찍은 사진. (왼쪽부터) 정주영 회장, 김문희 여사, 현정은 회장, 정몽헌 회장. (사진=현대그룹 홈페이지)
법정관리 위기에 몰렸던 현대상선이 기사회생하는 분위기다. 용선료 협상 진척, 채무조정 성공, 해운동맹 재가입 등 긍정적 소식이 계속 전해지고 있는 것. 이를 두고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책임경영이 현대상선의 위기극복에 힘이 됐다는 평가다.
현 회장은 향후 대주주의 지분만 줄이는 차등 감자까지 각오하고 있다. 스스로 ‘소액주주’가 되기를 자처하면서까지 현대상선을 살리려는 이유는 뭘까. (CNB=손강훈 기자)
친정과 시댁의 합작품 ‘현대상선’
대주주 지분만 줄이는 차등감자 눈앞
현 회장, 전부 버리고 가시밭길 자처현대상선은 해운경기 침체와 높은 용선료 등으로 2011년부터 적자를 기록해왔다. 5년 동안 누적 영업손실은 1조7000억원, 자본잠식률은 79.8%에 달했다.
현 회장은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맺으며 고강도 자구안을 내놓았고 7대1 무상감자를 실시했다. 사재 300억원을 출연했고 무상감자를 통해 자신이 보유한 현대상선 주식수도 400만주에서 57만1428주로 줄였다. 등기이사와 이사회 의장에서도 물러나는 등 사실상 경영권을 포기했다.
특히 현 회장은 대주주의 지분만 줄이는 ‘차등 감자’까지 각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2일 해운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KDB산업은행 등 채권단과 현대상선은 현 회장 일가의 지분(22.6%)을 절반 이하로 낮추는 내용의 추가 자구안을 놓고 협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 회장 일가의 지분이 얼마만큼 줄어들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채권은행들이 출자전환(기업에게 빌려준 대출금을 주식으로 전환)을 통해 대주주로 올라서고 현 회장 일가는 소액주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은 상태다. 이는 사실상 현대상선이 현대그룹에서 분리됨을 의미한다.
현 회장은 경영권에 이어 대주주 자격까지 상실할 전망이지만 이 방안을 받아들이면서까지 현대상선을 살리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현 회장의 행보는 현대상선을 살리기 위해 고통분담에 나선 ‘책임 있는 행동’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해운업계에서는 현대상선이 채권단이 요구하는 혹독한 구조조정을 진행해온 만큼, 향후 경영정상화에 성공하면 다시 현대그룹에게 우선매수청구권(우선적으로 주식을 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해운업계 한 관계자는 “나중에라도 회사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까지 (채권단이) 가져가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정주영 혼 서린 현대상선 “포기 못해”
▲고 정몽헌 회장 10주기 사진전에서의 현정은 회장. (사진=연합뉴스)
현 회장이 개인재산을 내놓은데 이어 스스로 소액주주가 되기를 자처하면서까지 현대상선 살리기에 나선 이유는 뭘까?
현대상선은 현 회장에게 ‘친정’ 같은 회사다. 현 회장의 아버지 고 현영원 회장은 현대상선의 모태인 신한해운을 1964년 설립했다. 이후 신한해운은 정부의 해운산업 효율화 조치에 따라 1984년 현대상선에 편입됐다.
현대상선은 당시 재계의 수장 격이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아끼던 핵심계열사였다. 현영원 회장은 신한해운이 현대상선에 편입된 후에도 사돈(현정은 회장의 시아버지)인 정주영 회장의 배려로 1995년까지 현대상선 대표이사를 맡아 회사를 이끌었다.
이후 현대그룹은 2000년 3월 ‘왕자의 난’이라고 불리는 경영권 승계 다툼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정주영 회장의 장남 정몽구 회장이 현대자동차 등 10개사를 이끌고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했으며, 현대그룹 경영권은 5남 고 정몽헌 회장에게 넘어갔다. 이후 현대가(家)는 현대·기아차그룹과 현대그룹, 현대중공업그룹 등으로 분리됐다.
정몽헌 회장이 2003년 사망하면서 부인인 현정은 회장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당시 현대그룹 지배구조의중심에 있던 현대상선을 직접 경영하게 되면서 아버지 현영원 회장이 못다 펼친 꿈을 이뤘다.
하지만 2007년 4월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상선 지분 26.68%를 매입해 최대주주에 오르면서 현대그룹과 현대중공업그룹 사이에 경영권 분쟁이 시작됐다. 현대그룹은 유상증자 등을 통해 현대상선의 우호지분을 40% 넘게 확보하면서 경영권을 가까스로 방어했다.
현 회장 입장에서 현대상선은 자신의 아버지의 유지가 서린 결과물이기 때문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한편으로는 현 회장의 시아버지인 고 정주영 회장의 대북사업의 열정이 담긴 기업이기도 하다.
1998년 정주영 회장이 소 1001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통과해 북한을 방문했다. 이후 현대그룹은 정부로부터 금강산 관광사업의 주체로 선정됐으며 현대상선은 역사적인 금강산 유람선 운항을 시작했다. 이 과정을 현정은 회장은 정주영 회장 곁에서 지켜봤다.
이처럼 현대상선은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 모두의 기업가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곳이다. 현 회장이 유독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현 회장 의지, 채권단 마음 흔들어
▲'현대건설, 현대그룹이 지키겠습니다'란 문구가 '현대상선, 현대그룹이 지키겠습니다'로 느껴진다. 2010년 현대건설 인수전 당시 현대그룹이 기획한 TV광고 한 장면. (사진=TV광고 캡쳐)
현 회장의 적극적인 행보는 긍정적 결과로 열매 맺고 있다. 현대상선은 용선료 인하 협상에서 진척을 보이며 용선료 인하 협상 타결이 임박했다. 사채권자와의 채무재조정까지 성공했다. 또한 해운동맹 가입까지 순조로울 것으로 전망되며 경영정상화를 위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반면 같은 경영위기를 겪고 있는 한진해운의 경우 현대상선보다 재무구조는 낫지만 위기타계가 녹록치 않은 상황이다.
실제 올 1분기 실적으로 살펴보면 매출은 한진해운이, 영업손실은 현대상선이 더 많았다. 부채비율을 살펴봐도 한진해운 847.8%, 현대상선 2006.5%로 큰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두 회사를 바라보는 ‘전망’은 ‘실적’과 일치하지 않고 있다. 오너의 의지 때문이다.
현 회장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는 반면, 한진해운을 지배하고 있는 한진그룹(대한항공)의 조양호 회장은 채권단이 만족할 만한 액션을 취하지 않고 있다.
한진해운이 제출한 자구안에는 대주주인 조 회장과 경영부실 책임이 있는 최은영(유수홀딩스 회장, 조양호 회장의 제수) 전 한진해운 회장의 사재 출연 부분이 빠져 있다. 최 전 회장은 채권단 자율협약 신청 직전에 한진해운 보유주식 전량을 처분해 미공개정보 활용 혐의로 형사처벌 가능성까지 언급되고 있다.
채권은행들은 조 회장 일가의 사재출연을 포함한 더 강도 높은 자구안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업계 관계자는 “채권단은 자구노력을 중시한다. 자구노력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오너의 의지”라며 “현대상선이 한진해운보다 재무구조가 더 나쁨에도 협상이 잘 이뤄진 것은 현 회장의 노력이 채권단의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채권단 출자전환이 이뤄져 현대상선이 현대그룹에 분리되면, 현대그룹은 자산규모가 2조원 수준으로 떨어져 공정거래위가 지정하는 대기업 집단에서도 빠질 것으로 보인다.
(CNB=손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