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단체인 ‘대한민국 어버이연합’과 500여 대기업들을 대표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간의 커넥션 의혹이 불거지면서 재계가 긴장하고 있다. 20대 총선으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된 상황에서 야당과 시민단체가 국정조사를 요구하며 재계 수장격인 전경련을 정면 비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어버이연합과 전경련이 그동안 야권의 반발을 무릅쓰고 박근혜정부의 경제법안 통과에 앞장서 왔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가 나머지 경제활성화 법안들의 처리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CNB=도기천 기자)
▲전경련이 보수단체인 어버이연합을 지원했다는 의혹이 커지면서 전경련이 추진해온 경제활성화 법안 촉구 서명운동의 진정성이 의심받고 있다. 21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 (사진=연합뉴스)
어버이연합 경제입법 서명운동 전위대 역할
기업·전경련 편에서 노조 집회 때마다 방해
박근혜표 경제개혁 타격…비박계 “자업자득”
이번 사태는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이 지난 11일 어버이연합이 세월호 반대 집회에 탈북자들을 일당을 주고 고용했다는 내용을 보도하면서 비롯됐다. 그러자 JTBC는 전경련이 어버이연합의 자금줄 역할을 하고 있다는 내용을 추가로 보도했다.
이 과정에서 공개된 ‘어버이연합회 집회 회계장부’에 따르면 2014년 4월부터 11월까지 어버이연합이 돈을 주고 세월호 맞불 집회에 동원한 탈북자들의 수는 연인원 1259명, 동원 횟수는 39회에 이른다. 지급된 돈은 2518만원이며, 한번 참석에 2만원씩 지급한 것으로 기재돼 있다.
또 어버이연합 추선희 사무총장의 차명계좌로 의심되는 기독교선교복지재단의 지난 2014년 계좌 입출금 내역에 따르면, 해당 계좌에 전경련이 2014년 9월, 11월, 12월 등 세 차례에 걸쳐 총 1억2000만원을 입금한 것으로 나타났다.
JTBC 보도에 따르면 추 사무총장은 해당 계좌의 현금카드를 소유하고 통장을 관리해 왔다. 해당 통장에 있던 600만원이 어버이연합 사무실의 건물주에게 송금됐고, 탈북어머니회 김모 회장에게도 2900만원이 지급된 것으로 나타났다.
추 사무총장과 어버이연합 측은 해당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추 사무총장은 “재단과 나 사이의 개인적인 채무관계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어버이연합 측은 “집회참가자들에게 준 돈은 교통비 명목이며 회원들의 회비 계정에서 지급된 것”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전경련이 무슨 목적으로 기독교선교복지재단에 거액을 입금했는지에 대해 공식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어 의문이 커지고 있다. 계좌 주인인 선교복지재단은 이미 수년 전 문을 닫은 상태다.
▲전경련을 비롯한 경제단체 대표들이 지난 2월 22일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입구에서 당 관계자들에게 ‘경제활성화 법안 입법 촉구 서명부’를 전달하고 있다. 어버이연합이 전경련의 뒷돈을 받고 동원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서명운동 자체의 도덕성이 훼손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재벌-보수단체 결합…도덕성 ‘치명타’
이번 사태는 어버이연합이 보수적 태도를 취하며 진보진영과 극한 대립을 벌여온 차원을 넘어, 재벌대기업과 결탁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고 있다. 심지어 어버이연합과 전경련의 배후에 청와대가 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보수시민단체의 A대표는 20일 CNB기자와 만나 “어버이연합뿐 아니라 상당수 보수단체들이 외부로부터 자금지원을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청와대가 개입돼 있다는 건 보수단체를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A대표는 “이번에 공개된 어버이연합의 회계장부는 내부자가 언론에 제보한 것으로 최근의 공천반발 사태 등 보수진영 내부 분열 분위기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설명했다.
전경련 내부 사정에 밝은 한 대기업 임원은 “전경련은 일상적인 기부활동의 일환으로 여러 단체를 지원하고 있는데, 지원의 중요한 잣대가 같은 이념성향을 갖고 있느냐다. 어버이연합뿐 아니라 여러 보수단체들이 전경련에 도움을 요청해오고 있고, 전경련은 이들 중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단체를 돕고 있다. 따라서 어버이연합을 후원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실제로 어버이연합은 정부·대기업 편에 서서 여러 활동을 전개해 왔다. 올해 초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서명에 나서면서 시작된 ‘민생구하기 입법 촉구 천만 서명운동’을 전경련 등 경제5단체와 함께 주도하며 법안 처리에 미온적인 태도였던 야당을 압박했다. 서명운동은 삼성 현대차 LG 등 재계 서열 20위권 내 대기업들이 적극 참여했다.
일부 언론이 ‘관제 서명’이라는 지적을 제기하자 해당언론사를 강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MBN ‘뉴스8’의 진행을 맡고 있는 김주하 앵커가 “(박근혜 대통령이) 별의별 방법으로 국회에 법안처리를 호소하다, 서명운동까지 동참하는 상황이 됐다”고 발언하자 어버이연합은 ‘대통령 모욕 발언’이라며 김 앵커의 하차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어버이연합은 매사에 친기업적 태도를 취하면 노조 집해를 방해해 왔다는 점에서 전경련이 어버이연합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다. 지난 2월 5일 서울역에서 설연휴 귀향객을 대상으로 세월호 진상규명 촉구 서명을 벌이고 있던 민주노총 회원들과 충돌한 어버이연합 회원들. (사진=4.16연대)
또 어버이연합의 차명계좌로 추정되는 기독교선교복지재단 통장에 4천만원이 입금된 다음날인 2014년 9월 6일에는 전경련이 통과를 주장해온 민생법안 처리촉구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 전경련은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경제5단체와 경제법안 처리를 위한 실무협의체를 꾸렸으며, 이 협의체에 새누리당·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이 옵저버 자격으로 참여한 상태였다. 협의체를 통해 전경련은 부동산 활성화와 중소기업 지원, 투자 활성화를 위한 10개 법안의 신속한 처리를 정치권에 요구했다. 당시 전경련 허창수 회장(GS그룹 회장)은 “국회에 계류된 투자확대와 관련한 다수의 법률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촉구했다.
특히 어버이연합은 노동단체와의 충돌이 빈번했다. 노조가 집회를 계획하면 같은 자리에 먼저 집회신고를 하는 방식으로 소위 ‘알박기’ 집회를 최근 수년간 여러 차례 열었다.
2014년에는 쌍용차해고 노조원들이 장기농성을 벌이고 있던 서울 대한문 천막농성장에 나타나 노조와 충돌했으며, 올해 2월에는 설연휴 귀향객을 대상으로 세월호 진상규명 촉구 서명을 벌이고 있던 민주노총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을 폭행해 물의를 빚었다.
이처럼 어버이연합이 매사에 친기업적 태도를 취해온 터라 오래전부터 노동·시민단체들은 어버이연합의 배경에 전경련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해 왔다. 전경련은 삼성, LG, SK 등 500여 기업들을 대변하고 있는 이익단체인 데다 한 해 예산이 300억원이 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의 한 관계자는 “대규모 노조 집회 때 마다 어버이연합이 등장했는데, 이들의 식대·교통비 일당 등을 계산하면 한 번에 수천만원이 들어간다. 기업에서 자금을 대주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삼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정치·사법팀장이 전경련이 어버이연합에게 거액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차명계좌를 사용한 점 등을 들어 21일 전경련을 금융실명제 위반·조세포탈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입법촉구 서명운동 ‘알바’ 동원?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이번 사태는 국회에 계류 중인 경제활성화 법안들의 처리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정부-전경련-보수단체(어버이연합 등)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입법촉구 서명운동 자체의 진정성이 의심받게 된다.
현재 정부가 국회통과를 촉구하고 있는 법안은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서비스법)과 노동개혁 4대 법안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간 여러 번 대국민담화를 통해 “일자리창출과 경제살리기에 필요한 법안”이라며 통과를 호소한 바 있다.
서비스법은 서비스 분야에서 성과를 내는 기업에게 자금지원과 세제혜택을 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는데, 법안에 의료영역의 규제완화가 포함되면서 야권이 ‘의료민영화’라며 반발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9일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피신한 서울 종로구 조계사 앞에서 어버이연합이 한 위원장을 즉각 체포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기업 편에서 노조를 압박하는 각종 집회에 여러차례 동원돼 온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연합뉴스)
정부는 노동개혁법에 대해서도 “근로시간 단축과 파견허용업무 확대 등을 통한 일자리 창출 효과가 크다”는 입장이지만, 야권과 노동계는 “비정규직 근로자가 늘고 해고가 쉬워지는 악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는 일단 목표대로 19대 국회에서 쟁점법안을 처리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19대 국회 임기가 5월 29일로 끝나게 돼 시간적 여유가 부족한 데다, 이번 사태까지 터지면서 여당이 법안처리에 나설지조차 불투명한 상황이다.
특히 여당 내 비박계에서는 이미 예전부터 관제 성격 집회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터라 법안 처리가 거북한 상황이 됐다.
법안들의 처리가 20대 국회로 넘어갈 경우, 아예 백지화 될 가능성이 높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야3당이 공조해 어버이연합과 전경련에 대한 국정조사에 나설 경우, 두 단체가 주도했던 경제 법안들은 입지가 더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19대국회에서 발의된 법안들은 국회법상 자동폐기 되므로 처음부터 다시 입법발의를 해야 한다는 점도 여권에 부담을 더하고 있다.
비박계의 한 핵심관계자는 “사실 그동안 관제 성격의 집회에 (전경련 등이) 자금을 대는 것에 대해 당내에서도 상당한 비판이 있었다. 특히 청와대가 보수단체장을 뽑는 선거에 노골적으로 개입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며 “언제가는 터질 일이 터진 것이며, 이런 마당에 대통령이 주장하는 경제법안 통과에 나설 의원이 몇이나 되겠나”고 말했다.
경실련은 20일 성명을 통해 “대기업·재벌들의 이익단체인 전경련이 극우 행동단체인 대한민국어버이연합에 억대 자금을 지원해 온 것으로 드러난 만큼, 전경련은 노골적인 정치개입 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당장 조직을 해체하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