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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24] YS, 떠나는 길에 ‘그 농민’ 위로 했을까

이슬비 내리는 서울대병원… YS 빈소와 백남기씨 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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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도기천기자 |  2015.11.26 09:17:06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에 25일 늦은 밤에도 조문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도기천 기자)

(CNB=도기천 기자) 새벽부터 진눈깨비가 날리더니 온종일 가는 빗줄기가 오락가락 했다. 25일 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은 떠나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려는 사람들로 물결을 이뤘다.
 
이날 하루에만 1만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빈소를 찾았다. 그가 영면한 22일부터 이날 자정까지 다녀간 조문객이 4만여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과거 민주계, 상도동계로 불렸던 사람들이 닷새째 조문객을 맞으며 사실상 상주역할을 하고 있다. 김수한 전 국회의장과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 김기수 전 대통령 수행실장, 박관용 전 국회의장, 김덕룡 전 의원, 새정치민주연합 손학규 전 상임고문 등이다.

YS와 오랜 악연인 전두환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 변호사가 빈소를 찾았다. 노 변호사는 병상에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왔다.   

YS는 집권 당시 5·18특별법을 제정,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웠고 이로 인해 오랜 세월 이들과 척지고 살았다.   

전 야구선수 박찬호, 민주공화당 허경영 총재, 배우 이덕화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유명인들이 다녀갔다.

YS 빈소 옆 중환자실엔…

빈소가 마련된 장례식장에서 몇 발자국 걸어가면 중환자병동이 있다. 이곳에는 지난 14일 광화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에 참석했던 농민 백남기(69) 씨가 입원해 있다.

백씨는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주관하는 전국농민대회에 참석했다가 변을 당했다.

전국농민대회는 민중총궐기 대회에 앞서 열린 사전집회였다. 백씨는 행진을 막는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의식을 잃은 뒤 뇌수술을 받았지만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백씨 가족에 따르면 ‘연명치료를 중단한’ 상태라고 한다.

서울대병원 앞 인도 변에는 백씨의 회복을 기원하고 경찰의 강경진압을 규탄하는 천막 농성장이 설치돼 있다.

지난 15일부터 계속돼온 촛불문화제가 이날 밤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백씨의 터전인 전남 보성군 옹치면에서 상경한 주민들과 농민회 회원 등 50여명이 촛불을 밝히고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의 입구에는 지난 14일 민중총궐기 대회에 참석했다가 중상을 입은 농민 백남기(69)씨의 회복 기원 및 경찰의 강경진압을 규탄하는 천막농성장이 마련돼 있다. 농성장 앞에 내걸린 백씨의 사진과 캐리커처. (사진=도기천 기자)

대통령과 농부, 그들이 꿈꾼 세상은…

YS와 백남기, 전 대통령과 일개 농부, 전혀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은 묘한 인연으로 얽혀 있다.

아예 비교대상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을 한데 두고 조명하고자 하는 이유는 역사가 이들의 삶을 그냥 두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 전직 대통령을 일개 농부와 비교하는 게 이상하리만큼 어색하지 않다.

YS는 생전에 어느 역대대통령 보다 농사일에 대한 애착이 컸다. 그의 고향은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 그곳에서 여러 척의 어선을 갖고 멸치잡이를 하던 고 김홍조 옹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홍조 옹이 자수성가로 일군 부(富)는 두고두고 그의 정신적, 생계적 밑천이 됐다.

그래서 우리 농어업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특히 우리밀과 관련해 여러 일화를 남겼다.

집권 초기인 1993년, 절멸 위기에 놓인 우리밀을 살리기 위해 청와대 직원 수십여명이 단체로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당시는 80년대 초 정부가 밀 수매를 중단하면서 우리 농촌에서 밀 종자가 자취를 감춘 때였다. 

생전에 즐겨먹던 칼국수도 수입밀가루에서 우리밀 재료로 바꿨다. 대통령 담화문에서 직접 우리밀살리기 운동을 언급하기도 했다.

1992년 대선 때 그의 공약은 “대통령직을 걸고 쌀시장 개방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진 못했다. 우루과이라운드(UR)의 거센 파고가 밀려왔고, 10년 동안 쌀 관세화 유예를 받긴 했지만 농산물시장은 이때부터 사실상 개방됐다.

그는 1993년 12월에 “국민에게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 못해 진심으로 사과 드린다”는 요지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사과, 죄송, 죄책감, 책임이라는 단어가 수십번 등장했다.

▲농민회 회원들과 시민들이 매일 밤 백남기(69)씨의 회복을 비는 촛불문화제를 열고 있다. 25일 저녁 모습. (사진=도기천 기자)

‘우리밀’ 애착 컸던 YS와 백씨

그 즈음 백씨는 농민운동의 선봉장이 돼 있었다. 백씨는 1989~1991년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8대 회장, 1992년 가톨릭농민회 전국부회장, 우리밀살리기 전국회장, 보성군농민회 감사 등을 맡을 정도로 농민운동에 열심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YS처럼 우리밀에 대한 애착이 유별났다. 백씨는 1989년부터 1991년까지 3년여 동안 전국 방방곡곡 돌며 밀 종자를 모았다. 1992년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창립을 주도했고, 2년 뒤 공동의장을 역임한다.

한마디로 백씨는 농부이자 투사였다. 백씨는 쌀·밀 농사를 직접 짓는 한편 우리밀살리기 등 농민공동체운동을 이끌었다.

백씨의 지인들은 “그는 30년 가까이 한 자리에서 농사를 지은 순수한 농사꾼이자 농민운동에 헌신해 온 사람”이라고 전한다. 지난 14일 농민대회 때도 맨 앞줄에 서서 쌀 수입 중단 및 정부 수매 정책에 항의하다 일을 당했다.

YS는 지난 19일 발열 및 호흡곤란 증세로 입원했다가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서 치료를 받던 중 22일 새벽에 숨을 거뒀다. 그가 입원하기 닷새 전에 백씨는 중환자실에서 뇌수술을 받았다. 두 사람은 같은 병동에서 4일 남짓한 시간을 보냈다.

YS는 떠나면서 백씨를 위로해 줬을까, 두 사람이 꿈꾼 세상은 어떤 곳이었을까, 그들이 남긴 숙제는 고스란히 우리 몫으로 남아있다.

(CNB=도기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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