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 씨(사진)를 비롯, 일부 기업과 개인이 해외 여러 곳에 페이퍼컴퍼니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자금흐름 분석에 상당 시일이 걸리는데다, 이미 국세청에 정상적으로 세금을 내고 있는 특수목적법인(SPC)일 가능성이 높아 위법의 진위를 가리기가 쉽지 않다. (사진=연합뉴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 씨를 비롯, 일부 재벌기업들이 해외 여러 곳에 페이퍼컴퍼니를 둔 것으로 알려지면서 큰 파장이 일고 있다. 진원지인 파나마의 세무당국이 이번 조사에 적극 협조하기로 한데다, 국제사회의 이목이 쏠리면서 재계가 긴장하고 있다.
하지만 수년전 뉴스타파가 공개한 해외탈루 혐의 기업의 대부분이 정상적인 특수목적법인(SPC)으로 확인된 바 있어, 이번에도 변죽만 울리다 끝날 가능성도 있다. CNB가 여론재판에 가려진 진실을 들여다봤다. (CNB=도기천 기자)
상당수 기업들 해외 페이퍼컴퍼니 운영
탈루 증거 없이 명단 공개 ‘여론 재판’
다른 나라에 세금 안내려다 오해 받아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인터넷언론 뉴스타파는 최근 파나마 최대 로펌이자 역외 비밀 도매상’으로 악명 높은 ‘모색 폰세카’(Mossack Fonseca)’의 비밀자료를 입수, 이 자료에 언급된 수만 개의 개인·기업 중 일부를 공개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전·현직 각국 정상과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를 비롯한 유명인들이 대거 포함되거나 연루됐으며, 거명된 건수는 1150만 건으로, 사상 최대 규모에 달한다.
이중 한국인은 195명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뉴스타파는 이 자료를 토대로 노태우 대통령의 장남 재헌 씨가 조세회피처인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에 3곳의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사실을 확인했다.
또 포스코건설과 포스코엔지니어링이 인수한 영국 등록 법인 2곳이 영국 공시자료상 자산이 전혀 없는 유령회사라고 밝혔다. 포스코 측은 “실적을 내고 있는 정상적인 회사”라며 반박하고 있다.
나머지 한국기업·개인의 실체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중 상당수가 재계 인사들과 연루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뉴스타파가 단계적으로 이들의 정체를 공개할 예정이라 적잖은 사회적 파장이 일 전망이다.
▲2013년 5월 재벌닷컴이 공개한 국내대기업들의 조세피난처 자산현황. 대부분은 합법적인 페이퍼컴퍼니였으며, 국세청에 세금을 납부하고 있었다. (그래픽=연합뉴스)
대부분 해외컴퍼니 ‘검은 돈’과 무관
하지만 계좌추적 등 자금흐름의 분석에 상당 시일이 걸리는데다, 이미 국세청에 정상적으로 세금을 내고 있는 특수목적법인(SPC)일 가능성도 높아 위법의 진위를 가리기가 쉽지 않다.
특수목적법인은 특수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만든 회사다. 해외 교역·투자시 계약당사자 중 어느 한쪽에 경영권이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해 중립지대에 설립하고 있다. 실제 매출이 이 법인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페이퍼컴퍼니로 불리며, 해당 국가에 내야하는 세금을 줄이기 위해 주로 조세피난처를 이용한다.
2013년 뉴스타파에 의해 재벌가의 해외 페이퍼컴퍼니가 대거 공개되면서 상당수 기업들이 의혹을 받기도 했다. 조사 결과 대부분 탈루·비자금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재계는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당시 이름이 오르내린 재계 인사들은 이수영 OCI 회장 부부,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동생)의 부인 이영학씨, 조욱래 DSDL(옛 동성개발) 회장(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막내 동생) 및 장남 조현강씨,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당시 한진해운 홀딩스 회장)과 조용민 전 한진해운 홀딩스 대표이사, 한화그룹 계열사인 한화역사 황용득 대표, 조민호 전 SK증권 대표이사 부회장과 부인 김영혜씨, 이덕규 전 대우인터내셔널 이사, 유춘식 전 대우 폴란드차 사장 등 수십여 명에 달했다.
또 자산 1조원 이상 민간기업 가운데 케이만군도, 버진아일랜드, 파나마, 마셜군도, 말레이시아 라부안, 버뮤다, 사모아, 모리셔스, 키프로스 등 9개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가 있는 곳은 24개 그룹사였다.
명단공개 후 국세청은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벌였지만 추징세액은 1300억원에 불과했고 검찰에 고발된 사람도 3명 뿐이었다. 당시 재벌가의 해외법인이 총125개, 자산총액은 5조6900억원에 달한 점을 감안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대부분 기업들이 정상적으로 세금을 신고해왔단 얘기다.
실제로 가장 많은 해외법인을 가진 SK그룹의 경우, 선박을 구매할 때 자금을 대는 대주사와의 거래를 위한 특수목적법인들로 확인됐으며 탈루와는 성격이 달랐다. 한화그룹의 역외법인 또한 중국과 독일의 태양광 업체 인수 과정에서 설립된 회사였다.
따라서 이번에 뉴스타파 등이 공개한 일명 ‘파나마 페이퍼스’ 또한 이 중 상당수는 합법적인 특수목적회사일 것으로 짐작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업들이 해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산·지분을 취득하거나 청산할 경우 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해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우고 있다”며 “사업목적상 만든 정상적인 회사가 자꾸 탈루 의혹을 받고 있어 곤혹스럽다”고 전했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인터넷언론 뉴스타파가 2013년 5월 재벌가의 해외 페이퍼컴퍼니현황을 공개하고 있다. 국세청은 이들이 제기한 탈루·비자금 의혹에 대해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실시했지만 대부분은 해외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정상적인 특수목적회사로 밝혀졌다. (사진=연합뉴스)
무차별 공개, 기업 활동 위축
정부가 최근 실시한 ‘역외소득 자진신고’ 과정에서 ‘파나마 페이퍼스’ 중 일부가 이미 세금을 냈거나 내겠다고 신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
기획재정부 역외소득·재산 자진신고기획단에 따르면, 작년 10월 도입된 ‘미신고 역외소득·재산 자진신고제’가 종료된 지난달 31일까지 수천 건에 달하는 자진신고가 접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에 재산을 갖고 있는 국내 거주자와 외국에서 발생한 소득이 있는 개인과 법인이 주를 이뤘다.
자진신고제는 숨어있는 역외소득을 신고할 경우, 과태료와 형사처분을 감경해주는 제도로 이번에 6개월 동안만 한시적으로 운영됐다.
▲국세청이 밝힌 역외탈세·재산은닉 흐름도. (국세청 제공)
아직 정확한 집계가 나오진 않았지만 우리와 비슷한 경제규모인 호주가 2014년 한시적으로 실시한 자진신고 기간에만 약1000억원의 세금이 걷혀진 점을 감안하면 우리도 상당한 규모의 ‘숨은 해외자산’이 밝혀질 것으로 추정된다.
‘파나마 페이퍼스’ 중에서도 자진신고한 기업과 개인이 상당수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이미 스스로 세금신고를 했음에도 뉴스타파의 명단공개에 따른 여론재판으로 피해를 볼 가능성이 커졌다.
회계법인의 한 관계자는 CNB에 “페이퍼컴퍼니는 동전의 양면 같은 얘기다. 전체적으로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가 늘고 있는 것은 교역규모가 커진데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며, 사업경비와 세금을 줄이기 위한 정상적인 측면과 위장투자로 비자금을 조성하기 위한 불법이 공존하고 있다”며 “국가간 금융정보 교환 등 국제공조시스템이 강화된 만큼 빠르게 역외탈세 진위를 가려내 괜한 오해로 국제사회에서 이미지 손실 등 피해를 입는 기업들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