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재계 키워드는 ‘슬림화·집중화’
선진국·신흥국 사이 ‘넛크래커’ 위기
빅딜·사업재편·구조조정 올해 더 가속
새해 한국경제를 낙관한 재계 총수는 찾기 힘들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매출액 기준 6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업경기실사지수(BSI) 조사 결과, 1월 경기 전망치는 93.2로 3개월 연속 기준선 100을 하회했다. BSI가 기준치 100 보다 낮다는 얘기는 긍정적인 전망 보다 부정적인 예측을 한 기업 수가 많음을 뜻한다. 수출 기관들이 조사한 올해 1분기 수출BSI에서도 대내외 여건이 개선될 것으로 생각하는 기업보다 그렇지 않은 기업이 더 많았다.
재계 수장들은 신년사에서 철저한 역량 분석을 통한 경쟁력 강화와 차별화된 고객가치 창출, 과감한 투자와 사업재편, 미래 먹거리 발굴 등을 주문했다. 심지어 일부 총수들은 자칫 안일하게 대처한다면 성장은 고사하고 살아남기조차 어려울 수 있다는 ‘강한 처방전’도 내놨다.
재계1위 삼성그룹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그룹 차원의 별도 신년하례식 등의 행사를 갖지 않는다. 대신 실질적으로 그룹을 이끌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주요 계열사들과 잇따라 간담회를 갖고 올해 목표와 전략 점검에 나선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와병 중인만큼 떠들썩한 신년회보다는 ‘실속 행보’로 내실을 다지겠다는 속내다.
삼성의 경영혁신은 2013년 연말 제일모직의 패션사업부문을 삼성에버랜드에 넘기면서 시동을 걸었다.
2014년엔 삼성SDS, 삼성에버랜드, 제일모직, 삼성SDI 등 핵심계열사들이 줄줄이 합병·이전 등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지난해에는 삼성토탈·삼성종합화학 등 4곳을 한화에 매각한 데 이어 삼성SDI의 케미컬 부문 등 3곳을 롯데에 넘기는 등 방위·화학 사업을 정리했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도 성사시키며 몸집을 상당히 줄였다.
본격적인 ‘이재용 시대’를 맞는 올해에도 빅딜과 사업재편이 속도를 낼 전망이다. 자동차 전장(電裝)사업팀을 신설하고 본격적인 스마트카 시장에 진출한다. 최근 공사에 착수한 바이오로직스 3공장과 관련해 ‘삼성 바이오’의 로드맵을 그리는 것도 이 부회장의 몫이다.
반대로 전자·금융·건설 등 실적이 부진한 사업은 과감하게 축소하는 ‘이재용식 선택과 집중’이 올해 더 두드러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른 인력감축도 불가피해 보인다. 이미 지난해 5천여명의 삼성맨들이 각 계열사를 떠났다.
이 부회장은 6~9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가전 전시회 CES 2016에 가지 않는 대신 국내에서 새해 사업전략을 짜는 데 전념할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서열 2위 현대차그룹은 기술혁신을 선포했다. 자동차가 환율 민감 업종인 만큼 엔저·위안화 약세 등으로 인해 올해도 쉽지 않은 한해가 될 전망이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4일 양재동 사옥에서 열린 시무식에서 “올해 자동차 산업은 기존 메이커 간의 경쟁 심화와 함께 자동차의 전자화에 따른 산업 구조적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다”며 “불확실성이 높아진 경영 환경을 극복하고 그룹의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미래 경쟁력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연구개발(R&D) 투자를 대폭 확대해 자동차 산업의 기술 혁신을 주도해야 하고 각국의 안전과 환경 규제 강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며, 정보통신과 전자기술이 융합한 미래 기술개발역량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정 회장은 밝혔다.
이에 따라 현대차는 제네시스 브랜드의 안착과 친환경 전용차의 성공적 출시, 멕시코 공장의 안정적 가동 등에 주력할 계획이다. 제네시스는 현대차그룹이 글로벌 양산차 브랜드라는 한계를 벗어나 고급차 브랜드로 도약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프로젝트인 만큼 그룹 차원에서 공을 들이고 있다.
새해 글로벌 판매 목표는 813만대로 설정했다. 이는 지난해 판매실적 대비 12만대 늘어난 수치지만, 작년 목표치인 820만대보다는 7만대 낮춰 잡은 것이다. 정 회장은 연초 대부분의 시간을 올해 사업구상을 하는 데 할애할 것으로 알려졌다.
LG그룹은 사실상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했다.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더욱 커지고 글로벌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올해 경영 환경이 급속히 어려워질 것이라는 예상에서다.
LG전자는 지난해 올레드 TV분야에서 세계 1~2위를 다투는 등 결실을 맺었지만,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세계 5위권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등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 등 전자계열사들의 실적 부진을 어떻게 만회하느냐가 최대 관건이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신년사에서 “상황을 직시하고 혁신을 통해 미래 시장을 선도해 나가자”고 임직원들을 독려했다.
구 회장은 “전자, 화학 등 우리 주력산업이 신흥국의 도전을 받으면서 산업 구조상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고 혁신기업들은 이전과 다른 사업 방식으로 경쟁의 패러다임을 바꾸며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며 “역량을 철저히 분석해 경쟁력을 강화하고 차별화된 고객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업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SK그룹은 5대그룹 중에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최근 이혼 의사 표명으로 구설에 휘말린 최태원 SK 회장은 신년사에서 그룹의 안정과 핵심 경쟁력 강화에 방점을 뒀다.
최 회장은 “지난해 그룹 창사 최초로 영업이익 10조원을 돌파하는 성과를 거뒀다”며 “올해는 국내외 경영환경이 불투명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패기를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겠다. 제 자신과 모든 최고경영자(CEO)들이 앞장서 위기를 돌파하겠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지난해 8월 복귀 후 첫 조직개편에서 ‘따로 또 같이’라는 경영방식을 유지하는 등 ‘안정’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 연말 인사에서 대부분의 계열사 대표들을 재신임 또는 승진시키면서 지난 수년간 오너 공백으로 불안했던 기반을 다시 다졌다.
SK그룹은 주요 사업분야인 에너지·통신·반도체·제약(바이오)을 비롯해 그룹의 중장기 성장을 담보할 신수종사업 분야에 대한 장기플랜을 조만간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있은 CJ헬로비전 인수 때처럼 과감한 베팅이 이뤄질지가 관심사다.
최 회장은 이번달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에 3년 만에 참석한다. 1988년부터 2013년까지 16년간 한해도 빠짐없이 포럼에 참석해 전 세계 정·관계, 재계 인사들과 교류해 왔으나 최근 몇 년 간은 재판을 받거나 수감 중인 관계로 불참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형인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SDJ코퍼레이션 회장) 간의 경영권 분쟁으로 극심한 내홍을 겪고 있는 롯데는 지배구조 안정과 사업혁신이 최대 화두다.
신동빈 회장은 신년사에서 “익숙함은 과감히 포기하고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해 달라”며 “시대의 변화에 맞지 않는 기존의 사고와 관습, 제도와 사업전략은 모두 버리자”고 주문했다.
롯데사태는 신 회장과 신 전 부회장이 한·일 양국에서 서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법정으로 공이 넘어간 상태다. 현재까지 양측이 제기한 법적 분쟁은 일본 3건, 국내 6건 등 총 9건에 달한다. 따라서 갈라진 조직을 추슬러 신 회장 중심의 강력한 경영권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다.
철강업계 불황이 장기화 되면서 고강도 경영쇄신을 벌이고 있는 포스코는 새해에도 구조조정의 고삐를 늦추지 않을 계획이다.
경쟁력이 약하거나 핵심 자산이 아닌 분야를 중심으로 지난해 국내외 19개 계열사(해외 연결법인 13개사 포함)를 정리한 포스코는 올해에는 35개사를 더 쳐낼 계획이다. 2017년 35개 등 총 89개 계열사를 매각 또는 청산할 방침이다.
권오준 포스코 회장은 포항제철소에서 열린 시무식에서 “올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한층 더 어려워질 전망”이라고 전제한 뒤, “구매부터, 생산, 기술개발, 나아가 경영자원 관리까지 조직 운영의 모든 부분이 저비용, 고효율 구조로 일대 전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도 신년사에서 위기를 강조하면서 “작은 구멍 하나에 거대한 배도 침몰할 수 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올해도 세계경제는 불안이 가중되며 어렵고 힘들다. 모두 긴장감을 높이고 환율, 금리, 유가와 같은 대외 변동성을 예의주시하며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차단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밖에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인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수익성 확보와 미래 먹거리 발굴 등을 임직원들에게 주문했다. 허 회장은 ‘GS 신년모임’에서 “선택과 집중을 제대로 해야만 당장의 수익성 확보는 물론이고 미래성장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10년, 20년을 내다보는 미래 먹거리 발굴과 사업 포트폴리오 강화에 힘써 달라”고 주문했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인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사내게시판에 올린 신년사에서 “세계경제는 저성장이 지속될 것”이라고 전제한 뒤, “이럴 때일수록 선제적,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하고 상대적으로 호경기를 맞은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과 고성장이 예상되는 인도 같은 신흥국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기업 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