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전표가 불필요한 ‘삼성페이’의 작동 순서. 현대카드가 지난해 10월 삼성페이 결제에 한해 밴(VAN)사에 전표수수료를 지급하지 않기로 선언하면서 결제시장에 일대 변혁이 시작됐다. (사진=삼성전자)
삼성페이·신세계페이·네이버페이 등 기존 플라스틱카드를 대체하는 첨단 결제수단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데다, 5만원 이하 카드 결제 시 ‘무서명 거래’가 전면 시행되면서 ‘종이전표’ 관리로 생계를 이어온 밴(VAN)업계가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급변하는 금융환경이 이들을 위기로 내몰면서 카드사·밴사 간 전면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핀테크 시대의 두 얼굴을 들여다봤다. (CNB=도기천 기자)
‘무서명’ 시동…카드사 vs 밴사 ‘2라운드’
카드사 “모바일 시대, 종이 필요 없어”
“금융산업 재편기…시장논리 맡겨야”
“모바일을 이용한 다양한 결제수단이 등장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카드사들이 종이전표 관리비용을 부담해야 하나. 재주는 곰이 부리고 이득은 밴사가 가져가는 비정상적인 결제 유통구조를 이번 참에 개선해야 한다” (A카드사 홍보임원)
“카드사가 무조건 수수료를 줄이겠다고 하니 당황스럽다. 다같이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밴 업계 관계자)
지난해 삼성페이의 등장으로 촉발된 밴 업계와 카드사 간의 갈등이 ‘5만원 이하 무서명’이 시행되면서 다시 불붙었다.
카드사들이 종이전표(무서명)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에 따른 ‘전표매입 수수료’를 낼 수 없다고 하자, 금융위원회가 중재에 나서 밴사와 카드사 모두 고통분담 하는 방향으로 안을 확정했지만 양측 다 불만스런 표정이다.
밴사는 카드사를 대신해 결제 승인을 중개하고 가맹점을 관리하는 회사다. 통상 가맹점에서 카드를 결제하면, 카드사는 해당 매장에 대금을 지급하고 수수료를 받는데, 이 과정에 밴사가 끼어 있다.
밴사는 고객이 결제를 취소하거나 서명 위조 등 사고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고객이 서명한 영수증을 수집해 이를 카드사에 제출해 전표 수거료를 받는다. 또 결제 통신망과 단말기를 보급·관리한다. 매장과 카드사를 연결해주는 일종의 ‘중간유통상’인 셈이다.
밴사는 산하에 대리점들을 두고 있다. 밴 대리점들은 카드 가맹점들을 돌며 전표를 모으는 역할을 한다.
카드사는 밴사에 서명(종이전표) 1건당 100~110원의 밴수수료를 지급하는데 이중 35~36원이 밴 대리점의 몫이다. 한마디로 ‘카드사-밴사-밴대리점-밴사-카드사’로 연결되는 고리다.
그런데 지난 1일부터 5만원 이하 금액은 고객이 서명하지 않아도 되도록 여신제도가 바뀌면서 밴업계가 큰 타격을 받게 된 것이다.
이에 금융당국은 밴 대리점들이 일종의 ‘골목상권’이라는 점을 들어 기존 전표수수료의 상당부분을 보전(補塡)해주기로 했고, 보전비용은 카드사와 밴사가 대략 6:4비율로 부담하는 방향으로 중재안을 확정했다.
카드사가 15~18원, 밴사는 10~12원씩 부담하도록 해 현재 35원 정도인 건당 수수료를 25~30원까지 보전해 준다는 방안이다. 전표수수료엔 전표 수거 외에도 단말기 관리와 같은 서비스 비용이 포함된 만큼 수수료 35원을 다 깎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는 밴 대리점들의 주장을 수용한 것.
▲밴(VAN)사와 카드사 간의 결제유통 흐름도. 밴사는 카드사에 전표·단말기·통신망을 제공·관리하고 카드사는 이에 대한 수수료를 밴사에 지급하고 있다. 이 수수료 중 일부는 가맹점 영업비용(리베이트)에 쓰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픽=연합뉴스)
얽히고설킨 ‘종이전쟁’
하지만 중재안에 대해 양측이 모두 반발하고 있다. 카드사는 ‘무임금 무노동’ 원칙을 내세우며 전표가 사라진 만큼 보전비용이 과다하다는 입장이며, 밴사는 별도 협상단을 꾸려 대책마련에 나서기로 했다.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은 ‘무서명 거래’ 뿐 아니라 ▲모바일 결제에 따른 수수료 조정 문제 ▲정률제 산정 방식 도입 등 여러 사안들이 한꺼번에 겹쳐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의 시작은 지난해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현대카드가 삼성페이로 결제한 품목에 대해 전표수수료를 지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결제시장에 일대 변혁이 시작됐다. 삼성페이 등 모바일페이는 모바일에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를 한 번만 등록해놓으면 실물 카드를 꺼내지 않아도 비밀번호만 눌러서 결제할 수 있는 서비스다.
현대카드는 삼성페이가 지문 인식으로 결제가 이뤄지는 만큼 서명확인 과정 등이 필요 없게 됐다며 밴 수수료 지급을 현재까지 거부하고 있다.
현대카드의 선제적인 조치는 이후 모바일 결제시장의 방향타가 됐다. 삼성페이와 제휴를 맺고 있는 다른 카드사들도 밴사와 개별 협상에 들어갔으며, 카카오페이·네이버페이와 제휴한 신한·하나·BC카드 등도 불필요한 종이전표 문제를 털어내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10일 CNB에 “단순히 전표수수료를 절약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변화하는 핀테크 금융시대에 맞게 불필요한 과정을 없애자는 취지”라고 밝혔다.
▲‘카드사-밴사-밴대리점-밴사-카드사’로 연결되는 복잡한 결제유통 구조가 결국 소상공인들의 카드수수료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해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촉구 결의대회’에서 소상공인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소액결제 늘수록 손실”
이와 맞물려 전표수수료 산정방식 자체를 바꾸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가맹점 수수료율 인하로 수익성 악화에 직면한 KB국민·삼성·현대·비씨카드 등 대부분 카드사들은 현재 밴사들과 수수료 체계 개편 협상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편의점은 물론 동네슈퍼까지 소액 카드결제가 확산되고 있는데, 이때마다 건당으로 전표수수료를 부과하게 되면 밴사는 앉아서 수익이 올라가고 카드사는 손실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게 여신금융업계의 입장이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몇 천원 짜리 결제 한 건에도 100원 이상의 수수료를 밴사에 지급하고 있어, 소액결제가 늘면 늘수록 손실이 커지는 구조”라고 말했다.
따라서 카드사들은 승인 건수를 기준으로 수수료를 책정하던 ‘정액제’를 결제 금액 기준인 ‘정률제’로 전환해달라고 밴사 측에 요구하고 있다. 최근 신한카드가 밴사와 정률제 전환에 합의했으며, 다른 카드사들도 물밑 협상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위 중재안, ‘관치’ 논란
이번에 시행된 ‘5만원 이하 무서명’ 제도는 이처럼 여러 사안과 맞물려 있다. 카드사가 어느 한쪽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밴사가 물러서지 않는 식으로 실타래가 얽혀있다.
익명을 요구한 카드업계 고위관계자는 CNB에 “여러 사안이 한꺼번에 겹쳐 있다 보니 카드사와 밴사 모두 말을 아끼고 있다”며 “여신협회와 밴업계가 일괄적으로 문제를 풀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보니 개별 카드사와 밴사 간의 협상이 사안별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냉·온탕을 오가는 금융당국의 태도가 사태를 키우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금융소비자연맹 강형구 금융국장은 “금융당국이 인터넷은행, 온라인뱅킹 등 핀테크를 활성화 하자는 입장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밴대리점의 생존권 문제 때문에 주춤하고 있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사태의 본질이 카드사들이 밴사에 위탁관리를 맡겨서 생긴 것인 만큼, 금융당국은 손을 떼고 카드사가 시장논리에 입각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게 순리”라고 말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