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불고 있는 두 종류의 바람이 심상치 않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배신의 정치’로 찍혀 무소속 출마한 유승민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후보가 경기도지사를 지낸 새누리당 김문수 후보를 꾸준히 앞서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한 사람은 사실상 ‘유승민 대 박근혜’의 선거를 치르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야당불모지에서 최초의 반란을 꿈꾼다. 만약 이들이 나란히 당선된다면 여야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부상할 전망이다. 둘은 공교롭게도 경북고 선후배 사이고 나이도 같다. 한때 같은 당에 몸담았고, ‘중도개혁’ ‘실용노선’이라는 점도 닮았다. (CNB=도기천 기자)
▲대구에서 합리적 보수·합리적 진보를 내걸고 정치혁신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무소속 유승민 후보(왼쪽)와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후보. 이들이 나란히 당선될 경우 새로운 여당, 새로운 야당이 탄생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연합뉴스)
유승민 따뜻한 보수, 진보층도 감동
김부겸, 야당 불모지서 세번째 도전
합리적 진보·보수, ‘동토의 땅’ 녹여
유승민·김부겸 후보는 둘 다 1958년 1월생이다. 유 후보는 대구에서, 김 후보는 대구에서 1시간 남짓 거리인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김 후보가 먼저 학교에 들어가 경북고등학교 1년 선배가 됐다.
나란히 서울대에 입학했지만 김 후보는 졸업 때까지 11년이 걸렸다.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투신하며 구속, 제적, 복학을 반복했다고 한다. 반면 유 후보는 서울대를 일치감치 졸업하고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들은 한때 동지였다. 유 후보가 2000~2003년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여의도연구소장을 지낼 때 김 후보는 이 당의 16대 국회의원이었다.
김 후보의 한 지인은 “두 사람은 같은 학교·고향 선후배 지간이라 막역한 사이다.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지금도 안부를 묻고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선조에 찍혀 의병장 된 유승민
김 후보는 2003년 7월 이부영 이우재 김영춘 안영근 의원 등 ‘독수리 5형제’와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유 의원은 2004년 비례대표로 뱃지를 단 뒤, 이듬해 대구 동구을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18대, 19대 총선에서도 계속 승승장구하며 지금까지 동구을에서 국회의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유 의원은 2007년 대선 경선 때 박근혜 캠프의 정책 단장을 맡는 등 ‘친박’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경선 패배 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친박을 대표해 야당 저격수를 자처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박 대통령을 한나라당 비대위원장으로 컴백시키는 데도 일조했다.
▲무소속 유승민 후보가 지난 26일 대구시 동구 반야월종합시장을 찾아 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때부터 친박 진영에서는 ‘호남의 이정현, 영남의 유승민’이라는 말이 나왔다. 박 대통령은 ‘공천’으로 화답했고, 유 후보는 10년 넘게 국회의원 뱃지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바른 소리가 박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기 시작했다. 박근혜 비대위 체제에서 당명 개정 논란이 일어날 당시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개정하자는 박 대표의 제안에 태클을 거는 등 돌직구를 날렸다.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당 원내사령탑에 오른 뒤에는 여러 차례 박 대통령의 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과 갈라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국회법 파동이다. 지난해 5월 본회의를 통과한 국회법 개정안은 국회의 행정입법에 대한 수정·변경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연히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으로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는 법안이다.
박 대통령은 “공무원연금개혁 처리를 미루더라도 국회법을 야당과 합의해서는 안된다”며 반대했지만, 결국 여야 협상이 타결됐다. 이 과정에서 여당 원내대표였던 유 후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국 박 대통령은 ‘거부권’을 선언하는 초강수를 내던졌고, 국회법개정안은 다시 본회의에 올랐지만 정족수 미달로 폐기됐다.
이후 박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유 의원을 겨냥해 “배신의 정치를 국민들이 심판해 달라”고 주문했고, 여당 내에서는 ‘유승민 찍어내기’가 본격화됐다. 유 후보는 결국 4개월여 만에 원내대표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친박계는 이번 공천 과정에서 유 후보를 배제시켰다. 공천심사위원회가 유 후보 한 사람을 놓고 수십 차례 공식·비공식 회의를 가지면서 시간을 끌자, 유 후보는 선거법상 탈당 마감 시한 1시간을 앞두고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유 후보와 마찬가지로 김부겸 후보도 순탄치 않은 길어 걸어왔다.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야당 내 주류인 친노·486세력들에 밀려 주변부를 맴돌았다. 우여곡절 끝에 최고위원 자리에도 올랐지만 세력을 키우진 못했다.
야당불모지 대구에서 수십년 묵은 여야 대결구도를 끝내겠다며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갑에 출마해 40.3%를 득표하며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지만, 장벽을 넘진 못했다.
2014년엔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해 40.4% 득표를 올렸다. 수성갑만 놓고 보면 유권자의 절반(50.1%)이 김 후보를 지지했다. 이는 역대 어느 야당 후보도 넘지 못했던 수치였다. 그때부터 대구에서 본격적으로 ‘김부겸 돌풍’이 불었다.
‘소신파’ 두 사람, 동병상련
두 사람은 비슷한 정치실험을 하고 있다. 유 후보는 보수의 변화를, 김 후보는 진보의 변화를 내세우고 있다.
유 후보는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면서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원칙이 지켜지고 정의가 살아있고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그의 생각은 야당 의원들까지 감동시킨 지난해 4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 잘 녹아있다.
당시 그는 “어제의 새누리당이 경제성장과 자유시장경제에 치우친 정당이었다면, 내일의 새누리당은 성장과 복지의 균형발전을 추구하는 정당이 되겠다”며 비정규직 차별 해소, 증세 없는 복지 반대, LTV·DTI 완화 반대 등 박근혜 정부의 세수·부동산·노동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친박·친노 모두를 겨냥해 진영논리를 벗어날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당 안팎에서는 ‘당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다’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정치생명이 끝났다’ 등 비난과 걱정이 쏟아졌다.
▲소탈한 성격인 김부겸 후보가 지난 25일 저녁 수성구 황금시장 내 선술집에서 이 지역 50대 아버지들과 막걸리잔을 기울이고 있다. (사진=김부겸 페이스북)
김 후보 또한 유연한 진보, 합리적 진보를 주창하다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2014년 대구시장에 출마했을 때 박정희 컨벤션센터 건립에 찬성하며 광주의 김대중 컨벤션센터와의 교류를 통해 대화합의 역사를 만들겠다고 천명했다. 그러자 여권의 지지와 야권의 비난이 동시에 쏟아졌다. 야당 내에서는 “박정희 시절 고난을 겪었던 사람이 맞느냐”는 말까지 나왔다.
세월호 정국 때도 대통령과 정부를 비판하기 보다는 협력과 문제해결에 집중하다가 더민주 내 강성그룹으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두 사람이 동병상련의 처지가 되자, 지역 정가에서는 한때 연대설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유 후보가 원내대표에서 물러난 직후인 지난해 8월 김 후보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대구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유승민이 될 수 있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김 후보가 대구에서 식사 자리를 마련해 유 후보를 만날 것이라는 말이 돌았고, 심지어 합리적 보수로 대변되는 손학규 더민주당 고문 등과 함께 제3지대 중도신당 창당을 추진할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말이 말을 만들자 김 후보는 “개인적 친분 차원에서 유 의원의 용기를 격려하려는 것일 뿐, 손을 잡자는 건 전혀 아니다”며 선을 그었다.
▲대구 동부지역은 동을의 유승민 후보(가운데)를 중심으로 무소속 연대가 추진 중이다. 또 이 지역에 속해있는 수성갑에서는 더민주당 김부겸 후보가 새누리당 김문수 후보를 앞지르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27일 유 후보 선거사무소에서 열린 SNS 지지자 간담회에 새누리당을 탈당해 무소속 출마한 류성걸(동갑)·권은희(북갑) 후보가 유 후보와 함께 연대를 과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새보수·새진보 ‘정치 실험’ 중
현재 두 사람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영남일보와 대구MBC가 총선 후보등록이 마무리된 지난 25~26일 리얼미터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수성갑에서 김 후보(52.7%)는 김문수 후보(38.2%)를 14.5%포인트 차로 앞섰다. 김 후보는 김문수 후보가 이 지역 당협위원장에 내정된 지난해 8월 이래 줄곧 10%안팎의 차이로 앞서고 있다.
유 후보는 새누리당이 자신의 지역구에 후보를 내지 않기로 하면서 더민주 후보를 멀찍이 따돌린 상태다. 특히 유 후보는 여권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 부문에서 1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 이어 18%안팎의 지지율로 2위 자리를 굳히고 있다. ‘유승민 공천파동’ 이후 여당 지지율이 추락하고 있는 점은 상대적으로 유 후보의 입지를 더욱 단단하게 하고 있다.
두 사람의 선거구가 맞닿아 있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동반상승 효과도 예상된다. 두 사람의 선거사무소는 직선거리로 4~5킬로미터 남짓하다.
▲유승민 후보의 국회의원사무소와 김부겸 후보의 선거사무소는 직선거리로 5킬로미터 남짓하다. 이들이 출마한 대구 동부지역에는 류성걸(동갑)·권은희(북갑)·주호영(수성을) 의원이 새누리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이 지역에는 ‘무소속·야당 vs 박근혜’의 전선이 형성됐으며, 대구 정가에서는 이들이 당선되면 박 대통령의 ‘대구 동부전선’이 붕괴되는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사진=네이버 지도)
대구 정가에서는 이들이 당선되면 박 대통령의 ‘대구 동부전선’이 붕괴되는 것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동부전선에는 이들 외에도 3선의 주호영 의원이 새누리당을 탈당해 ‘진박’(진짜 친박) 이인선 후보와 수성을에서 맞붙었으며, 유 후보 영향권에 있는 동구갑에서는 유 후보와 함께 탈당한 류성걸 후보가 ‘진박 3인방’ 멤버인 행자부 장관 출신 정종섭 후보와 결전을 벌인다.
유 후보는 류성걸 후보 등을 전면에 나서 돕고 있으며, 이들과의 ‘무소속 연대’를 추진 중이다. 이 지역에서는 ‘무소속·야당 대 새누리당’이 아니라 ‘유승민·김부겸 대 박근혜’라는 말까지 나온다.
따라서 박 대통령으로서는 사활을 걸고 지켜야할 곳이 됐고, 이곳이 무너지면 지지기반이 통째로 흔들릴 수 있다.
반대로 유승민·김부겸이 승리하면 새로운 여당, 새로운 야당이 탄생하는 기폭제가 된다.
대구 정가의 한 관계자는 “이들의 약진이 친박·친노 등 진영논리에 갇힌 정당정치와 대구라는 특수한 지역정서에 던지는 메시지가 큰 것만은 분명하다. 합리적 보수, 합리적 진보로 대변되는 두 사람이 낡은 대결구도를 깨고 다음 대선에서 만날 수 있을지를 결정짓는 선거”라고 평가했다.
대구 민심은 여전히 박 대통령에 대한 애정이 굳건하지만, ‘유승민에게 해도 너무했다’는 싸늘한 비판여론 또한 만만치 않다. 김 후보에 대해서도 “세 번째로 도전하는 김부겸을 이번에는 밀어줘야 한다”는 여론과 “그래도 새누리당”이라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대구는 어떤 선택을 할까. 판도라의 상자는 16일 후에 열린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