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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1988 프레임’에 갇힌 대한민국

폭력집회·과잉진압? 본질은 사라지고 현상만 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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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도기천기자 |  2015.11.19 09:10:58

(CNB=도기천 부국장) 그 시절엔 그랬다. 대규모 집회가 예고된 뒤 으레 경찰이 원천봉쇄에 나섰다. 집회는 폭력시위로 변했고 공권력은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쇠파이프와 화염병 최루탄이 거리를 메웠다. 법무부장관과 경찰청장이 번갈아가며 텔레비전에 나와 “자유민주질서를 위협하는 좌경세력을 발본색원 하겠다”고 말했다.

마지막 시점엔 대통령이 등장한다. 어느 때보다 근엄한 표정으로 “어떤 경우도 폭력은 용납되지 않는다”며 시위현장에서 부상당한 공무원들을 위로한다. 이후 대대적인 검거작전이 시작됐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1980년대 대한민국 풍경이다. ‘응답하라 1988’에는 낭만과 추억만 있는 게 아니다. 소름끼치는 폭력과 억압이 있었다. 그런 세월을 딛고 30년 시민투쟁으로 민주화를 이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때가 다시 현실이 되고 있다. 

기자만의 생각일까? 지난 14일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가 그랬다.  

최루탄이 최루액 물대포로 바뀌고, 전경 방패로 막던 게 버스 차벽으로 바뀌었고, 접이식 사다리와 밧줄이 시위에 등장했다는 게 달라졌을 뿐이다.

집회 전날 교육·법무·행자·농림·고용부 등 5개 부처가 불법집회 참여를 자제해 달라며 공동 담화문을 발표한 것도 그 시절을 꼭 닮았다.

시위대의 폭력성을 부각시킨 여당과 보수언론의 행태도 그때를 빼닮았고, 경찰청장이 불법폭력행위를 벌인 주동자와 가담자는 전원 사법처리하겠다고 한 뒤, 조계종으로 몸을 숨긴 민주노총 위원장의 검거작전에 나선 것도 똑같다.

그날 사람을 정조준한 물대포 직격탄에 맞아 한 농민이 중태에 빠진 것은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다. 

지금은 그들이 왜 모였는지, 무엇을 주장했는지 아는 이들이 별로 없다. 폭력시위와 과잉진압을 둘러싼 논란만 거세다.

‘80년대 시나리오’ 판박이

민중총궐기 대회는 민주노총·전국농민회총연맹 등 53개 노동·시민·농민단체가 연대한 집회였다. 전국에서 상경한 노동자, 농민, 빈민 등 13만 여명(경찰추산 6만8천명)이 서울 중심부에 운집하면서 절정을 이뤘다.

아무리 조직적으로 동원했다 하더라도 박근혜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팽배해 있지 않고는 이뤄질 수 없는 규모의 시위였다.

이들은 △노동개악 중단 △쌀 수입 저지 △노점단속 중단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 △재벌 곳간 열어 청년-좋은 일자리 창출 △역사왜곡 중단, 역사교과서 국정화 계획 폐기 △세월호 진상규명 등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과 난제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기자는 당시 여러 단체로 나뉜 사전집회들 중에서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빈민·장애인대회를 먼저 취재했다.

전국철거민연합·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노점상전국연합 등이 참가한 집회로, 우리사회에서 가장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외침이었다. 50~60대 고령자들이 대부분인 이들은 집회가 끝난 뒤 광화문으로 행진했다.
 
시청광장을 넘어서기 무섭게 거대한 장벽을 만났다. 장벽 근처로 다가가자 최루액 물대포 세례를 맞았다. 세상에서 가장 힘없는 이들의 외침마저 그렇게 묻혀버렸다.

폭력시위는 물론 잘못된 행위다. 주동자들이 처벌받아야 하는 것도 마땅하다.

하지만 이 대규모집회를 통해 드러난 민심을 보지 못하고 불법·폭력만 본다면 숲은 못보고 나무만 보는 것이다. 정부·여당은 집회의 폭력성만을 따지면서 비난하는 데 열중할 것이 아니라 이들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에도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불의가 법이 될 때 저항은 의무가 된다”는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말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빈다. 
 
(CNB=도기천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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