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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현장]“제발 내 목소리를…” 그들은 왜 국회 앞에 섰나

수십개의 ‘부러진 화살’들…국회 정문 앞 1인시위자 전부 만나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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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도기천기자 |  2015.09.22 17:50:55

▲경북 경산시에서 상경한 이병순씨(58)는 교통사고로 반신불수가 된 고령의 남편과 함께 국회 정문 앞에서 사기혐의자를 처벌해 달라며 시위하고 있다. 21일 오후 이씨가 남편 김영희씨(65)에게 죽을 먹여주고 있다. (사진=도기천 기자)

국정감사 13일째다. 롯데그룹 경영권분쟁에서 비롯된 재벌개혁이 화두다. 올해도 갑질 해 온 기업들의 이름이 여과 없이 공개되고 있으며, 계열사 일감몰아주기, 골목상권 침해, 순환출자 등 한국 재벌의 고질적인 병폐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은 지난 4년간 이들에게 1조원이 넘는 부실 대출을 해줬다고 한다. 재벌가 청소년 39명이 가진 주식의 시가총액이 1000억을 넘는다는 얘기도 들린다. 기업들은 대관팀을 총동원해 총수가 국감장에 서는 일을 막기 위해 분주하다.   

총선을 7개월 앞둔 정치권은 고위관료, 재벌총수, CEO 등을 불러놓고 호통치기 바쁘다. 이들이 카메라 세례를 받는 동안,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누군가는 국회 앞에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300명의 국회의원과 2000명이 넘는 보좌진, 1000명이 넘는 국회출입기자가 외면한 이들의 이야기다.  

교통사고보험금 2억7천만원을 사기 당했는데 되레 협박범으로 몰렸다는 이병순씨 부부, 2004년 공무원 총파업 때 해고돼 10년 넘게 복직농성을 벌이고 있는 왕준연씨, 군(軍)에서 두 다리를 잃은 동생의 진실규명을 위해 수년간 국회와 국방부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박준호씨, 대학강사의 교원지위 보장을 요구하며 9년째 국회 앞 텐트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최장기 1인시위자 김영곤씨 등 사람들은 저마다의 ‘한(恨) 덩이’를 안은 채 거리에 서 있다. 법도, 언론도, 정치권도 외면한 국회 앞 풍경이다.

“그저 내 얘기를 들어만 달라”는 이들을 언제까지 외면할 수 없었다. 지난 21일, 여전히 30도를 오르내리는 늦더위 땡볕 아래서 온종일 그들을 만났다. (CNB=도기천 기자)

▲(왼쪽부터) 11년간 복직 투쟁을 벌이고 있는 왕준연씨, 군(軍)에서 두 다리를 잃은 동생의 진실규명을 위해 거리로 나선 박준호씨, 새만금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며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최남문 할아버지. (사진=도기천 기자)

교수에서 일용노동자까지 목에 피켓 걸고
세상을 향한 단 한마디 “내 목소리 들어줘”
법도, 언론도, 정치도 외면한 국회 앞 풍경
 
가을바람이 선선하지만 한낮엔 무덥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이들에겐 원망스럽기만 하다. 그래도 폭염을 넘겼고, 살을 에이는 한겨울 보단 서 있기가 나을지 모르겠다. 저마다 하나 이상씩의 사연을 안은 채 자기 몸집보다 더 커 보이는 피켓 하나에 기대어 있다.

휠체어에 앉아 힘겹게 버티고 있는 중증장애인들도 몇 명 보인다. 그들 옆으로 차창을 짙게 가린 국회의원들의 고급승용차가 무심코 지나다닌다.

경찰서에 신고할 필요가 없는 1인 시위가 정착되면서 국회 앞은 국감 때마다 나홀로 농성자들로 넘친다. 새로운 이슈를 들고 올해 국감에 처음 참여한 새내기도 있지만 대부분은 몇 달, 몇 년째 농성을 이어오고 있는 이들이다.

▲대학강사의 권익 강화 및 조선대 대학강사 서정민 씨가 2010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의 재조사를 촉구하며 8년간 국회 앞에서 텐트농성을 벌이고 있는 김영곤씨. (사진=도기천 기자)

김영곤 강사, 8년간 국회 앞 텐트농성

이 중에서도 최고참은 8년간 텐트농성을 해온 김영곤씨(67)다. 한때 잘나가던 고려대 시간강사였던 김씨는 지난 2013년 해고됐다. 2007년 9월17일부터 2937일째 대학강사의 권익강화를 주장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데, 학교 측에 밉보여 해고됐다고 한다.

‘시간강사’ 명칭이 ‘강사’로 바뀌었고 교원 지위를 부여하는 내용의 고등교육법 개정안이 2011년 마지막날 통과됐지만, 김씨의 투쟁은 멈출 줄 모른다. 여전히 강사들은 거대사학 앞에 파리 목숨이라는 게 김씨 주장이다.

김씨는 2010년 조선대 대학강사 서정민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의 재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교수직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서씨가 지도교수의 논문을 대신 작성해줬는데, 지도교수가 약속을 어기고 교수임용에서 탈락시키자 분을 참지 못해 목숨을 끊었다는 게 세상에 알려진 얘기다.

서씨 가족은 조선대 법인과 논문대필 지도교수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 중이다. 논문대필을 지시한 지도교수에 대한 형사고발, 학교 측의 근로기준법위반 혐의 등은 모두 공소시효가 만료됐거나 무혐의 처분됐다.

김씨는 지금도 고려대에서 종종 학생들을 상대로 ‘도둑 강의’를 하고 있다. 학교 측의 허가 없는 수업이다. 학생들은 이를 ‘0학점 강의’라 부른다.

▲(왼쪽부터) 중증장애인 활동보조(사회복지사의 돌봄) 시간을 늘려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임종순씨, 여성장애인에 대한 정부예산 삭감 움직임에 항의하고 있는 이희경씨, 고용노동부가 사측과 공모해 노조를 와해시키려 한다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오스람코리아 노조 소속 박진수씨. (사진=도기천 기자)

11년간 복직 투쟁 왕준연씨

국회 앞 최장기 농성자는 김씨지만, 가장 오래된 사건의 당사자는 왕준연씨(55)다. 그는 공무원 노조가 창립될 시기인 2004년 11월 공무원 총파업 사건으로 해고됐다. 당시 44살이던 왕씨는 경북 상주시청 소속 공무원이자 한창 커나가는 아이들의 아빠였다.   

당시 사건으로 1500여명이 해고되거나 중징계를 받았다. 세상이 바뀌면서 대부분 복직됐지만 왕씨를 비롯한 135명은 아직도 거리에 남아 있다.

왕씨와 동료들은 1982일째 국회 앞 1인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18대와 19대국회는 왕씨 등을 복직시키기 위한 특별법을 발의했지만 쟁점법안에 묻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왕씨는 “공직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척결하자는 게 공무원노조의 출범정신이었다. 그로인해 11년간 이렇게 큰 고통을 겪게 될지 몰랐다”고 하소연했다.

▲광주광역시에서 올라온 전국철거민협의회 소속 조덕임씨가 재개발에 반대하는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도기천 기자)

박준호씨, 억울한 동생 위해 거리 나선지 20년

박준호씨(50)는 군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동생을 위해 거리로 나선 지 20년이 넘었다.

1994년 12월17일 당시 스물네살 육군중사 박준기(박준호씨 동생)는 교통사고를 내고 병원으로 후송됐다. 안전벨트 덕분에 박 중사는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다.

하지만 헌병대 연행과정에서 계단으로 추락해 다리를 크게 다쳐 결국 두 다리 모두 절단하게 됐다는 게 박씨 측 주장이다. 군 당국은 박 중사 스스로 병원 10층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했다며 사건을 종결했다.

군 수사자료에는 ‘박 중사가 반개방형 창문(창문 하단 손잡이를 잡아당기거나 밀어 살짝 열리도록 고안된 창문)을 21㎝ 열고 아래로 떨어졌다’고 쓰여 있지만 그 정도 폭으로는 사람이 빠져나갈 수가 없다.

이때부터 20여년간 박씨는 생업을 접고 동생 사건의 진실을 밝혀달라며 정부, 언론 등을 상대로 호소해왔다.

결국 국방부는 최근 민관합동 재조사를 결정했다. 하지만 군 검찰은 공소시효가 지났다며 박 중사 사건을 기각했다.

박씨는 지난 7월30일부터 국회와 국방부를 오가며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때 고향인 전북 군산에서 ‘사장님’ 소리를 들었던 박씨는 현재 일용직노동자로 생계를 잇고 있다. “동생의 한을 풀어주는 게 내 삶의 전부”라고 말했다.

▲수원대 교수협의회 공동대표인 이원영 교수가 이인수 수원대 총장의 국정감사 증인 신청을 요구하는 내용의 프랭카드를 들고 국회 앞에 서 있다. (사진=도기천 기자)

거대사학에 맞선 이영이 박사·이원영 교수

사학재단의 전횡 의혹에 맞선 이들도 여럿 있다. 모교인 상명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이영이씨(30·여)와 그녀의 동료 이진희씨(39)는 지난해 8월부터 1년 넘게 국회 앞에서 학교재단에 맞서 싸우고 있다. 학교 측이 문화재청에서 준 학술용역비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

교육부 등에 진상조사를 해달라고 수차례 민원을 넣은 결과, 지난 1월 나선화 문화재청장과의 면담이 성사됐고 문화재청은 조사를 약속했다. 하지만 민원 당사자인 이씨 등을 단 한번도 부르지 않은 채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다”며 조사를 종결했다.
   
수원대 교수협의회 공동대표인 이원영 교수도 프랭카드를 들고 국회 앞에 서 있다.

교수협의회와 참여연대 등은 지난해 7월 수원대 이인수 총장을 교비 횡령 등 이유로 검찰에 고발했다. 하지만 1년이 넘도록 수사는 지지부진하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야당 의원들이 이 총장을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하려 했지만 새누리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 총장은 국감이 시작되자 지병을 이유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다.   

▲상명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영이씨는 학교 측의 학술용역비 횡령의혹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도기천 기자)

중증장애 임종순 “돌봄 시간 늘려달라” 

휠체어를 끌고 나온 장애인들도 있다. 중증장애를 앓고 있는 임종순씨(60·여)는 활동보조(사회복지사의 돌봄) 시간을 늘려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임씨는 “혼자 사는 중증장애인을 24시간 돌봐주던 제도가 점점 축소되고 있다. (장애인단체 동료인) 오00 군(청소년으로 추정됨)은 사회복지사가 활동보조 시간이 다 찼다며 가버린 뒤 숨졌다. 65세가 되면 일주일에 60시간 밖에 돌봄을 받지 못하는데, 결국 늙으면 죽으란 얘기 아니냐”며 울먹였다.

임씨의 옆에서 25일째 1인시위를 이어가고 있는 장애인 이희경씨는 “여성장애인에 대한 정부예산을 삭감하려는 (국회의) 움직임이 있어 나왔다. 연말 예산편성 때까지 자리를 지킬 생각”이라고 말했다.        

▲1인시위자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가끔씩 함께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한다. 1인시위자 4명이 서울 영등포경찰서를 칭찬하는 문구가 적힌 종이판을 함께 들고 있다. (사진=도기천 기자)

노부부 “살길 막막…국회가 마지막 희망”

그나마 세상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이슈를 들고 나온 이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하면 나아 보였다. 살 길이 막막해 무작정 국회 앞에 자리를 깐 사람도 있다.

이달 초 경북 경산시에서 상경한 이병순씨(58·여) 부부는 전 재산을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사기를 당했다고 한다.

이씨에 따르면, 남편 김영희씨(65)는 10여년전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다. 반신불수가 된 남편 앞으로 사고보험금 2억7000만원이 나왔다. 이 돈을 사기 당했고 지금은 되레 협박범, 명예훼손범으로 몰렸다.

속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부부의 현재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국회 담벼락에 대자보를 세워두고 그 아래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고령의 남편이 누워있다. 이씨는 남편에게 죽을 먹이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남편 상태는 위중해 보였다. 저 상태로 국회 앞에서 보름을 견뎠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 30도 가까운 무더위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국회경비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국회 앞에서는 1인시위 뿐 아니라 단체집회도 종종 열린다. 21일 ‘여성공동행동’ 소속 회원들이 비례대표 확대로 여성의 국회 진출 기회를 넓혀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사진=도기천 기자)

“송전탑 반대” 최남문 할아버지

재개발에 밀려 생존터전을 잃어버린 상가세입자도 있었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국회, 지방자치단체 등을 찾아가 호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재개발은 예정대로 진행됐고 그들은 가게를 잃었다. 광주광역시에서 올라온 전국철거민협의회 소속 조덕임씨(60)가 이들을 대신해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아들이 뺑소니범이 된 과정이 억울하다며 서울과 부산을 오가고 있는 어느 할머니도 있다.  교통사고를 낸 아들이 피해자에게 연락처를 전달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 돼 구속돼 재판을 받았다. 전과자가 된 아들은 화병이 나 20년 가까운 세월을 세상과 등지고 살고 있다. 할머니는 왜 아들이 뺑소니범이 됐는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밖에도 한국전력공사가 강행 하고 있는 전북 군산의 새만금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기 위해 군산시 옥구읍 수산리에서 상경해 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최남문 할아버지(77), 고용노동부 안산지청이 사측과 공모해 노조를 와해시키려 한다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오스람코리아 노조 소속 박진수씨(40)와 일행들, 사법부와 과거정권이 자신의 재산을 강탈해 갔다며 수년째 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김경재 할아버지(70), 비례대표를 확대해 여성의 국회 진출기회를 넓히자는 ‘여성공동행동’의 집회 등 국회 앞은 하루 종일 내 목소리를 들어 달라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이곳은 대학교수에서 일용직노동자까지 함께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한사람씩 각자의 한(限)을 들고 나왔지만 함께 퍼포먼스를 벌이는 모습도 쉽게 목격됐다. 내 사연 뿐 아니라 옆 사람 얘기도 들어달라고 했다. 어찌보니 고립된 가운데 자신들만의 세상을 함께 만들고 있었다. 피켓을 목에 걸고 서 있는 순간만큼은 ‘사회적 약자’가 아닌 ‘당당한 전사’로 보였다.  

이들은 언제까지 이렇게 서 있어야 할까. 이들이 세상을 향해 쏜 석궁의 ‘부러진 화살’을 다시 붙일 방법은 없는 걸까.

(CNB=도기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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