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증권사들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투자 규모가 급격히 늘자 금융감독원이 실태 파악에 나섰다. 여의도 증권가 전경. (사진=CNB포토뱅크)
증권사들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참여해 발생한 채무보증액이 급격히 늘면서 제2의 저축은행 사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무분별한 건설사 대출로 저축은행들이 줄도산하면서 수만명의 피해자를 양산한 과거 악몽이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자 금융당국이 대대적인 실태 점검에 나섰다. 대한민국 증권사들은 안녕한 걸까? (CNB=도기천 기자)
증권사 우발채무 급증…건전성 ‘경고등’
건설경기 ‘불안’…저축은행 사태 데자뷰
증권업계 “대형건설사 상대해서 안전”
2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이 메리츠종금증권과 대신증권의 우발채무 리스크에 대한 검사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금감원은 이들 외에도 우발채무가 발생할 위험이 높은 증권사들을 대상으로 검사를 진행해 나갈 계획이다.
금감원이 칼을 빼든 이유는 주요 증권사들의 지급보증 규모가 급속히 늘어났기 때문이다. 우발채무는 지금은 부채가 아니지만 장래 일정한 조건에 따라 빚이 되는 불확정 채무를 뜻한다. 증권사들은 부동산 PF에 뛰어 들면서 건설사들의 지급보증을 섰는데, 향후 건설사가 빚을 갚지 못하면 이를 대신 갚아야 한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이런 우발성채무가 1년 새 4조원 넘게 불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증권사들의 건설사(또는 시행사) 지급보증액은 작년 말 기준 24조2264억원으로 1년 전(19조8906억원)보다 4조3358억원(21.7%) 증가했다.
메리츠종금증권이 작년 말 5조1223억원으로 전년 말(3조6327억원)보다 29% 증가했으며, 미래에셋대우는 1조3770억원으로 1년 새 47% 늘어났다. 현대증권은 2014년 말 2조462억원에서 작년 말 2조7549억원으로 34%(7087억원) 불어났다.
채무보증액이 많은 곳은 메리츠종금증권, NH투자증권, 현대증권, 미래에셋대우, 교보증권, 한국투자증권, HMC투자증권, 하이투자증권, 미래에셋증권, 한화증권, IBK투자증권 등이었다.
금융당국은 특히 자기자본을 초과할 정도로 우발채무가 늘어난 증권사들을 주목하고 있다. 우발채무 비율은 메리츠종금증권 295%, 교보증권 190%, 하이투자증권 169%, HMC투자증권 142%, IBK투자증권 118%로 조사됐다. 대신증권은 레버리지(투자금 대비 손실 가능성) 비율이 지나치게 높아 이번 금감원 검사의 타깃이 됐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로 인한 증권사들의 우발채무가 1년 새 4조원 넘게 불어나자 제2의 저축은행 사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2014년 3월, 저축은행 사태 피해자들이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검찰청 앞에서 국가배상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새 먹거리 찾아 나섰건만…
증권사들이 그동안 부동산PF 투자를 늘린 이유는 최근 몇 년 간 국내 증시가 박스권에 갇히면서 수익이 급감한데 따른 것이다. 신흥국 펀드 등 각종 파생상품을 만들어 살 길을 찾았지만 신통치 않았다. 결국 대규모 구조조정이 계속됐고, 이 과정에서 새 먹거리를 찾다가 부동산 PF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증권사들이 PF에 나선 직접적인 배경에는 저축은행들의 몰락이 있었다.
저축은행 사태는 금융위원회가 지난 2011~2012년 10여 곳의 저축은행에 영업정지 처분을 내리면서 시작된 사건이다.
금융당국은 저축은행들이 2000년대 들어 본업인 서민 대출에서 벗어나 건설사 대출사업인 PF(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에 주력하면서 부실이 커지자, 국제결제은행(BIS) 비율 1% 미만인 저축은행을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하고 6개월간의 영업정지 조치를 내렸다.
이로 인해 상당수 저축은행들은 파산 하거나 다른 금융기관에 인수됐다.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회장, 임석 솔로몬저축은행 회장, 윤현수 한국저축은행 회장 등 당시 내로라하는 저축은행 CEO들이 불법대출 혐의로 줄줄이 사법처리 됐다.
이 과정에서 예금자보호 한도를 벗어난 5000만원 이상 예금자와 후순위 채권 투자자 수만 여명이 손실을 입었다.
이후 살아남은 저축은행들은 PF에서 거의 손을 뗐다. 이 때를 틈타 증권사들이 앞 다퉈 PF 사업에 뛰어들었고 이로 인해 보증채무가 급증한 것이다.
▲국내증권사 채무보증액 추이. 4년 새 3배 가까이 급증했다. (자료=금융감독원 금융통계시스템)
금감원 ‘선제 대응’ 또는 오버?
금감원이 ‘장래에 발생할지 모를 빚’(우발채무)에 대해 벌써부터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부동산·건설 경기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과거 저축은행 사태도 부동산 폭락 사태가 발생하면서 비롯된 만큼 이번에는 선제적 대응을 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저축은행 사태 직전인 2010년 전국 미분양 주택은 매년 증가해 9만여 가구에 달했다. 최근 미분양도 그때처럼 꾸준히 늘고 있다. 2014년 연말 4만 채를 넘긴 미분양은 계속 늘어나 지난달 5만4천여 가구로 불어났다.
특히 지방의 미분양 증가세가 가파르다. 미분양은 수도권에서 조금씩 줄고 있지만 지방은 지난해부터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올 1분기(1~3월) 민간아파트 1차 분양률을 보면 서울이 95.7%인 반면 전국 평균은 78.6%에 불과했다.
증권사들의 우발채무는 과거 저축은행들의 PF 대출 증가세 보다 훨씬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로 인해 증권사들의 부실 우려가 제기되자 최근 신용평가기관들은 주요 증권사의 신용등급을 일제히 하향 조정했다.
신용등급 ‘A+’였던 한화투자증권과 KTB투자증권, 하이투자증권은 지난해 연말에 ‘A’로 내려갔다. 리딩투자증권, HMC투자증권, LIG투자증권(현 KB투자증권)도 각각 신용등급이 한 단계 추락했다.
▲주요 증권사들의 자기자본 대비 채무보증액. (자료=금융감독원 금융통계시스템)
하지만 우발채무만으로 ‘손실 우려’를 판단하기는 이르다는 지적도 있다.
통상 PF사업은 건설사가 은행에 시행사의 지급보증을 서는 형태로 이뤄진다. 건설사는 미래 들어설 건물이나 땅의 가치를 담보로 하는 자산유동화채권(ABCP)을 발행해 금융사로부터 자금을 조달한다.
이 과정에서 증권사는 건설사가 발행한 채권에 대해 지급보증을 서는 형태로 신용을 보강해주고 수수료를 챙긴다. 한마디로 시행사-시공사(건설사)-은행-증권사가 서로 얽힌 구조다.
따라서 설령 건설사가 부도를 내더라도 은행은 건설사의 자산 압류 등을 진행한 후 남은 빚에 대해서만 증권사를 상대로 추심행위를 할 수 있다. 즉, 우발채무가 전부 부채로 둔갑하는 경우는 드물단 얘기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보증채무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면서도 “과거 저축은행들이 무분별하게 PF 대출에 집중했다가 결국 대규모 부실사태가 발생한 적이 있는 만큼 유독 포트폴리오가 PF에 편중돼 있는 증권사들은 유심히 모니터링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증권업계 관계자는 CNB에 “과거 저축은행 사태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저축은행은 중소건설사에 직접 PF 대출을 해줘 손실을 입었지만, 증권사들은 주로 대기업 건설사 지급보증이라 훨씬 안전한 구조”라고 전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