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계좌이동제 신청 사이트인 ‘자동이체 통합관리시스템(페이인포·Payinfo)’의 접속자 수는 약 1만건 내외, 자동이체 계좌 변경을 신청한 건수는 하루 5천건 내외다.
계좌이동제가 실시된 지난달 30~31일 이틀간 계좌이동 사이트인 ‘페이인포(www.payinfo.or.kr)’ 접속 건수가 21만2970건, 자동이체 변경건수는 3만4517건, 해지건수는 7만301건에 달했던 것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치다.
계좌이동제는 주거래 계좌를 다른 은행으로 옮길 때 기존 계좌에 등록된 여러 자동이체 건을 신규 계좌로 자동 연결해 주는 시스템이다. 기존에는 자동이체 건별로 일일이 변경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으나 지금은 주거래 은행을 바꾸기가 쉬워졌다.
이에 따라 연간 800조원대로 추산되는 자동이체 시장을 놓고 은행권의 고객 빼앗기와 지키기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돼 왔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큰 혼란은 없었다. 계좌이동제가 시들해진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자동이체 범위가 한정돼 있다는 점이다. 현재는 통신·보험·카드 3개 업종의 자동납부를 대상으로 한 계좌 변경 서비스만 이뤄지고 있다. 핸드폰과 집전화 요금, 신용·체크카드 결재, 각종 보험료 납부 등이다.
아파트관리비, 가스사용료, 전기세, 학원비 등은 예전처럼 건별로 변경해야 한다. 통장이 바뀌더라도 자동으로 변경되지 않는다.
금융당국은 내년 6월까지 전체 요금청구기관으로 계좌이동제를 확대할 계획이지만 현재는 일부만 자동변경 되므로 주거래 은행을 이동할 경우, 이중으로 계좌를 관리해야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상황이 소비자들을 망설이게 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자동이체, 자동납부, 자동송금 등 용어도 혼란을 더하고 있다.
금융당국의 정의에 따르면 자동이체는 자동납부와 자동송금 두 가지로 나뉜다. 자동납부는 요금청구기관의 청구에 의해 정기적으로 납부하는 서비스다. 보험료, 통신비, 아파트관리비, 가스사용료 등이다.
자동송금은 개인이 수취인의 계좌를 지정해 정기적으로 이체하는 서비스다. 부모님 용돈, 월세, 동창회비 등이다.
이중 계좌이동제에 해당되는 것은 자동납부 부분이며, 현재는 자동납부 항목 중에서도 통신·보험·카드 3개 업종만 해당된다.
두 번째는 직장인들의 경우, 급여입금 계좌가 사실상 주거래 계좌의 역할을 하고 있어 계좌이동제를 신청 하려면 급여통장을 변경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급여계좌를 바꾸려면 직접 회사에 계좌 변경을 요청해야 한다. 경직된 직장 문화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회사에 ‘눈치 보이는’ 일을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상당수 기업은 직원들에게 급여계좌를 특정은행으로 지정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가령 회사의 주거래은행이 우리은행이면 직원들의 급여통장도 우리은행으로 통일하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급여이체 수수료를 절감할 수 있고 우리은행과의 신용도도 높아져 사업자금 조달이 용이한 측면이 있다.
외국의 경우 입출금이 빈번한 계좌(트랜젝션 어카운트), 수표발행 계좌(체킹 어카운트) 등을 ‘주거래계좌’로 인식하지만 우리나라는 ‘급여통장=주거래계좌’로 정착했다.
우대금리 사실상 제로, 유인책 없어
주거래계좌를 이동했을 때 고객들이 옮긴 은행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인센티브가 거의 없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은행들은 기존고객을 잡고 신규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상품과 이벤트 진행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대부분 빛 좋은 개살구다. 시중은행들이 내놓은 ‘유인 상품’의 구성이 빈약한데다 대부분 비슷해 굳이 계좌를 옮길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KEB하나은행은 주거래계좌에 가입한 개인사업자에게 수수료 면제 혜택을 주고 있다. NH농협은행은 일회용비밀번호생성기(OTP)나 NH안심보안카드를 무료로 제공하고, 추첨을 거쳐 스마트폰과 목우촌선물세트 등을 준다.
SC은행도 신규 자동이체 고객에게 갤럭시 기어 S2, CGV 모바일 영화예매권 등을 증정하는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신한은행은 자동차(아반떼·스파크)를 경품으로 내건 초대형 경품 행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유인책인 우대금리는 주지 못하거나 주더라도 0.1~0.2%가량이다. 이는 사상초유의 저금리로 은행의 예대마진(예금-대출간 발생이익) 폭이 크게 줄었기 때문. ‘지점장 전결금리 1%’는 옛말이 된지 오래다. 2008년 5%대였던 한국은행 기준금리는 계속 내려가 현재는 사상최저인 1.5%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일부은행이 계좌이동제 가입고객에게 준다는 2~3%대 금리도 자세히 보면 한도액이 설정돼 있거나 특정 조건을 단 이벤트 성격이라 피부로 느낄 수준이 아니다”며 “금리로 유인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예대마진이 1%도 안되는 상황이라 엄두를 못내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은행은 신규 고객 유치 실적을 영업점 경영평가(KPI)에 반영하는가 하면 직원들에게 페이인포 사이트를 통해 계좌이동을 해보라고 권고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특별 상품을 출시하고 이벤트를 벌이면서 드는 마케팅비용에 비해 계좌를 끌어들이면서 얻는 파급 효과가 거의 없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향후 은행창구에서 자동이체 계좌를 변경할 수 있게 되더라도 이같은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내년 2월부터는 자동납부 뿐 아니라 개인 간 자동송금도 한꺼번에 옮길 수 있게 될 예정이지만 별다른 유인책이 없는 상황이라 은행직원들의 피로감만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은행들이 단기적 성과에 치우쳐 제살 깎아먹기식 경쟁을 펼치기 보다는 일단 차분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권고한다.
금융당국 한 관계자는 “고객의 번거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통합전산망(계좌이동제)이 도입된 것인데 은행 간 고객유치전 양상으로 변질되고 있다”며 “주거래통장을 바꾼다 하더라도 예금·대출 등 은행의 수익을 결정짓는 실적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주거래 통장은 A은행에 두더라도 예금과 대출은 금리가 조금이라도 좋은 은행에 몰리기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